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 소원대로 되리라 / 마 15:21-28

  • 잡초 잡초
  • 443
  • 0

첨부 1



설 교 : 안명환 목사 
제 목 : 네 소원대로 되리라
본 문 : 마태복음 15:21-28
     

     
세 명의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든 한 가지씩 소원을 말하면 들어 주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사나이는 왕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왕(King)이 되었습니다.

둘째 사나이는 별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역시 소원대로 별(Star)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사나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욕심이 많은 세 번째 사나이는 '두 가지가 다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소원도 그가 원하는 대로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사나이는 무엇이 되었을까?
'왕별'(King Star)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별(Star).+ 왕(king).= '스타킹'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돌아 다니는 유머입니다만 욕심 많은 소원이 어떤 결말을 가져오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환경이나 장소 또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소원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백두산에 서서 소원을 생각해 보면 모두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극장에 가서는 영화의 주연배우를 보고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선생님이 소원이요, 병원에 가면 의사나 간호사가 소원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어느 꼬마 녀석은 커서 중국집 주방장이 소원이라고 했답니다.
왜 그러느냐는 물음에 그는 '자장면을 실컷 먹을 수 있을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에 오면 무슨 소원이 생깁니까?
목사님이 제일 높은 것 같으니까 '나도 목사가 되어야지'라는 마음이 생깁니까?
아니지요.
교회에서의 제일 어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소원입니까?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것이 소원이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소원은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육의 구원과 영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의 전반기에는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배고픈 자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자기의 고귀한 피를 흘려 인류의 영의 문제인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에 하시고 싶은 대답은 Yes인 것입니다.
No라는 대답은 결코 원치 않습니다.
손자를 사랑하시는 할머니가 손자가 해달라는데 거절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기쁘게 하신 말씀이 바로 '네 소원대로 되리라'이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의 소원이 잇습니다.
하나는 가련한 가나안 여인의 소원이고,
또 하나는 제자들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제자들의 소원을 들어 주시어 '개와 같은 처지에 있다'는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소원을 거절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여인의 소원은 들어 주시고, 제자들의 소원은 물리치셨습니다.
그런데 왜 처음부터 귀신들린 딸 때문에 괴로워하는 가나안 여인의 소원을 속히 들어주시지 아니하셨을까?

오늘 본문을 보며 그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마 15:23)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요구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사정을 아뢰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뜨겁게 기도를 하다가도 가끔씩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구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는 나에게 가장 적절한 것들을 늘 허용해 주셨는데, 그분의 온전하신 섭리를 혼잡케 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주님은 나를 바울처럼 사랑하시기에 적절한 가치를 주셨습니다.
지금 여기 계신 주님의 자녀들 가운데 가시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빈틈없이 관찰하시다가 베드로 같이 너무나 자기 방식대로 주님에게 다가오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심한 가시의 채찍을 주시기도 합니다.
또한 마치 욥의 삶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듣기만 하는 자에게서 볼 수 있는 자녀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연단도 허락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도 바울의 가시처럼, 욥의 연단처럼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이끌어 가시는데  내가 지금 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본문의 제자들처럼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하며 모든 것이 '내 생각대로 되라'고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기 제자들의 소원은 이 가련한 여인의 딸의 병 고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 제자들은 이 시끄럽게 떠드는 여인을 쫒아 내는 것이 소원일 따름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에게 소원이란 무엇입니까?

소원은 어떤 목적을 보았기에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소원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은 더욱더 강한 집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 집념은 먼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소원을 성취하고픈 사람이 되게 됩니다.
등산하는 사람에게 왜 산을 오르느냐고 물으면 거기 산이 있기에 오른다고 합니다.
인간은 산이 있기에 오르게 됩니다.

주님의 소원과 가나안 여인의 소원

이제 우리는 주님의 소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의 소원은 한 마디로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아오는 인생은 어느 한 사람도 버림받지 않는 것이 주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39)

결국 주님의 소원과 가나안 여인의 소원은 분명히 똑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소원을 들은 주님은 분명히 거절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24절)

왜 거절 하셨을까?
주님의 거절의 답변을 들은 가나안 여인은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내 놓습니다.
처음에는 절하며 도와 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가나안 여인은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인 주를 인정하고 경배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젠 나는 당신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경배 받으실 분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절은 더욱 단호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절)

그러자 이 가나안 여인은 더욱 간절한 마음을 주님에게 전합니다.
"옳소이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이 무슨 말씀인가?
왜 주님은 사람과 개를 비교하여 거절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가나안 여인의 소원보다 더 중요한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은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가나안 여인과의 관계입니다.
적어도 주님과 가나안 여인과의 현재의 관계는 주인과 개의 관계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주인과 개의 관계에서는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는 주인의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주인이 주어야 받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스라엘의 식사예절은 까다롭지 않습니다.
나이프도 포크도 젓가락도 숟가락도 없습니다.
다만 손으로 식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식사가 끝나면 마른 빵 조각에 자기 손에 묻은 여러 가지 음식 찌꺼기 기름을 그 빵으로 닦습니다.
그리고 그 빵은 개가 있으면 개에 던져줍니다.
주인과 개의 관계에서 개는 주인을 위하여 있어야 하고 주인이 주는 것만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과 가나안 여인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인과 개 사이가 아니라 나아가 '나와 너' 사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느 기독인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업이 경제 불황으로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주변에서 '이럴 때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전혀 기도 생활을 하지 않다가 내가 어렵다고 기도하는 것, 하나님 앞에 염치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기도 생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염치가 아닙니다.
바로 자기의 자존심입니다.

