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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롬 8: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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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본 문 : 롬 8:18-25
설 교 : 박상훈 목사 (승동교회)
 

(롬8:18-25)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지만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고난이 우리에게 부딪혀 옵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고난에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참고, 장래의 영광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장래의 영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현재의 고난을 잘 참아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가 쓴 글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 강철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팔면 5달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말의 편자를 만들어 팔면 10달러를 벌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으로 바늘을 만들어 팔면 300달러를 벌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을 더 두드려서 날카로운 면도칼을 만들어 팔면 3,000달러나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으로 시계 속에 들어가는 정밀한 스프링을 만들어서 팔게 되면 30,000달러의 값어치가 나는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똑같은 재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들겨 연단할수록 그 강도는 더 높아집니다. 값어치도 점점 더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를 연단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더 귀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된 우리들이 언제나 최상의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을 통해 연단시키시는 것입니다.

워치만 니는 어려서부터 병약했습니다. 의사가 그를 진단해 보고서는 아무래도 청년시절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믿음이 깊었습니다. 그는 늘 건강문제를 놓고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매번 똑같은 응답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기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나서 받은 응답이 있었습니다. 고후12:9의 말씀입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도 똑같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에는 그 응답이 흡족하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프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일이 섭섭해서 몸이 아플 때마다 눈물지으며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한참 올라가는데 갑자기 그의 눈앞에 큰 바위 덩어리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가 탄 배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큰 바위 덩어리가 저를 가로막고 있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바위를 좀 치워주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얘야, 내가 너를 위해서 그 바위를 치워주는 것이 좋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강물이 충분히 불어나서 너로 하여금 그 바위 위로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더 좋겠느냐? 곰곰이 생각해서 대답해 보아라."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앞에 있는 바위가 치워지면 그 순간은 쉽게 지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또 다른 바위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강물이 충분히 불어나게 되면 앞에 있는 바위들도 다 물 속에 잠길 테니까 쉽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강물이 불어나서 제가 바위 위를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그 순간 강물이 충분히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껏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 하나 때문에 고통하며 그것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기만 하면, 그 어떠한 고난이라도 쉽게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뒤로부터 자기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과연 그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그 이후로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속에서 늘 마음껏 노저어 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의사는 그가 청년시절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80세가 넘도록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의 기독교 역사상 지울 수 없는 큰 자취를 남긴 훌륭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차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공동으로 상속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어떠한 자세로 받아야 될 것인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으면 그까짓 고난들은 얼마든지 쉽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영광이 있습니다.

고난만 바라보지 말고, 고난 너머에 있는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고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우리가 생각할 때 현재의 고난은 쉽게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지금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여기에 큰 저울이 있습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을 모두 묶어서 저울의 한쪽 편에 올려놓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고난의 실체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엄청난 고난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후11:23∼27에서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고난들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엄청난 고난을 겪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겪어온 이 모든 고난들을 묶어서 저울의 한쪽 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저울의 다른 한쪽 편에는 장래의 영광을 올려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그 누구보다도 장래의 영광에 대해서도 체험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째 하늘, 곧 낙원으로 이끌려 올라가 신비한 체험을 가졌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후12:1∼4에서 그는 장차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자신이 직접 보고 난 뒤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여러 권이나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하나님 나라에서 본 놀라운 영광과 그곳에서 들은 말을 도무지 사람의 말로는 형용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찬란하고 엄청난 영광에 완전히 압도를 당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저울의 한쪽에 현재의 고난을 올려놓았습니다. 다른 한쪽에 장래의 영광을 올려놓았습니다. 서로 비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18절 끝 부분에 보니까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비교할 상대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에 비해 너무나도 가벼웠습니다. 반대로 장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에 비해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그 둘을 저울 위에 올려놓자마자 저울은 완전히 기울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비교할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중한 것입니다.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합니다. 고난은 이 땅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는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장래에 누리게 될 영광의 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일평생 동안 주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당하면서 헌신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고난 너머에 있는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쳐 순교했던 것입니다.

