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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창조 / 사 65:17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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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새창조
본 문 :  이사야 65:17 ~ 19
설 교 :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이사야 65:17 ~ 19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베드로후서 3:3 ~ 7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뒤로, 만물은 처음 창조 때로부터 그냥 그대로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오랜 옛날부터 있다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서 물로 형성되었다는 것과, 또 물로 그 때의 세계가 홍수에 잠겨서 망해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일부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서 멸망을 당할 때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가복음서 13:32 ~ 37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 때가 언제인지를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여행하는 사람의 경우와 같은데, 그가 집을 떠날 때에, 자기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녁녘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무렵일지, 이른 아침녘일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오더라도,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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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벌써 11월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제 한 달만 지나면 한해를 결산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달력으로 보면, 또 경동교회의 달력으로는 오늘이 결산을 해야 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달력은 1월부터 시작해서 12월에 끝나는 게 아닙니다. 12월초에 시작해서 그 다음해 11월말에 끝납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성탄일이 12월 25일인데, 그 성탄을 맞기 4주전부터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가 시작됩니다. 그 절기가 대림절인데, 다음 주일부터 시작됩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11월 마지막 주일, 이날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결산하는 날입니다. 각자 결산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창립일을 정하거나 특별한 일을 할 때, 보통 교회절기 가운데 세 가지 절기에 맞추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우리 경동교회처럼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일에 교회를 창립하거나 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부활하신 부활주일을 기념하여 교회를 세우거나 새로운 결단을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또 마가의 다락방 사건을 생각하면서, 부활 후 50일이 되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 날, 성령 강림절에 교회를 시작하는 데도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 부활절, 성령 강림절이 아닌 그 어느 날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한 교회는 시작하는 날을 정했을 때의 명분과 신학적 의미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 교회는 대림절에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소망하는 절기의 첫 주일, 12월 첫 주일이 창립기념입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은 창립기념일 축하 겸 우리 신앙을 다질 겸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릴 겸 이래저래 축제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부터 보여주신 그 역사, 하나님의 역사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인간 역사를 보는 중요한 관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형성하는 모든 역사의 구비 구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형상과 함께하는 역사입니다.
이 역사를 평면에 놓고 그려본다면, 천지창조라는 시작이 있고, 지금은 중간 지점 어디쯤 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완전히 끝내는 종말에 그 역사의 마지막이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중간 어딘가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면을 둥글게 말아 원통형으로 만들어서 입체적으로 보면, 시작과 끝은 양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동시에 마지막으로 역사를 완성하실 분입니다. 시작과 끝이 만남으로써 입체형 그림이 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창조를 통하여 시작된 이 역사의 마지막을 새로운 창조, 하나님의 재창조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사닥다리를 통해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창조 때 사다리를 내리시고, 맨 위칸에서부터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십니다. 처음에 한 계단 내려오셔서 에덴동산을 여시고, 그 다음에 이집트에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다음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고, 광야길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이집트 탈출, 가나안 입성 전까지의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당신의 형상으로 함께하셨습니다. 십계명 속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광야에 세운 장막 속에도 함께 계셨고, 나라를 세운 뒤 지은 성전에도 함께 계셨고, 성전에 모셔둔 언약궤 속에도 계셨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 가운데에도 계셨고,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도 형상으로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고, 그 인간에게 역사를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감동 감화시켜서 역사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가지 않았습니다. 천지창조의 질서에 따라 세계 역사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단합니다. "입김을 불어넣은 것만으로, 형상을 준 것만으로는 인간의 역사를, 피조물의 역사를 도무지 구원시킬 수 없겠다. 형상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 내가 직접 역사가 되어야 하겠다. 내가 직접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어야 하겠다."

형상이 아닙니다. 그분이 직접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직접 역사가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성육신 했습니다. 그 성육신을 우리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 그렇게 말합니다.

