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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히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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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예종규목사     
본 문 : 히 13:20-21
제 목 :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13;20-21)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성찬예식을 행할 때에 연례적인 종교행사가 되기 쉽고 의식적이고 율법주의 적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기독교는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내면적이고 실제적인 종교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 속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체험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내면적이고 실제적인 종교체험이 잘못되면 신비주의로 흐르기 쉽고 그것이 심해지면 이단이 됩니다. 그러니까 초자연적인 체험을 한다 고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신비주의자나 이단이 되어서는 안되고 또 내면에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데 외식적으로, 형식적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도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구체적으로는 오늘 우리들이 참여하는 성찬예식이 어떻게 내 내면에서부터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까요?

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이 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을 보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 20-21절이 히브리서의 결론이고 히브리서 저자가 기도하는 간절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이 주기도문은 얼마나 간결하고, 얼마나 간단하고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저자가 기도한 내용은 단 두절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정말 굉장한 기도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5대 교리가 여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선 기독교의

"신관(神觀)"이 나와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관(觀)"이 나와 있습니다.; 양의 큰 목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사관(生死觀)"이 나와 있습니다.; 죽음과 부할,

"속제관(贖罪觀)이 나와 있습니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성결론(聖潔論)"이 나와 있습니다.; 성도의 생활의 성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단 두 절밖에 안돼는 기도문 속에 기도교의 5대 교리가 다 들어 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굉장한 기도문입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기도문에 들어가 봅시다.


기도의 대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아주 주의를 기울려야 됩니다. 개인기도 할 때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공중기도 할 때는 그만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사람들 들으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느냐 안 들어주시느냐 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내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다가 창피 당하면 어떻게 할까, 실수하면 어떻게 할까, 라고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또 기도를 아주 능숙하게 잘하는 분들은 내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게 될까 에만 관심이 솔려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단 공중기도는 온 교인의 형편을 대표해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듣고 내가 바로 기도하려고 한 것을 장로님이 하시는구나! 아멘! 이것이 공중기도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평강(平康)의 하나님이십니다.

20절을 봅시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격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가 모든 마귀의 세력, 죄악의 세력, 사망의 세력, 심지어는 율법으로 인해서 꽁꽁 묶였던 부자유속에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를 완전히 자유케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마음 가운데 평강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처음 믿을 때는 굉장히 감격스러웠습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 오시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러주신 그 공로, 그 사랑을 생각하면 감동이 되고, 감격이 되고,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만 들어도 감격했습니다. 이 처음 감격, 첫 사랑이 신앙생활을 오래도록 지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열심을 내어 주를 섬기는데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갈수록 처음 사랑과 처음 감격은 없어지고 형식적인 것 의식적인 것 외식적인 성도로 자꾸만 변해갑니다. 율법적으로 되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간음하는 여인도 살인강도도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외식적이요 율법주의자들은 용서하시지 않았습니다.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의 평강이 없어집니다. 불만만 생깁니다. 초신자들은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가 보면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대단히 무서운 분이다. 잘못하다가는 벌받아!" "벌써 주일이 됐나!" "주일은 왜 이렇게 빨리 닥쳐와!" "어이구 성가대 안 했으면 좋겠는데!" 모든 것이 다 불평이요 불만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안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벌받을 것 같고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것 같아서 마지못해 교회는 나오는데 두려움으로 신앙 생활을 합니다. 이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냐? 물론그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우리 하나님께서 청지기아래 둔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자유 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이지만 그 어릴 적에는 청지기아래 두어서 종과 같이 보호한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갈4;1-3)