스데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공회 앞에서 입을 열어 담대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은 분노한 모습으로 이를 갈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늘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도 보았습니다. 그는 감격 가운데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노라!"
여기 저기에서 돌이 마구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참으로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기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러면서 그는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는 잠을 자는 듯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고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천사와 같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고난만 생각하지 말고 고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봅시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응원군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격려의 소리입니다. 응원의 소리입니다. 우리를 정신차리게 하는 소리입니다. 19∼22절의 말씀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만물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들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들이 우리가 영광 가운데 나타나는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겠습니까? 20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지금 피조물은 본의 아니게 허무한데 굴복 당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여기에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그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일 지나고 보면 허무하게 다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땅에 내다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초목들이 그렇습니다. 봄이 되면 새싹이 나옵니다. 여름이 되면 그 푸름을 한껏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어서 다 떨어지고 맙니다.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됩니다.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입니다.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한 것은 강한 것에 잡아먹힙니다. 강한 것도 나이가 들면 병들어 다 죽고 맙니다. 결국은 그 몸이 썩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피조물이 그렇게 된 것은 자기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들은 타락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땅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한데 굴복 당하게 되고,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만 것입니다. 한 마디로 피조물은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어쩔 수없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영원토록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임시적입니다. 언제 그것이 끝납니까? 21절 말씀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그날, 피조물들도 더 이상 허무한데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썩어짐의 종노릇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상속하게 되는 그날, 옛 하늘과 옛 땅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피조물도 우리가 누리는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허무한데 굴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피조물은 그날을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2절 말씀을 보십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탄식의 대합창 소리입니다. 피조물은 이제까지 탄식해 왔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에 그들은 참고 기다리면서 탄식해 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고통해 왔습니다. 피조물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면서, 허무한데 굴복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해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피조물이 오랜 세월 동안에 탄식하며 고통하면서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왔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떠해야겠습니까? 이 땅에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을 우리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면목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응원군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피조물이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는 합창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소리는 우리를 격려하는 소리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소리일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사라지고 우리에게 영광이 임할 것을 바라보면서 애타게 탄식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으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현재의 고난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23∼25절의 말씀입니다. 23절 말씀을 봅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뿐 아니라"고 했습니다. 피조물만 탄식하며 고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탄식하며 고통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역시 탄식하며 고통합니다. 우리도 역시 그날을 바라보면서 애타게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무엇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까?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많은 열매를 주기 시작합니다. 이미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많이 받았습니다. 예컨대 8:2에 보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13절에서 성령은 우리 몸의 행실을 죽여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14절에서는 성령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16절에서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많은 열매들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appetizer가 먼저 나옵니다. 맛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Main dish는 따로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이미 우리에게 많은 열매를 주셨지만 마지막으로 주실 궁극적인 열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23절 하반부에서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양자 될 것"이고, 둘째는 "우리 몸의 구속"입니다. 이미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속사정을 다 아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들으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서, 하나님의 후사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받게 될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아직은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직은 소망으로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실 마지막 열매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부패한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도 구속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병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육신의 생각 때문에, 죄의 유혹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위대한 영적인 사람도 7:24에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하나님의 자녀치고 이러한 오호라의 탄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구름 타시고 영광 가운데 오시는 그날, 우리의 타락하고 부패한 육신도 구속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변화 받게 될 것입니다. 썩어질 몸이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어지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까지 소망으로 남아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마지막으로 주실 열매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2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미 우리는 영적으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실 마지막 열매인 양자 될 것, 우리 몸의 구속은 아직 소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소망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미래의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고시를 공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시에 합격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고시에 이미 합격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미 합격한 것을 바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소망은 미래적이고 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는 보이지 않는 미래적인 일, 곧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은 그저 막연히 기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장래에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을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되겠습니까? 참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참고, 장래의 영광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현재 잠시 잠깐 당하는 고통은 참고 견뎌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칼빈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탄식하며 고통해 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참고 견뎌왔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을 참고 견디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이 서겠는가?"
그러면서 그는 임종할 때 롬8:18의 말씀을 계속해서 암송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5번을 암송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6번째 끝까지 암송하지 못하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겨놓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는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대감 속에 사선을 뛰어 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고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응원군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를 위해 그날을 바라보면서 탄식 가운데 함께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참고 기다려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이 땅에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쉽게 통과하고, 영광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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