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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 /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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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
설 교 : 김철현 목사 (예중교회)
본 문 :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과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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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카르타고>의 유명한 <한니발 장군>은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화가를 불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화가는 사실대로 한쪽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본 한니발은 노발대발합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병신으로 그리랬느냐"며 당장 목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화가를 불러서 역시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먼저 죽은 화가가 한 쪽 눈을 그리지 않아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이 사람은 두 눈이 성한 모습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한니발은 화를 내면서"아니 내 눈이 하난데 왜 두 개를 그렸느냐. 이것은 내가 아니라 딴 사람이다"며 역시 참수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불려 온 화가는 무사히 생명을 부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쪽 눈이 그림에 나타나지 않도록 한니발의 옆모습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사실하나를 두고도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 어디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실이 진실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행복이 되기도 하며 불행이 되기도 합니다. 내 생각의 향방에 따라 성공한 것도 되고 실패한 것도 됩니다. 그래서 실패한 듯 했으나 성공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성공했음직 하나 실패한 사람들도 심심찮게 만납니다. 문제는 그 사람의 생각의 한계가 어디이냐, 그 사람의 의식이 어디까지 깨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관심이 머무는 곳이 어디냐가 결국은 행, 불행의 갈림길이요, 승패의 좌우라는 말입니다. 끝까지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마지막까지 불행한 사람도 있는 것이 왜 이겠습니까? 실상은 행복했어요, 하나 그 행복을 깨달을 수 있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의식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행복을 불행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슬픈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가난했지만 세 아들을 거느리고 어질게 살아가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가 온 죽음 앞에서 노인은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남진 말 열일곱 마리를 가지고 큰아들 너는 1/2을 가지고, 둘째는 1/3을 가지고, 막내 너는 1/9을 가지도록 하여라"삼 형제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말 열일곱 마리를 놓고 계산을 했습니다. 큰아들이 17마리의 1/2이면 8.5마리이니 아홉 마리를 가지겠다고 했습니다. 두 동생은 형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반대를 합니다. 둘째가 17의 1/3이면 5.6마리이니 여섯 마리를 가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맏형과 막내가 반대합니다. 막내는 17마리의 1/9이면 1,8마리이니 두 마리를 가지겠다고 합니다. 두 형은 계산대로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삼 형제가 계산서를 앞에 놓고 다투고 있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광경을 목격합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타고 가던 말 한 마리를 형제들에게 줍니다. 이제 삼 형제는 18마리를 가지고 쉽게 계산하여 자신들의 소원대로 9마리, 6마리, 2마리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마리가 남았습니다. 사실은 처음 17마리를 가지고도 싸우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자신들의 소원대로 나누어 가질 수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형제들은 이것을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더 가지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제서야 깨달은 그들은 한 마리의 말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있는 이기심이 문제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반문했던 가인과 같은 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하나의 형제들의 관심은 정확한 계산만이 문제를 푸는 유일한 열쇠라고 여겼습니다. 모든 문제를 타산적인 사고를 가지고 바라보고 거래 적인 차원으로 생각하는 독선적인 관심사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형제끼리 싸우게 하려고 유산을 물려주는 법이 있겠습니까? 삼 형제가 그 유산을 무리 없이 나누어 갖는 지혜를 갖기를 원했고, 그것을 나누면서 욕심보다는 서로 양보함으로 화목하게 살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관심의 향방, 마음의 방향이 중요한 것입니다. 돈, 명예, 지식, 지위를 다 가졌다 해도 내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여 있으면 절대로 행복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관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의"입니다. 의롭게 사는 것,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지금 막 죽음을 맞이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죽는 시각인데 재산이 소용 있겠습니까? 장수한 것이 보람이 됩니까? 지식이나 명예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설 것인가"하는 <의>만 있을 뿐입니다.

"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의입니다. 나의 세계관, 나의 철학, 나의 경험, 나의 고집, 나의 양심에 따라 스스로 세운 의입니다. 그것이 절대적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자기의 의외에는 어떤 것에도 침범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입니다.

