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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사람이 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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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요한복음 1:19-28
제 목 : 한 사람이 섰으니
설 교 : 임대식 목사 (평화교회)


이제 며칠 후가 되면 우리나라 제16대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저의 짧은 경험으로는 이번 대통령 선거가 여러 면에 있어서 바람직한 모습으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분들 가운데 많은 경험과 경륜을 갖춘 적합한 분들이 많습니다. 토론이나 유세의 내용을 보면 알차고, 나라를 경영할 준비가 잘 되어있고, 민족의 내일과 비전을 책임질 인물들입니다.

그저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상대방 후보를 인정하고 칭찬해 주면서,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혔으면 하는 일입니다. 상대방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마치 당장이라도 이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망할 것 같은, 그런 비방 유세를 지양하고, 상대방을 존경하면서도 자신의 정치 소신을 당당하게 펼쳐 나가면 더 좋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 큰 사람들이 많은 이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성경을 보면 당대에 인기 절정을 누렸지만, 자기선전은 뒤로 하고, 나보다 더 큰 이가 오신다고 소개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긴 이가 있습니다.

나는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다, 나는 앞으로 오실 분의 구두끈을 묶어 드릴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그 분이 곧 오신다, 이렇게 겸손히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가 있으니 이 분이 곧 세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이 분이 소개한 이가 곧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요한 복음 1장에는 세례 요한의 모습이 몇 군데 나와 있습니다. 우선 6절-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 빛이신 예수님을 어두움의 세상에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빛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합니다.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데, 그 빛나는 태양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각 장애자입니다. 눈 먼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이 죄에 눈멀고 불의에 깊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빛이 곧 올 것이라고 그들에게 들려주어야 했습니다. 빛에 대해 증거 하는 이가 필요했습니다. 사람의 죄의 상태가 어떠함을 잘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는데, 그는 빛에 대해서 증거 하는 일이 그의 일차적 사명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빛이 아니라, 빛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특별히 증거 내용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세례 요한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요한이 그에게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 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시간적으로 구약의 끝을 마무리 짓고 신약의 길을 열어주는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참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요한의 증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전에도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또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그리스도는 증거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요한은 전에도 증거 했고 지금도 증거 합니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리스도는 증거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충성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좋은 밭에 뿌려진 좋은 씨는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반복이 필요합니다. 반복해서 성경 읽기, 반복해서 기도하기, 반복해서 봉사 헌신하기, 반복으로 전도하고 또 전도하기, 이렇게 우리는 천국 가는 그날까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인내를 기울여 나가야 합니다. 신앙이 지속성이 없으면 그것은 헛된 일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은 우리가 전에 하듯 지금하고, 또 내일도 실천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다음 말씀을 보면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예수님은 시간적으로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나셨습니다. 광야에서 복음을 전한 것도 세례 요한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뒤에 오시는 이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자기보다 앞세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중심의 신앙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에는 제일 첫 자리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주의 나라와 그의 의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앞세우기는 앞세우는데, 그것은 자기를 보호할 방패막이용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 될 때는 신나게 자기중심으로 살다가 어려운 때가 오면 “오, 주님 도와주십시오, 해결해 주십시오” 졸라댑니다.

세례 요한은 언제나 예수님을 자기보다 앞세웠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를 따를 때에도, 승승장구할 때도, 자기의 인기 절정의 순간에도 예수님을 앞세웠습니다. 여기 세례 요한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세례 요한보다 먼저 계실 뿐 아니라 영원 전부터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기의 구원자이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분명히 알 때에 그는 그 예수님을 높이고 앞세우고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세례 요한의 신앙과 생활 자세를 겸손하게 배워야 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 보여주는 세례 요한의 모습이 바로 그러합니다. 19절 이하의 사건입니다. 세례 요한이 메시야 준비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요단강에서 베풀고 있을 때 그 소문은 수도 예루살렘에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최고 종교의회인 산헤드린은 어떤 형태로든 조사단을 파견한 것이 분명합니다. 저들은 요한을 찾아와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최고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짜 메시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요한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나는 아니요.”

그러자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엘리야입니까?” 유대인들은 언젠가 승천한 구약의 엘리야가 메시야가 나타나기 전에 다시 온다고 믿었습니다. 말라기 4:5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했습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그 생김새나 하는 일이 엘리야를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엘리야의 환생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메시야의 사역을 준비하는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엘리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대답은 분명 “아니요”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진실 되고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뽐내지 않았고, 사람들이 자기를 크게 봐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요한에게 “그러면 당신은 누구인데 세례를 베푸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요한은 대답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그는 충분히 엘리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데 조금도 자기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남아서 예수님의 영광을 침범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치고 사라지는 소리가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흔적없이 사라지는 충성스런 일꾼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일군들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를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일한 것보다 더 많은 인정과 자랑을 요구합니다. 주님보다 자기가 더 큰 영광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 자랑이 아니라 자기를 더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경우에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로 올라가거나 그리스도의 존경을 중간에서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만 높임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 겸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위대한 분임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화가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잘 그렸습니다. 이 화가의 친구가 와서 그림을 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손에 들려있는 저 잔이 너무 너무 아름답구나.” 화가는 재빨리 붓을 들어 색칠하여 그 잔을 뭉개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그림에 있는 어떤 것도 예수님의 얼굴보다 더 빛나는 것을 나는 원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생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감추어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세례 요한의 정신을 갖도록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29절 말씀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잘 요약한 말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이 말은 상징적인 것으로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양을 대할 기회가 별로 없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랑으로 양을 늘 돌보면서, 그 양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아프리카 어느 지방에서는 이 본문의 성경 구절을 번역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돼지새끼”라고 옮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양이라는 동물이 없기 때문에, 양이란 단어 자체가 없으므로, 그대로 옮겨 놓으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사용하는 돼지새끼를 양 대신으로 번역해서 이해를 도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권에서도 양을 제물로 드리지는 않으므로 이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만, 히브리 사람들이 가진 양에 대한 생각을 알고 나면, 이 본문의 뜻이 이해가 됩니다.

출애굽기 29:38을 보면 매일 일년 된 어린 양을 잡아서 아침과 저녁때에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2:3을 보면 매년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 절기가 되면 흠 없는 1년 된 수양을 취해 잡고 그 피는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를 구워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4:32에 보면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제사를 드릴 때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마치 어린 양처럼 죽으시고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 세상에는 죄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죄의 오염은 대기오염이나 환경오염과는 비길 수가 없습니다. 대기나 환경오염은 인간의 육체를 병들게 하고 환경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죄는 영혼과 인격과 환경과 세상과 가정 등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맙니다.

범죄에는 성역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중, 바다, 땅, 산, 숲 속, 거리 할 것 없이 사람이 있는 곳에는 죄가 있습니다. 요한이 말한 “세상 죄”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에 물들은 존재이며 로마서 3장이 밝힌대로 ‘의인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둘째로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지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예수님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의 죄를 위한 어린 양이 되셔서 세상의 죄를 지시고 죽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셋째로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 죄를 담당하셨어도, 내가 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이 증거 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곧 내 죄의 짐을 지고 가시는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내 슬픔, 내 고통, 내 절망, 내 좌절, 내 아픔, 내 질병, 내 죄, 내 죽음까지를 온통 짊어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주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역사의 무대에 한 사람이 섰으니, 이 분이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이를 믿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오, 이를 증거 하게 하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 임하시고 함께 하셨던 성령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역사를 이루실 줄 믿으며, 이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 그늘 밑에 나아가 죄의 짐을 내려놓으며, 이 예수님을 증거 하시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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