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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데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 딤후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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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데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본 문 : 딤후4:10
설 교 : 윤일문 목사 (사도교회)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비행기 사고의 80%이상이 이륙할 때와 착륙할 때라고 합니다.
그만큼 시작과 끝이 중요하다는 교훈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속도로에도 보면 도착 지점을 10km쯤 앞두고는 이러한 표어가 붙어있습니다.

"다 왔다고 방심말고 끝까지 안전운행"

우리들 가운데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동기와 시기는 각각 다른 것입니다.
시작을 어렵게 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쉽게 믿어져서 이 자리에까지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 지켜내기가 가장 힘든 순간은 마지막 고비일 것입니다.
군 시절 가장 힘든 기억은 일주일에 두 번
뒤는 구보였습니다.
구보할 때 10km를 달리는데 마지막 8km 지점이 되면 한 부대원들이 본능적으로 힘을 모읍니다.

호흡이 달리는 대원들의 장비를 들어주고 앞에서 잡아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외칩니다.
"악이다 깡이다"

그만큼 마지막 골인지점이 힘이 든다는 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한 해의 시작도 중요하고 한 해의 마무리도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통 무엇을 그렇게 잊어버리려고 하는지 망년회로 시끌벅적합니다.

이 시점에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을 잘 준비해야 할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통 들뜬 분위기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으로 큰 일하는 교회라는 말씀으로 시작한 한 해가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예배 시간을 맞고 있습니다.
아직도 초보 목사의 목회로 인해 교회가 든든히 서지 못하고 겨우 걸음마를 하고 있는데, 이 걸음마를 보다 익숙하게 하기 위해, 교회를 보다 든든하게 세우기 위해 밤낮 없이 말씀 안에서 씨름을 하는 가운데 주시는 지혜가 바로 믿음을 굳건히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믿음을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데로 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믿음을 뿌리내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출발은 순종이었고 그 믿음을 순종으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붙잡고 그대로 순종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주신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취될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이 세 가지 믿음의 요소들이 이제 자리 잡아가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순종이 안되어서, 어떤 이는 인내가 어려워서, 어떤 이는 응답을 기다리지 못해서 믿음을 내려놓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 한 해는 믿음으로 보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믿음을 보다 철저히 자리 잡게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새로 안고 한 해를 마감하는 시간을 맞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우리와 함께 사도의 훈련을 받고 있다가 우리 곁을 떠난 지체들에 관한 생각이 가장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한 해 동안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며 예배하던 지체들 가운데 우리 곁을 떠나 있는 지체들이 지금 남아 있는 분들보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더욱 목회자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이미 떠난 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는 까닭으로 다른 장소나 교회로 옮겨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들 가운데 오늘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데마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녕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는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교훈을 통해서 우리는 제2, 제3의 데마를 막아야 한다는 커다란 과제를 안게 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본문을 허락하신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는 데마의 가능성 때문입니다.
본문은 대단히 짤막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지나간 세기를 통해서 교회 역사 속에 데마의 유혹 앞에 서게 되는 모든 성도들을 향한 경보 장치의 역할을 해 왔던 것입니다.

데마가 어떤 인물인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신앙 생활을 중도에 포기하고 만 인물입니다.

이 작은 교회에 짧은 기간 안에 지금 출석하고 있는 분들보다 더 많은 분들이 이미 떠났다는 것은 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기도 하고 또 다른 풀어야만 하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가 목회를 마칠 때까지 저에게는 떠나지 않는 부담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니까, 조금은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저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사도요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이 하던 목회지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가장 강력하게 쓰신 인물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강한 저항감을 가졌던 유명한 무신론적인 철학자 니이체마저도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은 바울의 천재성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데마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바울을 먼저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데마는 바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역자이자 제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 24절을 보시면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는 부단히 로마를 향한 전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때 로마에서 바울 곁에 머물면서 로마의 복음화를 위해서 복음을 전했던 동료들 가운데 몇 사람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바울이 동역자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데마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권입니까?
바울 사도를 따라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감격, 바울이 성경 말씀을 가르칠 때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는 감격, 상상해 보십시오.

