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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만나라 / 시 4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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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을 만나라
본 문 : 시 42:1-11
설 교 : 김이봉 목사 (상도교회)



□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1) 


1. 우리 믿는 성도들이라면 모두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한다고 하는 말인가?
우리는 가끔 이런 말에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대부분 윤리적인 선(善)을 강조하는 종교들입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도 선행(善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선행을 가르치는 종교는 아닙니다.
또 많은 종교들이 사후(死後)의 세계를 말합니다.
심지어 미신종교에서도 저승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착하게 적선(積善)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권합니다.
모든 종교는 행위(行爲)의 구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며,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관념의 하나님이 아니고, 인격의 하나님으로, 꿈에나 나타나고 산신령처럼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그러한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으로 우리와 직접 호흡을 같이하며, 이 역사 안에서 같이 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입니다.
인류 역사의 분기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으로 하여, 주전 주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였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런 면에서 독특한 유일신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들과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가 말씀한대로 내 대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여, 오늘 이 시간까지 성령으로 우리와 같이 하심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세상의 비방하는 자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날마다 우리를 조롱하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도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는 그렇게 말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하여 내 사정을 방관만 하고 있느냐?
의심을 불러일으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어느 남편과 사별하고 외아들과 함께 살던 한 어머니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그 아들마저 잃었을 때, 기도하면서, "주님, 어쩌면 그럴 수 있습니까?"
"내가 무슨 그렇게 큰 죄를 지었기에 남편과 아들을 이렇게 빨리 불러갑니까?"
"당신은 사랑의 주님이 아닙니까?"
"약하고 불쌍한 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나 같은 불행한 것을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십니까?"
"어디 말씀 좀 해 보시구려...."
"십자가에 달려만 있지 말구 내게 무슨 말씀이라도 해 보시구려..."

이렇게 몸부림치면서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직접적인 불행스러운 일을 당하면,
처음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의심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격정의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마음이 잡히면 주님의 뜻과 그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이 또한 신비로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살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이 세상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하고 사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젊어서 하나님을 경외할 때 그것이 축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건강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것이 축복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과 지위와 명예가 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것들을 다 잃어버린 후에 하나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후회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이 내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다 아직도 내 힘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다 아직도 내 능력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만나려면 사슴처럼 되어야 합니다.

푸른 초원에서 노는 사슴이 아니라,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처럼 되어야 합니다. 갈증을 만난 사슴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그 사슴처럼 우리의 영혼이 갈급 하여야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갈급한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을 생각해 보면,
왜 내가 하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는가를 쉽게 깨닫게 됩니다.

'사슴이 갈급 하여 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주를 찾아 갈급 하나이다' 라는 이 말씀을 유념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에게 좋은 것만 채워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그런 하나님이 아니란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 믿는 신앙은 아직도 90% 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내 요구를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 자신의 전부이어야 합니다.
이럴 때 이것이 100% 의 신앙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이 욥의 신앙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이미 죽은 고목 같았던 아내의 몸에서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기에게 재물과 자녀를 주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신 이도 여호와 시오, 도로 찾은 이도 여호와 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 지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욥의 하나님은 자신들의 전부였습니다.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 자체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100%의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목말라 갈증을 느낍니다.
그럴 때 생수 한 병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생수는 또 말라 다시 찾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 않는다'
고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주님은 갈증날 때 한 목음의 물이 아니라,
갈증자체를 해소하는 생수의 근원이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성취케 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찾을 경우가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체가 생수임을 알고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 배에서 생수가 되어 나오는 경험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전천후 적인 신앙생활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의 얍복강 나루터를 경험해야 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 전까지의 하나님은 자기 머리 속에 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조력자(助力者)자로서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자기를 지켜 주어야 하는 그런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과의 흥정 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가는 길에 함께 하여 주시고,
나의 생각하는 바가 모두 성취되게 하면,
나의 소득의 열의 하나를 당신께 드리겠나이다" 라고 한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철저한 주고받는 (Give and Take) 식의 신앙이었습니다.

요즘도 이런 신앙의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생각하는 바를 성취해 주고,
나의 가는 길에서 형통케 해 주면,
나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겠나이다 라는 식의 신앙 생활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신앙 생활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신앙 생활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것을 기적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빌립의 생각처럼 200 데나리온의 떡을 사서도 모자랄 것이지만, 주님께 드려진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는 5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철저하게 계산적입니다.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상위에 있는 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가의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 자기가 관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야곱의 신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철저한 계산주의 자 이였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의 집에서 20년을 지내면서 자기 앞으로 많은 재물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재물을 가지고 예전에 지은 허물을 용서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형(兄) 에서의 마음을 물질로 사려고 앞서 선발대를 보내면서 형 예서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자식들은 강을 건너 보내고, 자기는 강 이편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 야곱으로서는 제일 진지한 기도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이제 천사를 붙들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밤이 새도록 씨름을 하였습니다.
야곱 기질이 여기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지면 또 붙잡고, 지면 또 붙잡고 끊질 기게 야곱은 천사를 놓치 않았습니다.
결국 환도 뼈가 위골 되기까지 놓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이제 너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칭하리라'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런 야곱의 얍복강 나루터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위골 되기까지 놓치 않고 매어 달리는 그런 집착력과 간절 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두 손드는 항복의 체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과의 흥정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 무엇을 해 주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겠나이다,
하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믿는 신앙은 참된 의미에서의 신앙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욕심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사는 신앙 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난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한 신앙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신앙의 소유자들이 금년에 다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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