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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가림으로 하지말고 / 엡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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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눈가림으로 하지말고
본 문 : 엡 6:5-8
설 교 : 윤일문 목사 (사도교회)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 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 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세상에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뛰어넘는 어려운 일들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군대를 3년 늦게 갔습니다.
동생 친구들 사이에서 군 생활하느라고 남달리 서러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특히 맺집이 좋다고 엄청나게 많이 맞았습니다.

한 내부만에 28명 가운데 저보다 1년 먼저 들어온 동기들이 무려 14명이나 되었는데 그 고참들로부터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격적인 모독과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드디어 그들이 제대하는 날이 왔습니다.
그 날 모든 매맞은 빚을 곱으로 갚아 주리라고 벼르고 아침 일찍이 정문 옆 위병소에 화장실에서 대변을 한 통 퍼 가지고 큰 몽둥이를 들고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극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피하게 하셨다고 생각되는데 그 전날 밤 중대장이 눈치를 채고 그들을 밤에 연대로 이동시켜서 그곳에서 신고하고 나가게 했습니다.

며칠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만큼 분했지만 한참이 지나고 저도 제대해서 그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고 그들도 그 때의 잘못을 편안하게 사과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때 참지 못하고 앙갚음을 했더라면 아마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보통 남자들이 군대생활을 하면서 이처럼 극한 한계 상황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한계 상황을 경험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직장입니다.

저도 10년을 직장 생활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끔직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 회사 전무는 사장 아들로 그때 나이가 4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사장은 사장과 비슷한 연배로 아버지 뻘 되는 사람이었는데 우연히 중역실 앞을 지나다가 너무도 끔찍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사장 아들인 그 전무가 학교 다닐 때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용돈도 타 쓰고 하던 그 부사장은 아버지와 친구 관계 비슷한 데 그 부사장을 부동 자세로 세워놓고 온갖 인격모독이 다 담긴 이야기를 퍼붓다가 끝내는 서류 뭉치를 얼굴에 던지며 그런 식으로 일하려면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사장은 연신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아들 뻘 되는 전무에게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얼어
붙어 있는 저에게 그 부사장님은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란다 하면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결재 서류에 사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양반 상놈이 있던 시절의 모습과 별로 나를 바 없다는 느낌이 들었었고 벌써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기억이 새로울 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그들이 어떤 태도로 노예 생활을 해야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노예에게는 윤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예는 말만 사람이지 말이나 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노예에게 인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물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처지와 마찬가지입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는 인격이 없고 다만 죄수 번호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됩니다.
따라서 노예는 마치 창살이 없는 감옥에 갇힌 죄수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노예로 있는 크리스쳔들에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 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여기서 "종"이란 단어는 단지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분상으로 전혀 자유가 없는 노예를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육체의 상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울 당시 종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 로마 국민의 대다수는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성경주석자 바클레이의 조사에 따르면 그 당시 종의 숫자는 6천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막노동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부리는 가정부나 일꾼도 노예였고 노동자도 물론 노예였으며 재미있는 것은 의사도 노예였습니다.

요즈음은 의사가 아주 존경받는 직업이지만 그 당시에는 의사도 노예였습니다.
또한 지금과는 달리 교사나 교수도 당시에는 노예 계급이었고 행정가도 노예였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일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제기하거나 반항할 수도 없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도텔레스의 책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국가론이 대표적인 책입니다.
그 책에 따르면 노예는 살아있는 기구일 뿐입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면 생명 없는 로봇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에게는 인격이나 인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노예는 동물과 똑같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때려도 괜찮고 감금하거나 화형을 시켜도 양심에 전혀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시대를 막론하고 죄인인 인간들이 존재하는 곳에는 이 노예 개념이 형태만 다를 뿐이지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노예를 부리고 싶은 죄성이 인간성 속에 계속 내포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실 이러한 것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전 7: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 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으면 예수 믿고 나서 그 종된 위치로부터 탈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종으로 있으라고 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는 말씀의 각주에 보면 "자유할 수 있어도 차라리 종으로 지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전 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 도의 종이니라

