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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으로서 불신앙의 늪에 빠지지 말라 / 민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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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신앙인으로서 불신앙의 늪에 빠지지 말라
설 교 : 김홍진 목사
본 문 : 민수기 14:1-12


  허브 밀러가 쓴 'Connecting With God'이라는 책 속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나이트 클럽이 개업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큰 걱정에 빠졌습니다. 이제 이 평화로운 마을이 시끄럽게 됐다. 젊은 사림들이 술집에 드나들면서 타락하게 될 것이다. 이런 걱정에 휩싸여 교회에서는 철야 기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철야 기도를 하는 가운데 좀 극성스러운 교인들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클럽을 불태워 주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불태워달라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악으로부터 우리 마을을 건져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는데, 얼마 후, 정말 벼락을 맞고 나이트 클럽이 불타고 말았습니다. 나이트 클럽 주인은 그 사실을 알고, 이 교회를 걸어 고소를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그 불난 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도 때문에 나이트 클럽이 불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고 책임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양쪽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진리입니다. 좀 들어보세요 "어느 쪽이 범죄를 했든지 간에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나이트 클럽의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은 기도의 능력을 믿기는 커녕 아예 부정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나이트 클럽 주인의 믿음이 훨씬 더 훌륭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능력이 있음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불신앙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신앙의 죄를 짓고 있는 모습입니다.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온 자들 중에 열의 여덟은 그 땅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거민은 삼키는 땅이요, 그들의 신장은 장대하고, 대장부들이었으며,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보고하자,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마침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불신앙의 죄를 짓게 됩니다. 이 일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맙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인으로서 불신앙의 죄의 늪에 빠지지 않고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생각해 볼 것은 신앙인으로서 불신앙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불신앙의 늪의 가장 많은 것은 의심입니다. 여러분은 의심을 얼마나 합니까? 겉으로 드러내 놓고 의심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는 모습을 보면 의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1절을 보면 백성들이 정탐군들의 보고를 듣고 밤새 곡을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겠다는 여덟 명의 보고를 듣고 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명은 "가나안 땅은  우리 밥이다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백성들은 두 명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사 가나안 땅까지 인도한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도했고 앞으로도 가나안땅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여덟 명의 부정적인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 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불신앙입니다. 의심하는 것,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불신앙의 가장 흔한 모습입니다.

  우리 집 아이가 저를 보고 아빠라고 부르며 같이 잘 놉니다. 아빠를 정말 아빠로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재미있게 같이 삽니다. 아빠가 혼지검을 내도 내 아빠가 아닌가 절대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하면 곤란하지요?. 그런데 이 아이가 어느 날 책상 위에서 놀고 있습니다. 아빠가 가슴을 활짝 열고 "아빠 가슴 위로 뛰어봐" "싫어요" "괜찮아, 뛰어서 안겨봐", "싫어요" "아빠가 받아줄게 걱정하지 말고 뛰어" "싫어요" "아빠가 의심스러워요. 내가 뛰면 살짝 비켜버리려고 하는 거죠" "아니야, 믿어" "싫어요, 못 믿겠어요" 이것이 의심의 죄입니다. 이것이 마치 신앙인의 불신앙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이 저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환경이 조금 어려워도 약속에 땅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지요. 한 순간의 의심으로 과거의 은혜, 미래의 약속을 다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순간입니다. 의심은 신앙인이 불신앙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의심의 불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원망과 불평입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랬습니다. 의심은 원망을 가져옵니다. 사람을 원망합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도 원망합니다. 다시 2절에 보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그리고 3절에 말하기를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원망합니다. 의심은 원망과 불평으로 발전합니다.

  1900년도에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많은 선교사들이 핍박을 받고 죽어 갔습니다. 중국의 선교사들이 팝박을 당하여 죽임을 당하자, 산 속으로 쫓기며, 이 집 저 집으로 피신하며 고통과 박해를 경험하면서, 지치다 못한 글로버라는 선교사의 부인이 어느 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나는 이제 하나님을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가 당하는 고통의 모든 한계를 지나갔습니다."

  이 불평과 원망의 소리들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정말 계십니까?" 하나님을 부르면서 계시냐?고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불신앙입니다. 그 의심은 불평과 원망으로 발전합니다.

  동굴에 숨어 있던 다른 선교사들과 가족들은 글로버 부인의 이런 불평을 듣자 모두다 얼마나 기운이 떨어졌겠습니까? 그 때 동굴 속에서 같이 있던 게이트라는 선교사님이, 글로버 부인의 불평이 끝나자마자,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핍박 속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기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게이트 선교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선교사들을 핍박하던 행진이 해제되었습니다.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엄연한 역사를 홍해에서 보았고, 마라의 쓴 물에서 하나님을 체험했고, 만나와 메추라기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익히 보아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 환경이 어렵다고 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 능력을 믿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불신앙은 상승작용이 있습니다. 의심은 불평과 원망을 낳고, 원망은 거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의심의 불신앙은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을 거역하기도 합니다. 어떤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다가 결국 하나님을 떠나는 자도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거역하게(9절) 됩니다. 원망의 마지막은 분노(10)로 폭발합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11)를 범합니다. 어떤 자는 결국 하나님을 떠난 자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를 원수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신앙인의 불신앙, 이것은 우리의 함정입니다. 쉽게 빠질 수 있는 늪입니다. 신앙인의 의심, 신앙인의 불평과 원망, 신앙인의 거역은 문맥상 같은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이 불신앙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생각해 볼 것은 신앙인으로서 불신앙의 결과는 어떨까요?