마틴 루터는 신앙생활의 적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칼 바르트는 자존심이야 말로 원죄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여인의 소원과 마음을 아신 주님은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절)

"네 소원대로 되리라."
네가 나를 받아드렸으므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주님은 그 여인의 소원은 들어 주시고 가까운 제자들의 소원은 물리치셨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 여인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었고, 제자들의 소원은 인간들의 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소원이 있습니까?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비록 주님이 침묵하시더라도 더욱더 주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 소원에 어떤 장애가 있습니까?
그것도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그 장애를 충분히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소원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라면 그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소원을 아는 방법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1.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몇 년 전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내게 새로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즉시 나는 우선 주보에 교회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가 교회를 건축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의 사정이 무척 어려웠기 때문에 내가 교회를 지어야겠다고 말을 꺼내면 아마 모든 성도들이 내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우리에게는 교회를 지을 만한 돈도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기도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내게 할 수 있다!'는 불타는 마음의 소원을 주셨습니다.

어떠한 가능성도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새 성전 건축을 놓고 기도하면 내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확신이 넘쳐 나는 것입니다.
모든 환경이 부정적이었지만, 결국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새 성전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나는 기적과 같은 이 일에 새삼 감격을 느끼곤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 마음에 강한 소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꿈과 비전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해 안타까울 때에는 기도하면서 우리 마음에 불같은 소원이 타오르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구별하기 어렵습니까?
그때에는 마음을 정하여 간절히 기도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지지만, 인간적인 소원은 몇 날이 못 되어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2. 여러분들의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지를 확인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마음에 분명한 소원이 생겼으면 이제 그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행여 인간적인 정욕이나 세상의 자랑을 좇아 나온 것이라면, 그 소원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어느 날 어느 성도가 목사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도무지 결혼 생활을 못하겠습니다. 이혼하겠습니다."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자기가 다른 여인과 사귀고 있노라고 하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의 아내는 제게 맞는 상대가 아니라고요. 제가 사귀고 있는 그 여자야말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진짜 아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단호히 버리십시오. 그 소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이 아닙니다. 악한 사단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목사님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내와 이혼한 뒤 그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원했던 두 번째 아내가 처음 아내보다 더 맞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뒤였습니다.

3. 환경의 문이 열리는지를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품고 있는 마음의 소원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소원이 말씀과 일치된다면, 그 다음으로 환경이 열리는가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신 소원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열리게 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억지로 열려고 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필리핀의 어느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을 따라 큰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세우는 도중 예산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시멘트가 떨어졌지만, 돈이 없어 시멘트를 사지 못했습니다.
철근이 녹이 나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교회는 흉한 몰골을 드러냈지만, 건축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날마다 성도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를 짓기 시작한 것이니, 환경을 열어 하나님께서 완공케 하여 달라고 모두가 합심하여 기도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 앞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걸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그는 대단히 화가 난 목소리로 다짜고짜 욕을 해댔습니다.
"교회를 지으려면 빨리 지을 것이지 그게 뭡니까? 보기 싫은 철근을 드러내 놓고 이렇게 도시 미관을 망쳐 놓다니. 못 지을 것 같았으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이나 말 것이지. 짓다 만 건물로 거리가 흉물스럽게 그게 뭡니까?"
목사님은 조용하게 대응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미리 계산해서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교회를 짓습니다. 잠시 동안은 돈이 없어서 공사를 진행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곧 짓게 해 주실 것입니다."
"뭐라고요? 하나님이 지어 준다고요? 그런데 나는 그 앞을 매일 지나야 한단 말이오. 당신네 짓다만 교회 때문에 기분 나빠 죽을 지경인데, 앞으로도 계속 이래야 된다는 거요? 도대체 무엇이 모자라서 못 짓는 거요?"
그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시멘트가 없어서 못 짓고 있다는 목사님의 대답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가 돈을 보낼 테니 그 돈으로 시멘트를 사시오. 제발 그 흉측한 모습을 다시는 안보이게 하란 말이오."

그 사람이 보낸 돈은 시멘트 수천 부대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 분명한 뜻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그 교회는 얼굴도 모르고 교회도 다니지 않는 사람이 보내준 돈으로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와 같은 단계들을 거쳐 확인될 수 있습니다.

1. 마음에 변치 않는 강한 소원이 있는가?
2. 그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3.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환경도 허락하시는가?

여러분들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단계를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결재를 받으십시오.

사람마다 다 소원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소원은 이루어지지만 어떤 사람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멕시코 대통령에게 미국 기자가 물었습니다.
"북미와 남미가 그처럼 다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소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북미의 청교도들은 신앙을 위하여 하나님 곧 God을 찾으러 왔지만, 남미의 스페인, 포르투갈 사람들은 금 곧 Gold를 찾으러 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북아메리카로 온 청교도들은 하나님도 찾고 금도 찾았지만, 자신을 위해 금을 찾아 남미로 온 사람들은 금도 놓쳤고 하나님도 찾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마음에 소원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따라 결과는 분명히 달라집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올해는 내가 몇 등을 하겠다.
내가 어떤 대학에 꼭 합격하겠다.
어떤 회사에 내가 취직하겠다.
내가 돈을 많이 벌겠다.
이것도 우리의 소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들이 모두 이루어지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소원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