그러나 예수를 10년 믿고, 20년 믿어도 계속 그런 상태에 있으면 문제입니다. 빨리 영이 자라야 합니다. 자라서 평강의 하나님을 믿고 우리 마음가운데 평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은 철이 들어서 예수 믿은 사람에게 해당이 되는 것이지 철들기 전부터 믿은 사람, 모태 적부터 신앙생활한 사람은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나는 예수 믿을 때 큰 감격이 없고 오늘까지 이렇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31세에 하나님의 평강을 체험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예수 믿고 부지런히 교회에만 다녔지 기쁨이 뭔지, 평강이 뭔지,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열심히 주일 지키고 교회에서 봉사했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에서 주일학교 총무로 있을 때입니다. 아! 그 때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마치고 잠깐 시간이 있어서 교회 마당에 나왔는데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온 세상이 다 변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설교 듣다가 받은 것도 아니요. 부흥회 가서 받은 것도 아니요 기도하다가 받은 것도 아닙니다. 주일학교 예배에서 설교하고 예배당마당에 나왔는데 갑자기 그런 은혜가 쏟아져왔습니다. 너무나 좋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저는 항상 이런 은혜 속에서 살게 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너무 기뻐서 찬송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 때 중학교 교편생활을 할 때인데 월급이 너무 적어서 그 월급가지고 식구대로 먹을 쌀값도 안 될 때입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 때 청량리 중앙교회에서 방 하나 마련해 줬습니다. 집도 없이 교회에서 마련 해 주신 방에서 살면서도 은혜가 되고, 감사가 넘치고, 평강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는 사실이 피부로 와서 닿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것이 일정기간 계속되다가 봄 눈 녹듯이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고민이 생겼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기 전에는 은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평강이 무엇인지 모르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감미롭고 그 아름다운 체험을 하고 나서, 그 은혜가 싹 가버리니 심령이 허전합니다. 심령이 갈급하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 체험을 안 해본 사람은 모르는데 그 것을 한번 체험해 본 사람은 그 은혜, 그 평강이 가고 나면 심령이 갈급해서 견딜 수 없게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왜 이런 평강이 살아져버립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가버립니까? 영원히 이런 은혜 속에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여 이런 은혜를 다시 한번 보내어 주시옵소서"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울면서 기도하고, 회개하면서 기도해도 한번 가버린 은혜와 평강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기쁨이, 평강이 돌아왔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해서 지난번에는 내가 이 은혜를 받아서 멋도 모르고 까불다가, 교만하다가, 쏟아버렸는데 이번에는 영원히 내 것으로 간직해야지! 그래서 말도 조심조심하고 행동도 조심조심하고 걸음걸이도 은혜가 쏟아질까 봐 조심조심 걷고, 그런데 일정시간이 지나니까 싹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답답해지고 심령의 갈급함이 더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심령의 갈급함을 없앨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것이 부흥회입니다. 부흥회에 참석을 하면 가버렸던 은혜가 다시 옵니다. 부흥회 참석하면 기쁨이 넘치게 되고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교회에서 부흥회 한다고 하면 성가대가 하로 저녁 예배에 봉사도 합니다. 먼 곳에서 부흥회를 한다 고해도 열심히 참석하고 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흥회가 끝나고 집에 오면 일주일도 못 가서 은혜가 싹 빠져나가고 맙니다. 짜증내고, 미워하고, 분내고, 옛날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하게 됩니다. 또 어디에서 부흥회 하는데 없나? 상당히 먼 곳에서 부흥회를 한다 고 하드라도 거기로 달려가서 참석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부흥회에 대한 면역성이 생기게된다는 것입니다. 부흥회에 계속 다니다가 보면 부흥회에 가서도 은혜를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사이는 본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해도 교인들이 다 참석하지 안습니다. 부흥회에 면역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전 같이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 기도원 운동입니다. 기도원에 가서 세상 걱정 근심 다 잊어버리고 금식하면서 잠도 자지 않고, 주여! 주여! 부르짖으면서 큰 소리로 열광적인 찬송을 부르고 박수를 치면서 일주일을 지나게되면 전에 경험했든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일주일동안은 집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세상일 다 잊어버리고 천국에 온 것 같이 됩니다. 그르나 기도원 집회가 끝난 후 집에 오면 한 달도 못돼서 은혜가 싹 가버리게 됩니다. "내 심령이 갈급해서 견딜 수가 없다. 성경말씀에도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식새끼들 학교 보내고 남편 직장 보내느라고 내 심령이 갈급해서 안되겠다. 에라 모르겠다. 내 심령부터 살려야 된다. 그래서 이 기도원 저 기도원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면역성이 생깁니다. 기도원 부지런히 쫓아다니든 분들 이제는 기도원에 안갑니다. 옛날에는 목사님들도 기도원에 많이 가셨습니다. 저는 일년에 두 세 번씩 기도원에 가는데 요사이 기도원 가면 방이 남아돌아 갑니다. 옛날에는 기도원에 가면 기도원에 방이 모자랄 정도로 목사님들이 많이 기도원에 가셨습니다. 요사이 가면 방이 텅텅 비어 있습니다. 나 혼자서 기도하고 내려옵니다.