경동교회를 설립할 때 강원용 목사님께서 하신 설교를 보면, 경동교회의 창립정신은 인카네이션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육의 몸을 입고 역사가 되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오신 모양이 경동이라는 모양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인카네이트 되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 이것이 경동교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자부심일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스스로 역사가 되시고 사건이 되셔서 베들레헴 땅에 왔습니다. 이 일을 여러분은 12월 첫 주일부터 기념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시고 만유 위에 홀로 계신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몸을 입으셨습니까? 그분이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올 때는 어떤 광경을 연출합니까? 대규모 오케스트라 연주가 펼쳐집니까? 엄청난 군중들이 환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그려진 예수님의 탄생 모습은 보잘것없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캄캄한 밤중, 어둠이 짙었던 밤, 양을 치던 미천한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 예수를 찾아서 왔더니, 예수는 여관방도 아니고 아주 작은 마구간 한구석, 구유 속에 강보에 싸여 누워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낳은 어머니 마리아는 너무 기뻐서 찬송을 부르고, 그 아버지는 산모와 아기 뒷바라지에 바쁘고, 구세주를 뵈러온 목자들도 기뻐하며 찬송하고는, 삶의 현장인 들판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말구유의 사건은 우리가 성탄을 맞을 때마다 그림으로, 찬양으로, 또는 디자인으로, 건축으로 형상화합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소박한 현장, 지푸라기밖에 없는 그런 현장입니다. 그것이 영원이 유한한 시간 가운데 임하는 장면입니다. 미래에 전 우주적으로 이루어질 엄청난 비전이 작은 역사의 한 지점에 임하는데, 이토록 초라하게 임합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으로 오실 적에 이렇게 아주 조용하게, 아주 낮게, 남들이 모르게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런데 당시 세계는 그 영원을, 그 하늘을 받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자기 스스로 택합니다. 말구유를!

광화문 네거리의 번화하고 화려한 공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가장 굴곡이 심하고, 가장 어둡고, 가장 많이 짓밟히고, 가장 비천한 곳에 하나님이, 이 세속 역사 너머의 영원의 역사가 세속의 몸으로 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탁하십니다. 작은 공간 하나만 빌려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잘 먹고 잘 사는 것 다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 다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안에 작은 공간 하나만 마련하라고 하십니다. 그 작은 공간 속에 잉태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나 그 작은 공간 속에 성육신한 하나님은 크고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것을 믿습니까? 공간 하나 주십시오.

오늘날 태어날 그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2002년 12월에 태어나실 그분한테 오늘 여러분, 작은 공간 하나 내어 주십시오. 큰 것 필요 없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면 됩니다. 말구유보다 더 험한 곳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개의치 않으십니다. 목동들이 아기 예수의 누우신 모습을 보면서도, 그 비참하고 형편없는 모습을 보면서도, 하늘을 향하여 찬양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비천함 속에 담긴 하늘의 광채, 그 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활이 편안하고 풍족하면 복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 말이, 인간은 너무나 간악해서 자기가 받은 복은 손가락으로 세고, 자기가 당한 불행은 계산기로 계산하려 든다고 합니다. 우리 미래의 엄청난 희망은 인색하게 셈하면서, 우리가 받는 현재의 고난은 과하게 계산합니다.
요즘에, 고의는 아니었겠습니다만, 미군 탱크가 여중생 둘을 치어 죽였는데, 그 사건에 대한 재판 문제로 우리 사회가 들끓고 있습니다. 아마 미군을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겁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공정한 법의 잣대가 적용되고, 정의가 실현되며, 하늘의 뜻이 있는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면이 될 망정 재판은 공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뜻은, 당했으면 당했다고 얘기하고, 고칠 건 고치고, 용서받을 건 받고 화해할 것은 하고, 그래서 새롭고 떳떳한 나라를 만들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한 가지 얘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최 장로라는 분이 계신데, 우리 교회 바로 옆에 있는 교회의 장로입니다. 이 사람을 제가 학교에 있을 때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중학교에서 교사로 지내다가 아내 될 사람이 전도사로 시골에 부임하자, 결혼하고서 교직을 그만두고, 대학에 직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잘 살았습니다. 그분은 50대 중반 나이인데, 사람이 너무나 순박해서 법이 없어도 살 사람입니다. 혹시 신문에서 기사로 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젯밤에 제게 전화를 했어요. 내일 뉴질랜드로 선교 이민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아들이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2학년을 다니다가 군에 가게 되었는데, 자기는 천문학도니까 군 복무 기간에도 별을 보고 공부해야 되겠는데, 별을 많이 볼 수 있는 데가 해군 같다며 해군에 지원했습니다. 4년 전에 해군 함선에서 상사와 동료들과 함께 파티를 벌이다가 많이들 취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상사 한 사람이 취해서 부하들이 뭘 잘못했다고 쇠파이프를 흔들면서 기합을 주다가, 이 아이가 머리를 맞아 즉사했습니다. 4년 전입니다만, 이 사건이 스캔들이 되어서 온 나라가 들끓은 일이 있습니다. 저도 그 현장에 가보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별을 연구하겠다던 아이가 쇠파이프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에 한과 분노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일의 와중에 여동생이 이상해졌습니다. 충격, 분노, 좌절, 거기다가 입시 스트레스가 쌓여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대학은 가긴 갔는데, 늘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엄마가 딸아이를 데리고, 선교사로 뉴질랜드로 떠났습니다. 최근에 아버지는 직원 생활 20년이 지났고, 마침 명예퇴직 제도가 있어서 학교에 명퇴 신청을 했습니다. 앞으로 은퇴할 때까지, 7년 동안 받을 봉급의 일부를 명예퇴직금으로 받았는데, 아마 1억 3천만 원쯤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은 결심했습니다. 그 돈 전부를 죽은 아들과 같은 애들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자기가 봉직했던 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내일 훌훌 털고 뉴질랜드로 떠납니다.

