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활의 보람 / 고전 9:22-27

  • 잡초 잡초
  • 392
  • 0

첨부 1



제 목 : 생활의 보람
본 문 : 고전 9: 22-27
설 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고린도전서 9장 22절에서 27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생활의 보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보람 있는 생활'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반드시 보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에게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사는 문제 즉 생존이 중요합니다. 죽는 것 보다 사는 것이 더 귀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있다는 생존의 문제가 중요하지만 생활이 있느냐? 없느냐? 가 더욱 중요합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생활이 없다고 한다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듣고 연세 많으신 분들은 '우리는 나이가 많아 할 일이 없으니 빨리 죽으라는 말인가?'라고 이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하는 일없이 놀고 먹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신앙 생활 중에서도 기도 생활은 나이가 많아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 전도하는 전도 생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생활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에도 얼마나 보람이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어떤 생활이 보람이 있는 생활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나눔의 생활 (22-23)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여자가 피를 쏟는 병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병에 걸리면 부정을 탄다 하여 남편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가정 생활은 못하게 됩니다. 부부간의 행복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 여인은 그런 불행스러운 병에 걸렸습니다. 그 당시로는 병원에서도 고칠 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낫는 것은 고사하고 점점 증세가 더 심해졌습니다. 즉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12년 동안 치료하느라 그 많던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건강을 잃어버리고, 가정의 단란한 행복도 잃어버렸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붙잡을 것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건강할 때에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의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이 제법 많을 때에는 돈이 더 믿음직스러웠지 예수님이 믿음직스럽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예수님에 대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오면서 '예수님은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병을 고치기도 하신 다는데'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예수님께 안수 기도를 받는다면 더 이상 말 할 것도 없고,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으리라고 믿고 나왔더니 믿는 대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는 대로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진 뒤 자기에게서 혈루 근원이 말라서 병이 깨끗이 나았다 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도 모릅니다. 받은 자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찾아 간증을 시키고 싶으셨으나 여인이 나타나지를 않고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주 앙큼한 여자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라고 하시면서 그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그런 경우에 모르면 잠자코 있는 것이 좋습니다. 제자들이 무엇을 안다고 나섭니까? 제자들이 "주님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데 주님의 옷을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스쳐 지나갑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스쳐 지나간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모르면 잠자코 있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어이 그 여인을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즉 간증을 했습니다. 전에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왔고 은혜를 받아 이렇게 나음을 얻었노라고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 사람의 문제가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함을 받았다면 나도 해결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간증함으로 은혜를 나누어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나눔의 생활 즉 은혜를 나눈다는 것이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이 시간을 빌어서 말씀드리지만 구역장 권찰님들 좀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역 예배 드릴 때 먹고 놀아 주지 말아 달라는 것을 그렇게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구역 예배를 드리고 음식점으로 돌아다니십니까? 왜 그렇게 차려 먹느라고 야단이십니까? 먹고 놀아 준다고 믿음에 도움이 됩니까? 그것이 좋은 것 같지만 절대로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돈이 좀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서 자기 기분을 냈다고 좋아할는지 모르나 다음 사람이 시험을 받습니다. 즉 그 다음 사람이 자기 집에서 구역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돈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은 시험에 들어도 괜찮습니까? 그런 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한다면 아무리 부자라도 라면 이상 끓여 먹는 일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무리 가난해도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부담되지 않게 하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역 예배가 끝나면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성경 읽는 중에 이렇게 은혜 받았다' 또는 '기도하고 나는 문제를 해결했다'라는 간증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파트 값 오르는 소리만 하다 보니 오히려 집 없는 교인이 구역 예배에 참여하고 시험에 들지 않습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은혜를 나누지 못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말입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의 간증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습니까? 이것이 나눔의 생활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2절에서 23절을 보면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는 자유인이지만 종된 사람에게는 종된 사람처럼 살면서 복음을 전했더니 복음을 잘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처럼 하여 복음을 전했더니 복음을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 없는 이방인처럼 되어 복음을 전하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처럼 되어 복음을 전한 결과 믿고 구원을 얻더라는 겁니다. 즉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여러 모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었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참여하다'라고 하는 헬라어의 뜻이 '공유하다' '나누어 가지다'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나만 가지고 있는 복음을 너에게 전해 주었더니 이 복음이 너의 것도 되고 나의 것도 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누어 가지어 공유하다' 즉 '복음을 전하다'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내 복음이 없어집니까? 은혜를 나눈다고 해서 내 은혜가 줄어듭니까? 오히려 풍성해지지 않습니까? 심지어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재물로 도와준다 라고 할 때 손해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성경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구제하는 돈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돈을 떼어먹으십니까? 구제를 하고 내 주머니 끈을 풀어 나누어준다고 하여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 채워 주셔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나누어주고 복음을 나누어 줄 때 그 사람도 은혜 받고 그 사람도 복음에 참여하고 같이 구원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동시에 보람 있는 삶이 아닙니까?

