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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삶을 위한 명령 / 약 1: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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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야고보서1:19-20 
제 목 : 새 삶을 위한 명령
설 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안에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 예배의 자리에 동참한 이웃 여러분,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나 보다"라고 누군가 읊었던 것을 패러디해서 표현한다면 오늘 말씀을 위해서 지난 한 주간 많은 말들이 무성했나 봅니다. 특히 홈페이지에 글로 기록된 것만 해도 족히 A4용지 100매를 채울만한 분량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말들을 잠시 중단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차례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이 자리에 모두 나왔습니다. 제가 오늘 읽어드린 야고보서 1장 19, 20절은 여러분이 보는 대로 18절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18절 끝 부분을 보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모든 선한 일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빛들의 아버지께서는 온갖 선한 선물들을 우리의 삶에 풍성히 주셨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새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귀가 말씀을 듣고 우리의 심령이 그 말씀에 반응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듭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각 사람은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주님을 위한 새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피조물의 첫 열매"로 우리는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눈에 존귀한 자들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때로 우리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안타까워하시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된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도 우리를 용납하고 싶어하지 않는 순간조차도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마음으로 우리는 자신을 용납하고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지금 하나님의 심정으로 지상에 흩어진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기본적인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명령을 귀담아 듣고 주께 순종할 때 우리의 모습은 날로 하나님의 자녀다워질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성도들의 위로가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헌신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말씀과 관계를 가집니다. 말씀으로 태어난 신자는 태어난 순간부터 말씀에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진리의 말씀에 반응을 보일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의 축복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축복받는 새로운 삶을 위한 기본적인 명령을 들어보십시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듣기는 속히 하라, 말하기는 더디 하라,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은 얼핏보면 누구라도 따를 만한 교훈같습니다.

예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수긍을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에 듣기를 속히 하고 말하기를 좀 절제하고 성내기를 좀 더 규제하라는 것은 누구든지 쉽게 수긍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결코 모든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야고보 선생은 지금 자기가 사랑하는 신앙의 형제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 형제들을 향해서 너희가 알지를 않느냐고 그들이 신앙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난 그들의 공동지식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신앙인으로 생각해 보면 능히 알 수 있는 바대로 "듣기는 속히 하라 말하기는 더디 하라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즉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것을 안다면, 자신이 수긍하는 이 진리를 여러분 자신의 삶에 반영을 시키라는 것이 야고보 선생의 논지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아마 이 야고보서가 신약 성경에 없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지금보다 훨씬 더 이론적이고 추상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우리가 새 생명으로 태어난 여부를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증명하라고 합니다. 가장 구별하기 쉬운 우리의 일상 생활영역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의 말을 듣고, 또한 말하고, 성내고 하는, 보통사람들이 생활하는 영역에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거기서 여러분 각 사람이 새 생명으로 태어난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이 야고보 선생의 논지입니다.

그러면 새 생명으로 태어난 첫 번째 증거는 무엇입니까? 새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의 특성은 말씀에 대한 신속한 반응입니다. 새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잘 듣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말씀을 잘 듣고 있습니까? 듣는 것은 새 생명으로 태어난 첫 번째 증거입니다.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입니까?

좋은 신앙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말씀을 읽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하나님의 백성의 징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면 수긍하고 고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따라 삶을 바꾸는 것을 기뻐합니다. 책망을 기뻐하고 훈계를 귀히 여깁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다릅니다. 위선자도 다릅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신구약 어디를 펴든지 읽으면서 졸고 있는 반응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긍정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혹시 벌써부터 졸고 있는 사람은 날씨 탓하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좋지 못한 증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속으로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씀이 그 삶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수긍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듣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시간마다 듣는 말씀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그 말씀이 일주일동안 생활 속에 남아 있습니까? 여러분이 매일 읽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새로 태어난 사람은 순전한 젖을 사모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생명은 말씀의 젖을 사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신생아의 특징이요 영적 생명으로 태어난 신자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본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이 말씀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제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왜 신속히 듣지 않을까요? 자기가 배워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무지나 얕은 지식을 내뱉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앙생활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누리기를 소원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배워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제일 답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자기 얘기만 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지낸다는 것은 부부관계로 만나도 답답하고, 친구지간으로 만나도 괴로운 것이고. 같은 직장인으로 만나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알고 있다는 사람은 들을 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무슨 문제가 나와도 한마디 할 것이 있는 사람은 함께 성경공부를 해도 피곤합니다.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고 붙잡은 것이 있다면 함께 공부를 하는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그러나 별로 아는 것도 없는데 무슨 문제가 나와도 자기 말만 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도 자기 말만 많이 하는 것은 좋지 못한 매너입니다. 같은 친구끼리도 자기얘기만 하려고 들면 "자기 잘난체 한다"고 따돌림을 당합니다. 말도 안되는 논리를 장황하게 전개하면 속으로 "아이구 잘났어" 하는 핀잔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명령의 심각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듣기를 속히 하라는데 있습니다. 이 명령은 신앙의 형제들에게 하는 권면입니다. 신앙인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속히 하라는 것입니다. 남의 말 물론 들어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속히 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요지입니다.

