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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치 말라 / 눅 6: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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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누가복음 6:37-38
제 목 : 비판치 말라
설 교 : 이승우 목사 (옥곡대죽교회)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평지설교는 예수께서 세우시는 긍휼의 나라 법으로 말씀하는 계명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 그의 나라를 세우시고 자기 백성에게 선물하시기 때문에 이제 자기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따라 자비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아버지의 자비함을 따라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선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6:37-45도 계속되는 긍휼의 계명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37-38은 직접적인 명령과 약속을 통하여 말씀하고 39-45은 비유를 통하여 말씀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계명의 말씀도 구약 언어의 틀 가운데서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모세와 선지자와 시편의 글을 성취하여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계명도 모세 율법의 성취로 보아야 합니다. 율법의 성취란 것은 율법의 참 된 의미, 율법의 본 의미를 드러내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참 뜻을 이제 보여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의 성취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아버지의 자비하심의 나라 법으로 온전케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분명 구약의 율법도 자비와 긍휼의 계명입니다. 하지만 그 계명은 참 된 자비와 긍휼이 아님을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근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이방인은 멀리 두시고 죄인들은 멀리 두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참 된 자비와 긍휼의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이 나라는 병든 자들 부정한 자들이 들어오고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참 된 자비와 긍휼의 요구가 자기 제자들에게 이루어져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7-38은 명령과 약속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명령과 약속은 그 내용이 서로 상응하게 되어 있고 명령한 행위대로 도로 그들이 받으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그 숨은 행위자는 하나님 아버지이며 그리고 종말론적인 정죄와 비판과 죄 용서함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행위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고 죄 용서함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죄 사함을 받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먼저 비판하지 말고 용서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행위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에서 행위로 의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의 공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율법은 아담 아래서 죄의 권세 아래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는 죄를 열매 맺었고 의를 얻지 못하였고 이제 예수를 믿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율법의 요구를 이룸으로 의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로마서까지라도 사람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를 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 그리고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행위의 근거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은 언약적인 말입니다. 마치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미 언약의 백성들에게 율법의 순종을 요구하면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여호와의 언약 백성으로 머물러 하나님의 소유로 하나님의 나라로 살리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말씀하는 것도 이미 긍휼과 자비를 얻어 그 나라 백성이 된 자들에게 예수께서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순종하면 긍휼과 자비를 얻은 백성들로 그 나라의 복 안에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나라로부터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여기서 말씀하는 계명은 지고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명, 어느 누구도 도달하지 못하고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이 말씀에 대하여 모든 사람은 피조물이며 죄인으로서 자신의 허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사람이 없음으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즉 모든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법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판단 앞에 온전한 자들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판단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하나님 앞에 의를 얻으며 죄 용서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주신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합한 자를 고른 적이 없습니다. 모든 자들이 죄인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계명을 지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도록 그리하여 언약 백성으로 살도록 주신 법입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것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비의 자녀로 살도록 주신 법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지 설교의 말씀은 구약 계명의 말씀의 틀 안에서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 있는 계명도 그 틀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문자 그대로 이 법을 읽어서는 안됩니다. 구약의 율법의 틀 안에서 어떻게 예수께서 새로운 자비와 긍휼의 계명을 주는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과 거짓된 자들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 율법은 근본적으로 판단의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여호와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여호와 앞에 의의 백성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항상 구약 모세의 제도 안에서 자신을 판단하고 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의 판단을 따라야 합니다. 정결의 예법을 따라 자신이 부정한지 거룩한지 판단 받아야 합니다. 여러 계명을 따라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자신 안에 부정과 허물이 발견되면 마땅히 비판 받아야 되고 정죄 받아야 되고 그에 맞는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가나안 땅은 부정한 땅이 될 것이며 의와 공도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자가 그렇지 아니하고 형제의 허물과 부정에 대하여 자기 임의대로 비판하지 아니하고 정죄하지 아니하고 용서해 버리면 그 자신도 정죄를 받고 판단 받을 것이며 그러한 재판관은 불의한 재판관이 될 것입니다. 또한 만약 형제에 대하여 합당한 비판과 정죄와 형벌을 내리면 그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판치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모세 율법의 판단과 비판과 정죄의 방식으로 형제를 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주께서 세우시는 나라는 비판과 정죄의 방식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나라는 비판과 정죄의 나라였습니다. 허물이 사함을 받지 못하는 나라였습니다. 이제는 비판하는 자, 정죄하는 자 그리고 비판을 받을 자 정죄를 받을 자 판단할 자와 판단을 받을 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구약 때는 하나님이 그러한 구분으로 대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러한 판단의 질서를 따라 자비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온 열국 중에서 장자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 레위 지파와 제사장을 부르시고 천부장과 백부장과 십부장과 패장들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성소에 계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무엇이 거룩한지 정한지 부정한지를 판단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소의 땅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위가 율법에 합당한 행위이며 의를 이루는 것인지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판단을 좇아 온전한 공의를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멸망하였고 이방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비판할 자를 비판하지 않고 판단할 자를 판단하지 않고 정죄할 자를 정죄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의인들은 탄식하였습니다. 슬퍼하였습니다. 공의가 무너지고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번성하는 것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그들은 슬퍼하고 애통하면서 가난하였고 굶주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구원할 것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긍휼과 자비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구약 모세 율법이 지배하는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종말론적인 희년의 나라 은혜의 나라를 세웁니다. 이제 이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한다면, 이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받고 정죄를 받지 않고 서기를 원한다면 이전처럼 비판의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세우시는 긍휼과 자비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자비와 긍휼을 따라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 나라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로 말미암아 참다운 자비와 긍휼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세 율법의 판단과 비판의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대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모세 율법의 판단과 비판과 정죄의 방식으로 하자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지적과 판단과 비판이 맞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판단하기를 죄인과 함께 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이라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판단과 정죄는 모세 율법 아래서는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그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또한 구약의 정결의 법대로 하자면 병든 자들 귀신 들린 자들 문둥병자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의 판단을 따라 진 밖으로 나가야 하며 정죄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회복되기 전에는 용서함을 받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부르셔서 만지시고 치료하시면서 제자 삼았습니다. 그들이 생명의 회복을 받고 예수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를 선물 받아 긍휼과 자비를 얻었습니다. 이 나라는 선지자들에게 약속된 종말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나라 백성은 이 자비와 긍휼을 따라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고 형제를 세우는 나라인 것입니다. 너와 나의 구별과 차별을 따른 나라가 아닙니다.