  임진왜란 당시 경남 진주지방을 흐르고 있는 남강 가에 조그만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왜군이 이 마을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어린 소녀의 가정이 살았는데 그 소녀의 아버지는 그 난리 중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피난을 다니다가 어머니는 왜병한테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린아이가 혼자 되었습니다. 동네 할아버지가 그것을 보고 데려다가 같이 지내는 중에 할아버지와 함께 일본군에게 붙잡혀서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조선 사람이 오만명 정도가 됩니다.

  못된 일본 병사 하나가 어느 포로를 끌어다가 팔아서 돈을 받아 술을 먹을까 하여 살피다가 그 소녀를 뒤로 빼돌렸습니다. 사창가에 가서 팔려고 하였으나 어리다고 사지를 않았습니다. 사창가마다 돌아다녀도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쓸데없는 일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시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에 데려다 놓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소녀의 이름이 수란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풍신수길의 휘하에 있는 소서행장 이라는 장수가 참전을 하였습니다. 그 때 소서행장 즉 고니시라고 하는 장수는 천주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인 고니시의 딸 고니시 마리아가 역시 이미 천주교인이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이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사정을 알고는 자기 집에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소녀가 예수를 영접하고 몇 해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고니시와 도꾸가와가 싸움이 붙어서 고니시가 패하고 도꾸가와가 일본의 패권을 잡았습니다. 그 때에 그 가족은 몰살을 당하고 이제는 아가씨가 된 수란을 도꾸가와가 자기 집에 데려다가 온갖 시중을 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이미 예수를 만났는지라 시중 들 것만 들고 신앙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시중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너무 화가 나는지라 일본의 동쪽 바다 즉 태평양에 있는 가미쓰시마에 정배를 보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는 섬이 있는 줄만 알았지 보이지도 않는 멀리 떨어진 섬입니다.

  이 아가씨가 정배를 가보니 예수의 '예'자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아가씨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섬에 보낸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로구나'라고 생각하여 온갖 봉사를 다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가씨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그 섬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모든 섬사람들이 너무 아쉬워서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 아가씨가 섬에 갈 때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지만 이 아가씨가 죽을 때에는 안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아가씨가 세례를 받고 세례명으로 받은 것이 쥬리아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적인 이야기로 소설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나만 가지고 있는 복음을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해 주어 같이 나누어 가지는 나눔의 생활이 얼마나 복된 생활입니까? 내가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나누고 내 주머니에 가진 것이 있으면 가진 것을 나누는 나눔의 생활이 그렇게 보람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최선의 생활 (24-)