우리 모두는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종이냐 자유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수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당장 내 삶의 자리에 어떤 자리에 어떤 형편이 처해있는가 하는 것이 먼저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만 있는 대로 지금 있는 환경보다는 더 나은 환경을 얻기 어떤 경우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편법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혁명적인 방법으로 봉기를 일으켜서 한꺼번에 높은 지위로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가 신분 자체의 변화나 혁명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신분이나 제도를 바꾸려는 혁명 집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서는 섬김의 개념은 있어도 투쟁의 개념은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개념은 존재해도 비판과 고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즘 사회학적인 훈련과 세상적 사고에 물든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고발하고 비판하는 정신들이 만연해져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를 혁명 세력으로 바꾸려는 무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선언문을 만들고 데모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선언문을 만들고 데모를 해서 역사가 바꾸어진 일도 없으며 그런 방법으로 기독교가 행동을 한 역사가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행동을 하는 일부의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다는 사실 때문에 데모를 하거나 사회운동을 일으키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도우려하면 그냥 도우면 됩니다.
그들을 자극해서 기득권 층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공산주의 사고 방식이지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과 섬김과 용서와 인내와 관용뿐입니다.
어떤 고발도 어떤 비판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줄 믿고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의 방법을 성경은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제자가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칼로 베었습니다.

마 26:51-53절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 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기독교의 방법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랑과 용서와 관용과 기다림과 기도여야 합니다.
이 방법을 통해서 선을 이루어 가라고 예수님은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 역사의 패턴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두 세력간의 싸움은 기독교 안에 언제나 존재합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지배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정 부패에 대해서 데모하고 고발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면 현실적으로 행동에 참여하고 조용히 그들을 감동시켜야 할 일이지 남을 선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십자가와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분노와 집단적 폭력을 더 믿는 것입니다.
노조 운동, 민권 운동, 학생 운동은 어느 정도 있어야 하며 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 안에서 교회 운동으로 교회의 사역으로 대치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현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끊임없이 기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조용히 구제하고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자기 직업을 다 버리고 그 속에 뛰어 들어가는 용기가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이러한 일을 하나님의 세력으로 바꾸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 당시의 노예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종들에게 한 권면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바울은 종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제안합니다.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 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종은 그들의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바울은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현실인 것처럼 그들이 노예이며 그들의 상전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속으로 업신여기면서도 겉으로 마지못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면 그 사람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빌5:21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끊임없이 높아지고 최고가 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듣기 거북한 말이 "복종하라""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도 최고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실을 주장하느냐?"는 것보다 "어떤 영에 지배를 받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철저하게 순종하게 하는 순종의 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도와주시는 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믿음은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순종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순종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될 때 자기 위에 군림하는 사람의 부족함도 문제가 되겠지만 우선 자기 안에 있는 무서운 죄성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눌러 의도적으로 자신을 쳐 다른 사람에게 복종시킵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자기 안에 있는 성령께서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시며 그를 사용하셔서 주인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은 "그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부하로 두고 있느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교만한 본성을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 자발적으로 쳐 복종시킬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성령이 매우 기뻐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가장 활발하게 역사하셔서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놀라운 봉사나 섬김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 자신을 주장해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의 교만한 본성을 보고 그것을 쳐 복종시킴으로 내 안에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경우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하면 성령이 충만해진다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자기 교만과 자기 고집을 죽이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 둘 때 내 안에 있는 성령께서 기뻐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 사람이 덜 성숙할 때에는 사사건건 위에 있는 사람과 부딪치는 것을 똑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좀더 깨닫고 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자신을 복종시킬 수 있는 사람을 자진해서 찾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 아래 매어둘 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가장 기뻐하시며 내가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에게 순종할 때 따르는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1. 존중하라

주인을 존중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내가 남편을 존경해야 하는 원리와 똑같습니다.
순종에는 존경심이 따라야 합니다.
경멸하는 대상에게는 절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하는 비결은 존경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벧전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 하라

인격적인 주인에게는 누구든지 순종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면, 못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잘못을 용납하라는 뜻이 아니라 순종과 존경의 태도를 통해서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2.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주인에게 순종할 때에는 두려움을 가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포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즉 경외한다는 것은 공포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인정하는 것처럼 주인에게 순종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3.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시 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 을 삼을지어다

성실하게 한다는 뜻은 주인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상관하지 않고 충실하게 자기가 맡은 일을 감당한다는 뜻입니다.

4.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합니다.