바울 목사님 교회에 가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고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최대의 특권,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4장을 읽어보면 바울이 자기 생애 사역의 마지막까지 그 곁에 머물러서 수고한 자기 동역자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기억되어야 할 인물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 4:14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초데 교회의 한 문서를 읽어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로마의 거리를 걷고 있던 바울, 그 오른편에는 의사 누가가 있었고 왼편에는 데마가 함께 걷고 있었다"

사랑받는 동역자인 누가가 바울의 오른편에 그리고 그 왼편에 데마가 걷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 가까이에서 바울을 느끼며, 바울의 심장을 알며, 바울의 마음 속에 고동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며 세계에 대한 찬란한 비젼을 느끼며 바울과 함께 사역했던 사람이 바로 데마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데마가 단순히 바울을 버리고 갔다는 그 사실을 그렇게 문제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란 만남이 있고 헤어짐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의 헤어짐을 문제삼는 중요한 이유는 이 사람이 바울을 떠난 그 시기와 그 동기가 문제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 사도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자기 생애의 마지막 시간들을 로마의 거리에서 보냈습니다.

자기 생애의 지독한 고난과 고통을 그의 마지막 시절에 겪었습니다.
아마도 이 편지를 기록할 때에 로마의 감옥에 있거나 감옥에서 나왔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늙은 바울,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기의 복음을 향한 열정을 세계의 수도인 로마의 거리에 쏟고 싶었습니다.
아니 바울은 이미 죽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본문 4: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딤후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 도다

바울은 문자 그대로 자기의 삶을 주의 제단 위에 부었습니다.
관제는 제단의 제물위에 포도주를 부어서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배를 위해서 자신을 다 드리는 마음으로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기의 정열, 청춘, 시간, 재능, 에너지를 부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부음이 되고 이제는 나의 떠나갈 기약이 가까웠다"

왜 하필이면 이때 데마가 바울을 버리고 떠납니까?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기회주의적인 배신자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가 지치고 기력이 다한 것과 같은 모습이 되어서 실제로 도움이 필요할 때 데마는 함께 하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 목사이지만 제 나름대로는 한 주 한 주를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믿음이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관제를 쏟아 부은 열정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쓰다보니 우리 가족 모두가 조금씩 지쳐가고 있습니다.
데마를 떠나 보내고 아파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가슴 깊이 진한 아픔으로 공감이 됩니다.
올 한 해 우리 교회 공동체를 뒤로 하고 떠난 분들 가운데 데마와 같은 분들이 있지는 않았는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이 사실을 이렇게 문제삼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은 이렇게 답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한 것이 무엇이 어떤 잘못이기에 이러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 당시 이 성경이 쓰여지던 1세기 신약 시대에 세상이란 단어가 쓰여지던 시대에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거스리는 우리 사회 속에 있는 악한 사조, 흐름, 경향성, 철학입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추종하지 못하게 하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잘못된 사고와 철학과 형식과 제도와 모든 거센 흐름, 이 전체를 집약적으로 말할 때 세상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롬12:2 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라는 문구가 있는데 바로 이 경우가 세 번째 용법으로 쓰여진 세상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일2:15-16을 보십시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 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 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은 일찍이 주님을 미워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세상이 우리 주님을 저주하고 배척했던 세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것들은 주님을 멀리하게 하고,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가려고 할 때 그 길을 가로막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그 손길이 주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바로 그 사단의 손길이 세상 속에 숨어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고 애를 쓰는 우리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다가 시험에 빠지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이 이러한 세상의 유혹의 손길을 극복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는 말을 들을 때 데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나중에 안 믿게 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1세기의 문서들을 최근에 읽으면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에 가서도 계속 신앙 생활을 했었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 당시 즉 1세기 당시에 제일 유명한 그리스도인 도시가 바로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바울 사도가 가장 짤막한 시간 동안 전도에 가장 많은 열매를 맺었던 곳이 바로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 1장을 읽어보시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불과 6개월 미만동안 머물렀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전도하는 바울의 복음 앞에 이 도시 전체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와 이 도시 전체가 그리스도 앞에 돌아오는 대대적인 전도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잠시 후에 이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며 이미 이 교회의 소문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믿음이 소문이 벌써 먼 아시아와 구라파에 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1세기 문서를 읽어보시면 로마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데살로니가로 이사를 갔습니다.
왜냐하면 박해가 일어나니까 그리스도인이 많이 모여 사는 데살로니가로 갔으며 이러한 흔적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갔고"라는 말은 신앙을 가졌다가 불신앙으로 옮겨갔다고 피상적으로 가정해서는 안됩니다.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가능성은 희생적인 신앙에서 안이한 신앙으로의 이동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머물고 있는 한, 그리고 바울 곁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의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어느새 이 박해의 시간이 길어지자 내가 예수를 믿어서 그것이 내게 가져올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가 하면서 수판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주해 가는 데살로니가 행렬 속에 끼어 있었던 데마의 얼굴, 이것은 땀을 흘려 주를 섬기던 봉사적 신앙에서부터 방관적 신앙에로의 이동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나를 바쳐 살던 이타적 신앙에서 이기적인 신앙에로의 이동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회의, 믿어서 유익이 무엇인가?, 어느 날 갑자기 주일 날 아침 한시간마저도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의 발걸음은 데살로니가를 향하기 시작합니다.