야고보는 일반적인 부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친구지간에도 서로 상대방에게 들어야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듣기를 속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말만하는 사람도 답답하지만 그보다 더 답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남의 이야기를 듣는 척합니다. 수긍을 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끝내고 들어보면 그전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분명히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놓고, 그 전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안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생각이 옳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중에 자기 얘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얘기가 귀에 안들어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전반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설교도 별반 유익이 없습니다. 귀에 들어오는 말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장이 그럴 듯 하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릴 리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래선 안되겠구나"라고 인정합니까? 그 정도 가지고도 안됩니다. 더 고민하십시오. 괴로워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뒤에 가서는 흐지부지되어 버립니다. 더 이상의 변화는 없습니다. 들은 말씀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옛 습관대로 살기 일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있습니까? 들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우리 위치에 비해서 얼마나 들으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진리로 태어나게 하신 것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진리의 말씀을 듣기를 그처럼 원하실까요?

그것은 조물 중의 한 첫 열매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피조물 중에 내놓아도 부족이 없는 수준의 삶을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그 수준을 향해서 이끌어 나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그리스도의 성숙한 모습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신앙 생활을 한 세월은 흘렀는데 영적 수준은 아이로 머물기를 하나님은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새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각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왜 우리는 신속히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대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새로 창조하신 수단인 동시에 여러분을 성장시키기 위해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숙시키려고 하십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훈련이 제대로 안되면 영적 성장이 둔화됩니다. 주님과의 교제에 금이 생깁니다. 사실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달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는 땅위에서 성도들이 받아 누리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새 삶을 위한 지침을 말해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개를 흔들고, 우리가 길을 막고, 우리의 생각을 굳히고 있으면 아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는 것은 얼마만큼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고 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속히 들을 수 있습니까? 말씀과 조용히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성경을 통독해도 좋고, 성경을 연구하여도 좋고, 성경을 조용히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신속히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마다 다 참석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라면 나가고 싶은 욕망이 있어야 건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말씀이 듣고 싶으면 말씀의 자리에 새벽이든지 낮이든지 저녁이든지 나아오십시오. 말씀이 있는 곳에는 모두 참여하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자랍니다. 듣기를 속히 할 때 신앙은 자랍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 거룩한 새 욕망이 생겼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것은 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들으면 들을수록 더 듣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습니까? 예배시간 마다 나와서 들으십시오. 가장 손쉽고도 권장할만한 방법입니다. 또한 시간을 내어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토요일 아침에는 원치 않게 가끔 조찬모임이 있습니다. 어제 아침에도 조찬모임에 참석하고 오면서 장로님 주차장에 차를 대었기에 들렸습니다. 거기서 장로님을 만나 뵙고 감동했습니다.

일찍부터 일터에 나오셔서 업무에 착수하신 것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손수 준비해서 대접하는 야생 복숭아 차도 시원했습니다만 그보다 제가 감동한 것은 그 바쁘고 더운 곳에서 책상 위에 성경을 펴둔 모습이었습니다. 차량 입출입을 점검하는 컨테이너 박스로 된 관리실은 아침 9시였는데도 벌써 데워져 있었습니다. 덥고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경을 읽고 계신 장로님을 만나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말씀을 귀히 여기는 분들입니다. 80이 넘은 어머니께서 햇빛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성경 읽는 것을 볼 때마다 감동이 됩니다. 컴컴한 이층침대 아래편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 성경을 읽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한 식구라는 감동이 있습니다.

글을 못 읽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성경을 읽고 싶은데 글을 못 읽습니다 하시는 분들은 경로대학에 오시면 글을 가르쳐 드립니다. 이 나이에 언제 글을 배우겠습니까 라고 생각이 드시는 분은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요즘은 글을 읽을 줄 아는 분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테이프에 성경을 녹음해 놓았습니다.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혹시 이런저런 기회조차도 갖지 못해도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교통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지면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에 계시된 것만큼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모든 중생한 사람들의 양심 속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은혜의 자리에서는 더 선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양심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 . ." 여러분의 양심이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실 때에 거기에 정직한 반응을 보이십시오. 양심의 소리가 귀에 들릴 때 그 양심이 명하는 바대로 순종하십시오.

신앙생활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거절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기독교는 이 양심을 떠나서 존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나님의 앞에 담대하게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성경책도 덮은지 며칠 되었지만 그러나 그럴 때에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듣는 말씀에 대해서, 양심의 소리에 대해서 정직한 반응을 보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양심의 소리도 아예 귀를 막아버리고. . . 책을 펴서 조용한 시간에 읽으면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이야기해 주실 것을 알면서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있지는 않는지요? 시간은 확보하십시오. 사람은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는 어째도 시간을 냅니다.

