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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소금, 빛 Ⅱ / 엡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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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전준식 목사 
본 문 : 에베소서 6장 9절
제 목 : 세상의 소금, 빛 Ⅱ


예전에는 직장상사가 먼저 퇴근해야 부하 직원들이 퇴근을 했습니다. 부하 직원들은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퇴근을 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 졌습니다. 이제는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들의 눈치를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리더십이 제대로 세워 진 바람직한 현상이요 앞으로 사회가 성숙하면 더욱 더 이렇게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리더십은 명령이 아니라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는 지시하고 끝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도자는 지시한 후 반드시 점검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부하 직원보다 늦게 회사 문을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는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먼저 퇴근하고 늦게 출근하는 것이 멋져 보는 것입니까? 내가 그만큼 부하 직원이었을 때 법정시간 이상 희생하며 시간과 정열을 투자했다는 생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그렇게 희생해서 높은 위치에 올라 왔으니 그 만큼 뽑아야 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성실했던 사람이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소명과 헌신의 직업관을 가진 것이 아니라 투자하는 마음으로 직장 생황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공자가 말한 인생 40의 나이에 불혹이란 말이 선견지명이 있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 인생 40이 되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사회적 위치에 있는 나이입니다. 40이 되면 많은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앞만 내다보고 살던 30대의 삶에서 이제는 시간적인 여유가 생깁니다. 물질적인 여유도 생깁니다. 이 때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이 세상이 깔아 놓은 많은 유혹의 덫에 걸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많은 40대 사람들이 40은 불혹의 나이가 아니라 가장 유혹이 많은 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40대에 많은 사람이 그 동안 쌓아 왔던 것들이 한 번의 실수로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적용 해 보면 비록 이 세상에 유혹 받을 일이 많이 있지만 결코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9절
얼핏 보기에는 성경에 상전에 대한 이야기가 1절 밖에 기록되지 않아서 상전에게 하시는 말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노예들보다 상전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상전들은 너희도 노예들에게 노예들이 너희에게 하듯이 하라고 권면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 더 첨가합니다. 그것은 공갈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할 일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습니다. 지도자는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지도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도자가 되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지도자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교회에서도 지도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여러분! 지도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편한 자리에 앉아서 대접받고 싶은 마음으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마음을 버리십시오. 지도자는 한번 더 생각하고 한번 더 움직여야합니다. 지도자는 종들이 성실하게 하는 지도자를 섬겨 주는 것처럼 자기도 섬겨야 합니다. 성실하게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처럼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성실하게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지도자가 되기 전과 지도자가 된 후와 교회 섬김의 생활이 전혀 다른 사람을 볼 때 저의 지도력에 한계를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공식 석상에 가든지 우리 교회 장로님들을 자랑합니다. 우리 교회는 목사와 장로님들 좌석이 따로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교회 자랑거리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자랑거리는 장로님들께서 예배 시간에 안내를 하신다 는 것입니다. 보조의자가 필요하면 보조의자를 들어서 앉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면 발빠르게 보조의자를 치워 주십니다. 이런 모습은 어느 교회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장로가 되면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자기 자리를 만들어 놓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리더쉽이 제대로 세워진 교회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 보다 하나 더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도자가 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일이요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좀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와 같이 라는 말입니다. 상전들아 종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너희도 종들을 두려워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노예들이 뭉쳐서 자기를 제거할 까봐 두려워하라는 말입니까? 노동조합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까? 국민들이 혁명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힘으로 종들을 억압하고 굴종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힘으로 사람을 누르는 철학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서는 먹혀 들어가는 힘은 공부가 아니라 주먹입니다. 주먹이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주먹의 힘을 가지고 있는 아이 앞에서 아무소리 못하고 학교 생활을 합니다. 심지어 주먹의 힘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우상처럼 바라봅니다. 그러나 대학만 들어가면 주먹은 절대로 힘이 될 수가 없습니다. 대학의 힘은 연구입니다. 공부입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주먹으로 자신의 파워를 보이겠다고 하면 그것은 유치한 짓입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주먹도 아니고 공부도 아닙니다. 사회에 나오면 사회가 요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이요 사회적인 위치입니다. 내가 얼마만큼의 돈이 있느냐가 그 사람의 힘을 보여 줍니다. 내가 회사에서 내 책상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힘이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바울은 이런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앉아 있는 위치를 인정합니다. 내가 가진 돈의 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남을 누르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다른 사람을 누른다면 그것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늘 하늘의 뜻을 물었습니다. 하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사람들을 섬겨 주셨습니다. 여러분! 돈이 많이 있습니까? 하늘의 뜻에 맞게 사용하십시오. 돈 없는 일가친척을 도와 드리십시오. 권력이 있습니까? 내가 가진 힘으로 힘없는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하십시오.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첨가합니다. 