  전력투구라는 말을 아십니까? 야구를 구경하는 사람은 많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2대 1로 이기고 있습니다. 지금 투수가 공을 던집니다. 그런데 스코아는 2대 1이지만 볼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입니다. 볼 하나만 남았습니다. 지금 진루한 선수는 말루입니다. 한 방만 얻어맞으면 스코아링 포지션이라고 하여 2루에 있는 사람까지 들어와서 역전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번 잘 던지면 스트락 아웃이 되어서 이기게 됩니다. 모든 것이 공 하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공을 던지는 피쳐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있는 힘을 다합니다. 젖먹을 때 힘까지 다합니다. 정신력을 온전히 집중하여 공을 던집니다.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할 때 승리가 있고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승리하고 성공하는 사람이 놀고 먹다가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우리의 믿음 생활도 그러합니다. 믿음 생활이 놀고 먹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도 최선을 다할 때 보람 있고 승리하는 신앙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4절을 보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과 같이 달음질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운동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타디움'입니다. 스타디움이라고 하는 것은 운동장에 사면으로 둘러 계단을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모두 편히 앉아 구경하도록 만든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꽉 차서 구경을 하면 운동장 한 가운데 나와서 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달리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입니까? 하나같이 선수로 뽑혀 나온 사람들입니다. 뽑혀 나오기까지 그 사람들이 얼마나 애쓰고 애를 써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합니까? 그리고 달릴 때에 한 바퀴 뛰었다고 해서 누구나 상을 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은 일등은 하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얻도록 달음질하라'는 말씀은 우리 믿음 생활도 꼴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뒤쳐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장서서 달리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람이 있고 승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즉 최선을 다하는 믿음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태리에 큰 부자가 집을 크게 짓고 정원도 크게 만들고 정원사를 채용했습니다. 정원에는 보기 좋은 관상수도 심어 놓고 갖가지 꽃나무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화분에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관상수들을 키워 진열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주인이 돌아보는 중에 이 정원사가 놀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무로 만든 화분에는 열심히 조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조각이 얼마나 예쁜지 꽃보다 더 아름답다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옹기로 만든 화분에는 페인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는지 오히려 꽃보다 더 아름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정원사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네 이렇게 한다고 내가 돈을 더 주는 것이 아닌데 왜 이러고 있지?" "내가 일을 다 하고 지금 쉬는 시간이지만 놀고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내 재간 껏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주인이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이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원사로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라 여겨 뒤를 밀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이 사람이 중세 기독교 미술로 유명한 미켈란젤로라는 사람입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은 놀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까? 하루아침에 된 것입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일 또는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쌓고 쌓아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도 놀고 먹겠다는 식이어서는 안됩니다. 최선을 다하는 곳에 발전이 있고 보람이 있고 승리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극기의 생활 (25-27)

  이 말을 쉽게 말씀드리면 내가 나 자신과 더불어 싸워 이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5절에서 27절을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운동장에 나와서 달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선수로 뽑히기까지 얼마나 자기 자신을 절제합니까? 선수는 먹을 것 못 먹을 것을 막 먹어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선수로 뽑혀서 달려가 일등하기까지 할 짓 못 할 짓 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일을 잘 가려서 해야 되는 일만 하고, 먹어야 되는 음식만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욕을 자제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를 쳐서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 즉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전부 채우면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성도는 절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성도는 세속적인 욕망과 싸워 승리하는 자만이 믿음 생활에서 상을 얻고 승자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와의 쑤움에서 패하면 믿음도 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에 스테피 그라프라는 유명한 테니스 선수가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여자가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서 세계적인 대회를 몇 해 동안 휩쓸지 않았습니까? 일년에 세 번 네 번 세계적인 대회가 있으면 다 휩쓸었습니다. 계속해서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워서 기자가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테니스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응원을 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봐 주든지 안 봐 주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입니까?"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선수가 게임을 할 때는 게임에 몰두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은 한번 게임을 하기 위해서 몇 날을 연습하고 몇 달을 연습하는지 아십니까? 수백번씩 연습을 거듭합니다. 연습할 때 볼이 넘어 오면 너무 너무 지겹지 않습니까? 너무 너무 힘이 듭니다. 쉬고 싶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한 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를 쳐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먼저 승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 생활에서 싸워서 승리하려면 나와의 싸움, 육신의 정욕과의 싸움, 죄성과의 싸움에서 싸워 승리하는 즉 절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극기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니다. 보람 있는 생활은 첫째 나눔의 생활입니다. 복음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나눈다고 해서 결단코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요해지는 복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최선의 생활입니다. 내가 있는 힘을 다해야 합니다. 달리기 선수가 숨이 턱에 닿듯이 최선을 다해 달리는 것처럼 믿음 생활도 최선을 다할 때 승리가 있다는 사실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극기의 생활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절제할 줄도 알아야 되고 더 나아가서 나 자신과 싸워 이겨야만 신앙 생활에서 승리와 성공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