혹 교회를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좋은 책들도 있고 좋은 테이프고 있으며 좋은 방송도 있습니다. 설교집도 있지 않습니까? 신문 읽는 시간만큼 할애해도 상당히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 일을 하면서 극동 방송을 틀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극동 방송을 들으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앉아서 성경을 읽기가 힘든 분들은 좋은 설교 테이프나 성경 테이프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갈급해 하는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언젠가 10톤 트럭을 모는 기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보통 기사들과 달라서 알아보니 직장 때문에 주일은 교회에 못나갈 때도 있지만 대형트럭을 몰면서 극동 방송을 늘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소위 대형트럭 기사의 횡포가 없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는 주일 성수가 안되니까 이 직장을 그만 두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 성수되지 않는 직장은 굶어 죽어도 못 다닌다면서도 다른 문제는 기독교인답게 처신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일관성이 없습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덕도 안됩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조롱을 받습니다. 주일 성수 때문에 토요일에 천리길을 왕복해도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습니다. "예수? 저렇게 믿으려면 차라리 안 믿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새 생명으로 태어난 두 번째 증거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두번째 명령은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것은 일상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을 한번 연상해 보십시오. 어떤 주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게 됩니까?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르면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들으려고 하지 자기가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것이 되기 전에는 아는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말하려고 하면서 듣기는 싫어합니다. 자기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좋은 신자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만 쏟아 놓으면 아직은 영적으로 어린 사람입니다.

좋은 신자는 들으려고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신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만나서 대화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숙해지면 성숙해질수록 형제자매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압니다. 자신이 더 잘 안다는 교만이 남보다 먼저 튀어나오게 합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면 새 생명으로 태어난 세 번째, 마지막 증거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급히 화를 냅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고 좋은데 사람들이 안 들어주면 화가 납니다. 화내는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내 생각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누가 내 얘기 안 들어줘도, 거절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단한 생각인데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화가 나는 것입니다. 화내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화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할 때, 당회나 제직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견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선한 뜻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또 그 뜻이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화를 낸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것은 내 주장이 정말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면 화를 내는 금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화가 납니까? 내가 교회를 위해서 바르게 하려고 하는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기분이 상합니다. 그대로 두면 일이 안되니까 화를 낸다고 하지만 사실 정직하게 보면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 화를 냅니다. '내 생각이 옳은데 왜 안 받아들이냐'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물론 의분을 터뜨려야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자주 그런 자리에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화를 낼 때는 그것은 인간적인 분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상을 뒤집어엎고 의자를 던져야할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는 그냥 웃고 지나가고, 별로 화를 낼 이유가 없을 때는 화를 내곤 합니다.

아이들한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친구한테도 마찬가지고. '도대체 화를 안내면 말을 안 듣는군.'이라고 아이들에게 다그치지만 뒤집어 놓으면 나는 화를 내야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화를 내어야 일을 성취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람이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구 말이 맞을까요? 성경입니까? 여러분의 주장입니까? "사람이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지 못하느니라"는 말을 꼭 명심하십시오.

여기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기대치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그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를 안내면 말을 안 듣는다고 아이들을 향해서 고함칠 때 여러분은 벌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에 실패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런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쉽게 소리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기를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사람이 내는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화를 내게 됩니까? 그것은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으니까 사소한 것도 화가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내 안에 평온함이 있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주님께서 주신 그 평안함을 잃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맞대응해서 잃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대응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자주 기울이다보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도 귀를 기울이도록 변화시킵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합니다.

남의 이야기도 받아들이게 되니까, 내 의견만 옳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 생각도 옳고 아이의 생각도 옳으니까 내가 화내기에 앞서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화가 나는 그 때만 넘기면 다른 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훨씬 쉽게 풀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번 화를 내고 나면 얼마나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화를 내어서 안됩니까? 분노가 판을 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자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듣기를 속히 합시다. 말하기는 더디 합시다. 성내는 것은 더더욱 더디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방법입니다. 분노는 신뢰할 것이 못됩니다. 의롭지도 못합니다.

오직 조용하고 온유한 마음만이 경건을 낳는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분노나 흥분이 아닌 인내와 침착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증거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정말로 이루어야 하는 좋은 목표는 화내는 방법을 통해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반성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번도 이와 같은 복된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지상에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차례씩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고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육십억이 넘는 인구가운데서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부담이 있어서 우리가 이 여름에는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나아왔사오니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옵소서. 깊이 생각한 후에 한마디 말할 수 있는 지혜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화를 냄으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그 목표를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내 입으로, 내 모습으로, 내 행동으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어리석은 일은 이제 중단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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