  신앙인의 불신앙은 우리가 잠시 일탈하여 겪을 수 있는 함정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함정에 빠져서 해쳐나오지 못하면 이것은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결국 죽음을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11절 마지막에 "어느 때 까지 나를 믿지 아니하겠느냐" 12절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겠다" 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거역하고, 멸시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치십니다. 사랑의 징계입니다.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그대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그들을 거두십니다.

  그 순간 돌아와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축복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축복을 얻지 못했습니다.

  22절에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절에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7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9절에 징계하기를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 모든 사람들은 32절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광야에서 모조리 죽었습니다. 그 죽은 죄목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불신앙의 죄"입니다. 불신앙의 죄가 비극을 가져옵니다. 불신앙의 죄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생각해볼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불신앙의 늪에 빠지지 않을까요?

  답은 한 가지입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 이것이 의심의 불신앙을 물리치는 비결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그들은 가나안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매우 긍정적인 보고를 하지 않습니까? 물론 가나안 땅의 거민은 강하고 성은 견고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보고에서 여덟 명의 보고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저히 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의심을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 확신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이것이  확신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어떤 목사님이 장로님과 함께 문명을 갔습니다. 병실에 들어가서 잠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이 기도하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합니다. 장로님이 기도하시는데 믿음 있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암병에서 깨끗이 낫게 하여주실 줄 믿습니다. 속히 건강을 회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을 믿습니다." 얼마나 믿음 있는 기도입니까! 그리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문병을 마치고 병원을 나오면서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걸작입니다. "목사님 저 성도님의 병이 매우 중합니다.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 하겠는걸요" 이것이 의심입니다. 의심은 신앙인의 불신앙입니다. 죽어도 하나님의 치유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왜요? 죽음은 가장 완전한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구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으십시오. 기도했다면, 의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십시오. 인내하며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책임지십니다. 믿습니까? (아멘)

  그리고 불평이 오려고 합니까? 원망이 다가오려고 합니까? 감사의 조건을 다시 찾으십시오. 원망과 불평은 의심에서 시작하지만, 해결하는 방법은 감사의 조건을 찾는데 있습니다. 감사할 때 원망과 불평은 사라지게 됩니다.

  중학교 2학년 한 여학생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구두가 조금 떨어져서 엄마에게 구두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인지 구두를 보더니만 더 신어도 되겠다고 하며 사주지 않았습니다. 이 딸은 떨어진 구두를 신기에 창피해 죽겠습니다. 딸은 졸라됐지만 어머니는 사주지 않았습니다. 딸은 화가 나서 엄마에게 불평을 하고 방문을 쾅 닫고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아버지를 데려갔으면 돈이라도 주야지 이게 뭡니까?" 하고 하나님께도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한참 가는데 충격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쪽 다리가 없는 아저씨가 목발을 집고 기우뚱 기우뚱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장애자를 보는 순간 이 딸은 새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떨어진 구두라도 신을 발이 있으니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서 엄마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엄마, 나는 두발이 있는 것만도 하나님께 감사해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새 구두를 사다 놨습니다.

  곰곰히 생각하면 불평은 감사하지 못할 때 생깁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셨던 지금까지의 삶에 감사하십시오. 원망과 불평과 같은 불신앙의 죄는 감사함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여러분, 우리는 늘 신앙인이지만 불신앙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불신앙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불신앙은 이것은 결코 반가운 손님이 아닙니다. 해결해야할 숙제입니다.

  불신앙, 이것은 오직 믿음과 감사함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삶의 어려움이 있어서 의심이 생기거든 확신을 심으십시오. 불평과 원망이 다가오거든 감사를 심으십시오. 거역하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전적인 의탁의 믿음을 심으십시오. 불신앙의 죄는 순간 사라질 것입니다.

<맺는 말>

  불신앙은 신앙이 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의심이것인 확신이 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불평이것은 감사가 있기 때무에 존재합니다. 불신앙을 해결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원망을 해결하는 길은 감사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어느 사회학자가 삶의 영역을 80대 20이라고 하는 말을 썼습니다. 언제나 80은 좋은 일이고, 20은 어려운 일이 함께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80의 좋은 일에 대해 고맙게 생각을 안하고, 20의 어려운 일만 생각하며 신경을 쓰고 잠을 못 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80대 20으로 주실 때가 많습니다. 80을 그저 주시고 20은 꼭 믿음을 동반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20을 우리가 믿지 못할 때 의심이 생기고,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불신앙을 가질 환경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불신앙은 언제나 우리를 위협합니다. 불신앙의 함정은 우리를 겁탈합니다. 의심과 불평과 원망과 거역은 신앙인에게 늘 도전해 올 것입니다. 불신앙의 늪은 우리 옆에 늘 가까이 있습니다.

  왜 신앙이 필요하니까? 왜 믿음이 필요합니까? 불신앙이 우리를 늘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을 물리치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우리의 모든 신앙의 선진들은 불신앙의 환경 속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불신앙의 상황이 있기에 믿음은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오직 빛으로 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불신앙은 오직 믿음으로 만 퇴치할 수 있습니다.

  불신앙을 도전하십시오. 믿음으로 도전하십시오. 감사함으로 요리하십시오. 신앙인으로서 불신앙의 환경이 다가올 때 오직 믿음과 감사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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