여기 일꾼의 자리로부터 구경꾼의 자리로 전락하고 있는 데마의 얼굴을 보십시오.
믿음에 있어서 왕도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지 못하고 조금한 마음 때문에 차라리 데마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열심을 내던 믿음의 사람들이 해마다 연말이 되면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한해만 직분을 내려놓고 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안식년을 갖고 자신을 충전하는 시간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교사나 성가대 그리고 여러 가지 직분들을 이따금씩 자신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쉬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쉬고자 하는 마음이 자칫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면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 다른 나의 생활을 위해서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데마와 함께 데살로니가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땅의 교회들이 앞 다투어서 로마가 아닌 데살로니가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경쟁적으로 크게 지어놓고 그곳에서 데살로니가의 그럴듯한 유혹의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개척교회에서 어렵게 전도해서 어느 정도 양육이 되면 그 화려함과 편안함 그리고 값싼 직분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로 모르는 불쌍한 복음의 구경꾼들을 양산해가고 있습니다.

동기가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의 동기, 봉사 생활의 동기, 한 해를 보내면서 내가 움직이고 교회 출석하는 이 모든 봉사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무엇인가를 점검할 시간이 되었다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데살로니가로 향하는 마음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봉사를 거절할 때 희생을 거절할 때, 섬김을 거절할 때, 내 육신적인 안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한 시간을 줄여가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데살로니가로 올라가는 데마의 행열에 끼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로 가면 편안하게 신앙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신앙의 성숙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승리의 감격은 맛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승리와 환희와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은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언제나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
본문은 다행이 10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10절 만이라면 바울의 이 세상에서의 지상의 마지막 사역은 너무 쓸쓸한 황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다음과 같은 절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그의 왼팔은 잘라졌습니다.
데마는 더 이상 바울 곁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에는 경건한 지성인 의사 누가가 있었습니다.

배울만큼 배웠던 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가진 모든 정열과 지성과 지능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는 데서 삶의 더 카다란 열매와 보람을 거두기 원했던 지성인 의사 누가는 끝까지 그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신앙의 길에는 누가의 길과 데마의 길이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우리 교회도 이 둘 중에 어느 한 교회 상을 선택해서 내년을, 미래를 설계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에게 편안한 신앙 생활을 보장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
보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서 고난과 봉사를 통해서 주님을 위해 진정한 가치를 남기는 교회를 창조할 것인가?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새로운 한 해를 계획하고 계십니까?
누가를 따라가시겠습니까?
데마를 따라가시겠습니까?

그 날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오늘을 위해 살기 원하십니까?
지난 일년을 돌아보는 이 시점에서 나의 신앙 생활을 정리한다면 오늘 나는 로마로 가는 그 행렬에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핍박이 있어도, 박해가 있어도, 주께서 나를 보내시는 그 장소, 눈물이 있어도, 희생이 있어도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다 보면 아픔이 있어도, 부담이 있어도, 주를 위한 섬김과 바침을 위해서 로마로 가는 그 행렬에 뛰어들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내 육신의 안일과 편의를 위해서 데살로니가로 가시겠습니까?

로마에서 데살로니가로 가고 싶은 유혹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인생의 황혼 속에 갈등하던 제자 한 사람이 생각납니다.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이미 한번 실패했지만 그는 또 한번의 실패 위기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점차로 격렬해지자 마자 그는 로마의 언덕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로마의 도시를 빠져나갈 생각에 골돌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 늙어서 이 고통을 당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의 발걸음이 로마의 언덕을 넘어가려는 그 순간 한 영롱한 환상이 나타납니다.
그때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등지고 떠나가는 로마로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서 간다"
이 환상이 베드로의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 후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피를 뿌리며 마지막 죽음을 통해서 주 앞에 영광을 돌렸으며 자기 생애의 마지막을 장엄한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베드로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물으십니다.
로마로 가려느냐? 데살로니가로 가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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