둘째는 상대 적인 의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참 궁금하거든요. 이웃과의 관계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낫다거나 못하다고 비교하게 되는 의입니다. 그리고 그 비교에서 반드시 내가 인정받고 싶어하는 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한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는데서 더 큰 만족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노력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칭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며 삽니다. 거기에 신경 쓰다보니 진실이 결여되고 결국은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셋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대로 어기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마땅한 의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 세 가지의 의를 다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이 <통합적인 의(統合的인 義)>를 이루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지를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때에는 나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인정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는 내게도 옳고 하나님도 의롭다 하시는데 사람들이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외롭고 고독한 길입니다. 이것이 순교자의 길이요, 성도의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갈 때에만 평안이 있습니다. 내가 떳떳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이 길, 이 가치관이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게 되면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서로 명예는 다르고 위치는 다릅니다 마는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둘째 공통점은 둘 다 의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각각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스스로 성찰하고 나의 의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린다고 하면서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수염을 기르고 값진 옷을 입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앞자리에,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에 서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들어 주실 것이라는 자기교만에 빠져 큰 소리로 미사여구를 사용하면서 될 수 있으면 길게 기도했습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며 자기 의를 내세울 것인가에 매여있는 가치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겉모습뿐이었습니다. 끝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 맙니다.

반면,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것조차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기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앞자리에도 못 서고 멀리 서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는 하나님께 감히 무엇을 요구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13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리새인의 기도 첫머리에는 "나는 무엇도 했고, 나는 무엇도 했으며..."라고 수 없이 반복하는 자기 자랑이 있었건만 세리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주변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아마 해 놓은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기에 너무나 부끄러워 생각조차 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단지 한 마디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이것만 되풀이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의 핵심은 자기 의를 전적으로 부정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세리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나서게 됩니다.

성경에서 멋있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여인은 그저 흐느껴 울기만 했습니다. 어떤 환자는 소리만 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없이 예수님의 처분만 기다렸습니다. 어떤 여인은 말없이 눈물로 그 발을 적셨습니다. 또 어떤 여인은 떼를 쓰며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세리는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응답 받았습니다. 왜일까요? 이들의 기도에는 자기의 자랑, 즉 자기 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바랄 뿐입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드려지는 정도의 가치와는 다른 기도입니다. 몸으로 드려진 기도라는 점입니다. 하시라도 모든 것을 드려서 감사 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신앙적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의, 자기의 자랑을 늘어놓기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로 모든 것을 내어놓지 못합니다. 언제나 되돌려 받을 수 있고 언제든지 철수 할 수 있는 만큼의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 합니다. 다행히 자기자랑이나 자기 의가 먹혀들면 발을 딛고 살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는 얼른 발을 빼고 돌아서는 비 신앙적인 모습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를 좀 돋보이게, 좀 더 낫게, 좀더 거룩하게 보이고자하는 의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좀 특별하게 보이고 싶다는 구별의식이죠. 그러나 여러분, 나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특권의식, 이것은 참으로 나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도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11절입니다."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아주 교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생각해 봅시다. 기도를 많이 했다고 다 이루어집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셔야 합니다.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선행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마6:17에서 예수님은"금식 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으며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마6:3)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은밀한 곳에서 보시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선행과 기도와 헌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바리새인처럼 어떻게든 자기 의를 내세워서 하나님께로부터, 혹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내려는 <보상 심리적 가치관(補償心理的 價値觀)>을 가지고 살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이 <신앙적 가치관(信仰的 價値觀)>으로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소원이 너무 많습니다. 약속도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까지 내뱉은 거짓말도 산더미같이 쌓였는데 또 무슨 말을 더 할 것입니까? 기도하는 사람, 예배하는 사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나만 생각해야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밖에 더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신앙적 가치관에서 우러나오는 이 한 마디면 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세상은 하루도 제 자랑을 늘어놓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자랑, 내 의를 나타내는 불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에 두시기 바랍니다.
자기자랑 때문에 교만하지 말며,
자기 의로 인해 마땅한 상급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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