목사님들도 기도원에 안 가고 교인들도 안 갑니다. 기도원에 가봤자 은혜가 안됩니다. 면역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은사집회입니다. 보통 기도원은 안 된다 은사집회 참석해야 된다. 은사집회 가서 성령 받으려고 손뼉 치고 북 치고 "주여! 주여!" 소리 질러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다. "성령 받아라!"고 외치면 사람들이 뒤로 나가자빠지고, 방언하고, 입신해서 하늘나라에 갔다오고 지옥에도 갔다 옵니다. 집회장소가 발칵 뒤집어지고, 일어나서 춤추고 뛰고 뒹굴고 자빠져서 입에 거품을 물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됩니다.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고 나면 성령 충만히 받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것도 면역성이 생깁니다. 우리 교회에도 방언 은사 받은 사람 많습니다. 저도 방언 체험했습니다. 그르나 요사이는 방언 안 합니다. 어느 권사님께 물어 봤습니다. "권사님 방언의 은사가 얼마나 좋은 것인데 왜 요사이는 방언 안 하십니까?" "방언을 처음 받았을 때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다 바뀌어진 것 같고 하나님께서는 나만 사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르나 10년 동안 방언하고 20년 동안 방언 해보니 별 것 아니더라"고 말했습니다. 방언은 믿지 않은 자와 무식한 자들을 위해서 표적으로 주신 것인데(고전 14; 22) 잘 믿는 권사님들이 방언을 아무리 해봤자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그런 집회가지고 안되겠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한국 교회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각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벧엘 성경공부도 하고 크로즈웨이 성경공부 코스도 졸업하고 Q. T도 열심히 합니다. 이상하게도 이 성경공부도 면역성이 생깁니다. 이제는 성경공부를 해도 은혜가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고부를 지식적으로 해서 그렇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평강을 받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 성경말씀에 나옵니다. 이 평강의 하나님에게 우리가 기도를 합니다.,

이 평강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게 하시고 언약의 보배 피를 흘려주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끝났다면 사망권세를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망권세를 깨뜨렸습니다 "부활론(復活論)"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 "양의 큰 목자"이 십니다. "그리스도론(論) 입니다. 우리 성도는 양이요 주님은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의 큰 목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4절에 보면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는 양의 목자고 우리 예수님은 목자이면서도 목자장 곧 큰 목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 세상에 심판 주로 강림하실 때 우리 성도들도 양 무리로 심판 받지만 양 무리를 치던 목자도 심판 받습니다. 그래서 "너는 양을 잘 쳤다!" 하시면 시들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런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21일절 입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하사"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는 너무 너무 불완전한데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은 안되겠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나하고는 거리가 먼데!"라고 하지는 안았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선 한일 조금했다고 만족하면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선 한일 조금해놓고 내가 착한 일 좀 했지 이런 것은 안돼는 일입니다. 어떻게 선 한일을 온전케 할 수 있을까요? 기도하면 온전케 됩니까?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라고 하셨지만 기도한다고 해서 온전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고 묵상하면 온전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에 와서 많은 봉사를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그것으로도 안됩니다. 온전케 되는 방법은 딱 한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代替)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은 시험입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시험을 거치지 않고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올림픽대회에 나가는 선수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잘 알아도 아무리 코치의 말을 잘 들어도 실제로 나가서 트레이닝(training)이 없고 지옥훈련이 없으면 유명한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되는 것도 여러 가지 시험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왜요? 우리를 연단시키고 훈련시켜서 완전하게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씀만 알아도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속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어이구 이제는 죽었다!" 조금 좋은 일만 당하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 가지고는 안돼는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오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키시고 나를 훈련시켜서 온전하게 만들려고 이런 연단을 주시는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되면 벌써 하나님의 평강이 영원토록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모함하고 못되게 굴고 괴롭힐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면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통해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연단시키는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부족해서 이런 사람을 통해서 나를 연단시키는 것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쁘게 여기면 하나님의 평강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케 만드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핵심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입니다. 물론 초신자들, 또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 저 먹을 것이 없습니다. 먹을 것 좀 주시옵소서, 입을 것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도 하라고 했습니다. 집이 없으면 집 달라고 기도하는 것 다 좋으십니다. 다만은 완전한 하나님의 평강을 맛보려고 하면 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즐거운 것, 은혜 받아서 평강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감격이 넘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다른 방법으로 마음에 기쁨이 이루어지고 신(神) 들리고 하는 것은 신비주의입니다. 반듯이 이 즐거움, 한없는 기쁨과 감격과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겉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기도입니다.