구약 때는 비판하는 자, 정죄하는 자, 판단하는 자가 의로운 자이며 그들이 가나안 땅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자비를 얻지 못하리라 말합니다. 이제 비판치 말아야 비판을 받지 아니하며 정죄하지 말아야 정죄를 받지 아니할 것이며 용서해야 용서함을 받아 종말의 은혜와 자비의 나라에 참여하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떤 결과를 바라고 행하라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구약적인 틀 안에서 설명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새로운 행위와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복에 대한 약속이며 그들의 행위를 따라 그 행위 안에 나타난 그 나라의 복에 참여하리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에 덧붙여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는 말이 첨가 되어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 형제에게 공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 때는 비판 받은 자, 정죄 받은 자, 죄인이라 칭해진 자들에겐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아무리 가난하고 비천하다 해도 그들이 허물이 있고 죄인으로 정죄 되었으면 측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율법의 판단을 따라 쫓아낼 자는 쫓아 내고 심판할 자는 심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풍성히 그들에게 공급하라고 말합니다. 후히 되어 넘치도록 주라 말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풍성함을 채울 것입니다.

이제 이 단락의 결론으로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헤아리는 그 행위를 따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판하지 아니하면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고 정죄하지 아니하면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고 용서하면 용서함을 받을 것이고 주면 후히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에 대한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행한대로 그 행위 안에 나타난 긍휼과 자비의 나라의 복에 참여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평지에서 부름 받아 주의 나라를 선물 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좌 우편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림을 받아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우리는 그의 나라 백성과 제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은 것은 악한 자들이 그를 죽음에 내어주었기 때문인데 오히려 그의 고난과 죽음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처음 그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을 때 서로 누가 크냐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처럼 형제를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였고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말씀하시면서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는 보좌 우편의 긍휼과 자기의 나라를 자기 제자들에게 선물하기 위하여 대속죄물로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구약의 의인들은 그들이 고난을 받았어도 그들의 고난은 많은 사람의 대속죄물로 고난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고난 중에 비판 받을 자가 비판을 받고 정죄 받을 자가 정죄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긍휼과 자비의 새로운 나라 오히려 자기 몸의 죽음과 고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로부터 죄용서함을 받고 그의 나라에 참여하도록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아버지께로부터 약속의 성령을 받아 자기 제자들에게 선물하였습니다. 보좌 우편의 긍휼과 자비의 나라를 선물하신 것입니다. 이 나라는 구약 가나안 땅의 나라와 다릅니다. 구약 의인들에게 가나안 땅의 부요함으로 복주시고 위로하신 것과 다릅니다. 이 나라는 세상이 무너뜨리지 못하고 죽음이 무너뜨리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는 이스라엘의 의인들 가난한 자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만민이 참여합니다. 왜냐하면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 만민의 구주가 되셔서 천하만민을 자기 제자로 부르시는 긍휼과 자비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이방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아 회개의 세례를 받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참여한 자들이 되어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을 회개시켜 보좌 우편의 나라로 세례되어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로 하늘 보좌 우편의 상으로 불러모아 주의 살과 피의 교제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나라를 선물 받았고 그의 아들들이 되었으니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을 따라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고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명의 부요함으로 형제를 섬기고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신약 교회는 모세 율법과 같은 기준으로 너와 나는 다르다는 식으로 형제를 나누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할 기준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여 자기 자녀 삼으신 은혜와 자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심의 풍부함이나 외모를 가지고 형제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낮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한 것이라 말하면서 피차에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허탄한 자랑으로 자랑하지 말고 재물을 쌓지 말고 형제를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선생이 없습니다. 우리의 선생은 우리 주님이요 우리의 아비는 하나님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선생이 되어서 형제를 비판하거나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의 자녀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푼 것처럼 형제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형제를 주 안에서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한 생명의 공동체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며 형제의 허물까지 용서하고 형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는 것이며, 나의 생명의 풍성함으로 형제를 공급하고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사랑과 은혜 안에서 자비와 긍휼의 풍성함을 누릴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명의 부요함으로 우리를 채우셔서 우리로 더욱 풍성함으로 형제의 보호자와 부양자가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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