자신들을 노예라는 개념으로 보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종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께 하듯이 해야 합니다.

아내가 요리할 때는 그리스도께 하듯 요리해야 합니다.
청소할 때도 그렇습니다.
손님을 대접할 때도 그렇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 병원에서 아주 흐뭇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병원의 간호 부장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목사님에게 어떤 예수 믿는 의사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랍니다.

그 의사는 4년 동안 그 병원에 있다가 떠났는데 그 의사는 응급환자가 왔다고 하면 자기 담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쁘거나 한밤중이거나 상관없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환자의 뒷바라지를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 의사가 병원을 떠난 뒤에도 그에 대한 칭찬이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의사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 전해졌겠습니까?

그 의사를 칭찬하는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의사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직급도 높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그 의사가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를 참 존경합니다.
그 사람한테 제가 성경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 의사는 자기의 임무 한계를 뛰어넘어서 그저 도울 수 있는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밤이고 낮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남을 도와 주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맡은 그 자리에서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직장에서든지 어디서든지 이러한 원리대로 따르고 있으면 제도를 바꾸지 않아도 이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헌법을 바꾸거나 제도를 바꾼다고 그 세계가 새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노예 신분이든 어떤 신분이든 이런 종의 자세를 가지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엡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노예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노예는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서 주인이 알아주거나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므로 건성으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의욕적으로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일이 돌아올 뿐이므로 매사에 의욕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눈가림으로 일을 하지말고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듯이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이 눈가림으로 일을 하게 되면 진짜 노예가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신분상으로는 노예라 하더라도 진짜 노예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일을 할 때에도 눈가림만 하고 성실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락없는 노예입니다.
설령 신분은 노예일지라도 마음은 결코 비굴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일하는 자세가 무책임하여 매사가 될 대로 되라는 식이라면 그의 마음은 참으로 비참해질 것입니다.

그는 일을 하면서 마음이 점점 무디어지고 부패하여 돼 나중에는 전혀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신분이나 직책이 무엇이든지 얼마의 보수를 받든지 간에 자기에게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자기가 주인이라 생각하고 그 일을 통해 자신을 갈고 닦는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노예 근성에 젖은 사람은 그 영이 이미 노예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책임을 질 줄 모르며 사람이 보면 일을 하는 척 하다가 사람이 없으며 게으름을 부립니다.
이 사람은 영원히 노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신분은 비록 노예일지라도 그 정신이 살아 있다면 그는 노예의 처지에서 놓일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노예 상태에서 풀려날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또 그런 기회가 주어질 때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이 노예인 사람은 늘 다른 사람들만 원망하지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려내지 못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신분이나 보수 이전에 일을 하는 자세입니다.

자기에게 어떤 일이 주어진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그 일에 따른 열매는 자동으로 주어지게 돼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눈가림으로 하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과를 한 박스 사보면 이따금씩 맨 위에 있는 사과와 그 밑에 있는 것의 크기가 다르거나 심하면 상한 것이 들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 물건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벌었다 하더라도 결국 노예로 살수밖에 없습니다.

또 직장에서 하루 내내 적당하게 일을 하다가 퇴근 시간만 되면 바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무시간 내내 윗사람 눈치만 살피며 지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자신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일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건물을 지을 때도 번지르르하게 짓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얼마나 보수 공사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도로 공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붕괴됩니다.

눈가림으로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옷을 짓는 일, 책을 만드는 일, 다른 많은 일들에서도 우리는 눈가림으로 하는 것들을 많이 봅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이런 것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 정신이 봉사하고 섬기는 정신이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문화로 형성되었을 때 이러한 일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욕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종이 주인에게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정성을 들여서 하라는 뜻입니다.

의무나 책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일을 시키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제일 불편한 것은 찡그리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강한 책임감으로 열심히 하지만 딱딱한 얼굴로 일을 하면 주위 사람이 얼마나 불편한지 모르겠습니다.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 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아가는 사회가 이런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을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설득해서 함께 바른 길로 가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대가나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이전에 성실한 모습을 먼저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냥 성실한 모습이 아닌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성실한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보시며 평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충실한 만큼 갚아주십니다.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주시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도 보상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잠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 으리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가장 고귀한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분만을 따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그 예수님이 어디로 가셨습니까?

빌 2:5-11절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 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 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마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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