율법주의는 겉으로 내가 율법을 행하므로 말미암아 내 내면적인 변화가 오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너무 기뻐서 기도하고, 부르짖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속에서부터 나와야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속은 가만히 있는데 손뼉 치고 부르짖고 야단법석을 떨어서 오는 것은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 일단 시험해 봐야 합니다. 기독교는 내 안에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내 속에서부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내 속에서부터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내 속에서부터 평안이 나타나야 합니다. 내 속에서부터 온유가 나타나야 합니다. 내 속에서부터 절제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을 속에서부터 나타나지 않고 내 인간적인 의지로 밖에서부터 이루려고 하면 이것은 조석변(朝夕變)입니다.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오 하나님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 내가 사랑해야지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입안에 든 것도 내 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화가 나면 잡아먹을 것처럼 덤벼듭니다. 이 사람이 조금 전에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더니 얼마 안돼서 나를 이렇게 미워하니 종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지!" 그러다가 어느 날 "나 충성 안 해!" 이게 도대체 충성인지? 뭔지? 작심 3일도 못 갑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로 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연구하다가 보니까 조심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은 기독교는 "오직 믿음"입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안됩니다. 오직 믿음은 내가 구원받는데 만 "오직 믿음"입니다. 구원받는데는 다른 아무 조건도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죽도록 충성해야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의지로 죽도록 충성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우리 의지 가지고 충성하면 작심3일이요 그리고 조석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상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 종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사람들을 가장 미워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지독한 싸움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은혜가 넘치는 것 같으면서도 외식적이고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는 미워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체험과 모든 역동적인 신앙생활은 속에서부터 일어나야 됩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기를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착한 일 시작 해 봤자 작심3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신다면 끝까지 하시는 분이십니다. 언제 까지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오실 종말 그때까지 우리를 통해서 착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는 필요없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여기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robot)으로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어서 행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우리 속에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서로 거스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두면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소원 즉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에게 저서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육체의 일 16가지가 나타납니다.(갈5;19-21) 그러나 갈라디아 5장 16절에 "내가 이르노니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쫓아 행하게 되면 육체의 소욕은 이루지 아니하고 성령의 9가지 열매만 맺혀지는데 이것을 금할 법이 없습니다.(갈5;22-23) 우리 인간의 의지로 사랑하려고 하면 아침에 사랑한다고 해놓고 저녁에 분을 냅니다.

사랑이 성령의 열매로 맺히게 되면 그 누구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원수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가 무엇입니까? 희락입니다. 즐거움입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다가 희락이라는 열매가 맺히면 이는 영원한 즐거움이 됩니다. 이것이 "그 앞에 즐거운 것이 예수 그라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의 뜻입니다.

그러나 내 의지로, 내 노력으로 은혜 받아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면, 기도원에 가서 은혜 받았다 해도 얼마 안 가서 그 은혜 그 기쁨은 빠져나가고 맙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받았다고 해도 다 빠져나가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고 해도 지식적으로 연구하면 잠시 은혜가 되는 것 같은데 이 경우도 빠져나가고 맙니다. 그러나 내 속에 와서 거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가르침을 쫓아서 성령의 소욕대로 행하게 되면 육체의 욕심은 이루지 아니하고 성령의 9가지 열매만 맺혀지는 것입니다. 열매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이것을 체험하고, 모든 것이 즐겁고, 모든 것이 감사하고, 모든 것이 감격스럽고, 하나님은 나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 같은 느낌 마저 들기까지 합니다. 저는 이 것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 나만 이것을 체험해서 되겠습니까? 우리 교인들도 다 이 놀라운 은혜가운데서 생활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을 체험하는 분은 몇 사람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많이 받아서 늘 즐거워하지만 나야 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어야지", "나도 우리 목사님만큼 복 받으면 그렇게 즐겁게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대속 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만 생각해도 이 기쁨은 말로도 다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결코 받은 은혜가 적어서 즐거움과 감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노라!" 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명하신 세례예식을 행합니다. 그저 떡 하나 받아먹고, 잔 한잔 받아 마시고, 성찬식 참석했다는 것은 아무 뜻이 없습니다. 이 떡을 받아먹을 때 우리 주님의 몸이 내 안에서 역사 해야 됩니다. 주님의 아픔과 고통이 느껴져야 합니다. 이 잔을 받아 마실 때 우리 주님의 보혈의 피가 내 혈관 안에서 역사 해야 됩니다. 오늘 이 성찬예식이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이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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