저와 전화로 인사를 나누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뉴질랜드에 가면 초콜릿 가게를 열기로 했다며, 초콜릿이 맛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쪽 사람들이 많이 사먹어서 돈을 벌면, 전부 선교헌금에 바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동안 저에게 하나님이 주신 복이 너무나 많아서 자기는 지금도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그렇게 데모하고 떠들고 난리 치던 아이들에게 장학증서를 주었더니 꽃다발을 주는데, 그 꽃다발을 받고 얼마나 눈물이 쏟아졌던지, 꽃에 물을 뿌린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이제 한국에서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떠난다며, 기도를 좀 부탁해 왔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들이 꼭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셨다는 말은 하늘의 복을 우리 인간의 보자기에 부어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자기에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보자기를 열면 하늘에서나 맛볼 수 있는 복이 있습니다. 혹시 그 보자기가 고난이라 이름하는 보자기라 하더라도, 그 고난의 보자기를 열면 거기에는 미래에나 맛볼 수 있는 하늘의 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보자기가 썩어서 새면 하늘의 복이 샙니다. 우리는 보자기를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복을 담는 보자기를 견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보자기를 견고하게 만드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감사입니다. 하늘이 주신 복을 감사라 이름하는 보자기에 싸면 그 복은 결코 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복은 오늘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 됩니다. 그 복은 죽은 뒤에만 맛보는 게 아닙니다. 그 복은 세상이 끝나야만 맛보는 게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작은 공간만 마련되면 그 복이 임합니다. 다만 감사라는 보자기로 잘 싼다면, 그 복은 오늘 일용할 양식이 되고, 오늘 하루를 넘치도록 복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늘 마시는 물은 산에서 흘러내려 옵니다. 땅속에서 솟아올라 옵니다. 신학적으로 풀면, 하나님이 주신 종말의 복은 사다리를 타고 인간의 몸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지금도 우리한테 공급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물이, 장래의 물이, 종말 이후에 맛볼 하늘의 물이 지금 역사 속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우리는 이 물을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 물을 하루하루 마십시오. 아침에도 마십시오. 잠들기 전에도 마십시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깨어 있는" 모습입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하늘 물을 마시고 사는 우리의 일상생활 통째로,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깨어 있는 것이지, 잠을 자지 않는 채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 그것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루를 미래의 복으로 가득 채워줄 테니 오늘 하루를 풍요하고 알차게 살아라." 이렇게 계속되는 하루가 모이면 종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려오신 그대로 사다리를 타고 하늘 나라로 다시 가셨습니다. 내려오신 사다리와 올라가신 사다리는 똑같은 사다리입니다. 이 똑같은 사다리를 통해서, 미래가 현재의 역사를 뚫고 들어와서 현재 가운데에서 미래의 열매를 하나씩 하나씩 맺습니다.

깨어 있어라. 오늘을 알차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라. 그러나 잘못한 것은 회개하고 고치고, 새로운 복을 받아 진실로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라. 역사의 현장에 서서!

우리는 이 사실을 예수를 통해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배웠습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에서 성육신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늘의 보화가 이 땅에 묻혀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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