그것은 공갈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상관들은 아랫사람에게 공갈을 한다고 보십니까?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이상한 것을 하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상전들아 종들을 때리지 말아라 라고 말하지 않는 게 이상했습니다. 때리는 것 말고 공갈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바울은 때리는 것을 말하지 않고 공갈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때리는 것 보다 공갈이 더 무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때리는 사람보다 더 인격적인 모독을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본다든지 눈치를 주는 것입니다. 때리는 것은 많은 노예들로 하여금 반발심을 가져 올 수 있지만 공갈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이기 때문에 집단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잇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힘있는 자는 때리지 않고 공갈로 협박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종관계로 사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을 동역의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물건으로 볼 때 힘있는 사람은 협박을 해서라도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정치역사는 이와 같은 공갈의 역사였습니다. 겁주는 역사였습니다. 자기 정권에게 불리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북한에서 전쟁을 할 것 같다 라고 공갈을 했습니다. 국민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요구하면 간첩 사건 같은 것들을 터뜨려 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국민들은 노예들처럼 정권의 말을 잘 들어 주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에 지도자들은 국민을 국민으로 보지 않았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가 가진 힘으로 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무고한 시민을 폭도로 규정하고 군인들을 동원하여 총으로 쏴 죽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표현만 달랐지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대통령 후보들로 나온 사람들은 한결 같이 위기의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아주 중요한 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되어야 이 위기 상황을 이길 수 있고 편안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공갈로 유권자들을 위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 분간하십시오. 그렇게 공갈하고 위협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는 또 위협 속에서 조마조마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공갈치기 쉽습니다. 돈이 많으면 돈으로 공갈을 치기 쉽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그 좋은 머리로 공갈을 치면 사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주먹으로 남을 공갈쳐서 돈을 빼앗은 사람도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국민들에게 공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공갈 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겁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거짓말로 겁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상전과 노예의 관계를 무엇으로 보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역할 분담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어떤 사람은 지도자가 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9절의 말씀은 그 당시에 무서운 혁명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종이 어려운 일을 당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하지 못하는 이 당시 사회 분위기로서 바울의 이 말은 천지가 바뀌는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제도를 바꾸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제도로 사람의 인권을 찾아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노동 조합을 만들어 노동자의 인권을 찾아 주려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 자신이 바뀜으로 말미암아 상대방을 보게 만드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종교입니다. 사회제도를 변혁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우선으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회제도가 변한다 하더라도 사회에 구성원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지 좋은 제도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나쁜 제도라 할지라도 사람이 변하면 그 사회는 소망이 있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교회의 제도적인 모순을 보고 참지 못하여 제도를 고쳐 보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제도를 고쳐 보려고 합니다.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나머지 교회제도와 싸우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행동을 하기 전에 묵상 해보면 정말 우리가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에 우리는 없다 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죄인 된 우리는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나 같이 연약한 내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완전히 주저 않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나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도를 말하기 전에 나를 먼저 보십시오. 남편을 원망하기 전에 나를 먼저 보십시오. 시어머니를 원망하고 며느리를 원망하기 전에 나를 먼저 보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인줄 알면 문제가 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가 누구입니까? 힘있는 사람이나 힘없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9절 하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와 너희 상전이 하늘에 계신다 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에게는 하늘에 상전이 있다는 말입니다. 힘있는 자나 힘없는 자나 명령하는 자나 명령받는 자나 모두가 하늘에 상전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8절?

그렇습니다. 상전도 종들도 반드시 우리의 상전이신 주님에게 그대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5-9절을 관찰해 보십시오. 저는 앞서 말씀에서 종들보다 상전들이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닌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상을 받을 수도 있고 더 많은 핀잔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외모가 지도자라고 해서 더 많은 상을 준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모가 지도자이긴 하지만 지도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그것을 그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 12장4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같은 말씀을 주님은 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것을 빼앗아 열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정의는 골고루 주는 것이 아닙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에 한번 안 나오면 다음 주일에 더 열심히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한번 안나오면 재미가 생겨서 계속 안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급을 받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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