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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사벳에게 임한 축복 / 눅 1: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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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엘리사벳에게 임한 축복 
설 교 : 황요한 목사 
본 문 : 눅 1:39-45


이번 주간 강림절을 맞이해서 주님의 오심을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그리고 깊은 믿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뻐하는 성도들의 모습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에는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녀가 사랑으로 만나서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가정을 이루고 또 가정에서는 하나님이 반드시 자녀를 주셔서 태의 열매가 기쁨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가정의 모든 희망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준비하시는 은혜가 여러분들 모두에게 임하는 줄 믿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가정에서의 축복의 열매이기도 한 자녀를 얻지 못해서 고민하고 또 힘들어하는 그러한 가정들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랬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그랬고, 삼손을 낳은 마노아의 아내가 그랬고, 또 사무엘을 낳았던 엘가나의 아내 한나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소개되어져 있는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도 그랬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본래 잉태치 못한 자더라" 그랬습니다. 낳지 않으려고 안 낳은 것이 아니라 정말 낳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사모하지만 낳을 수가 없는 그런 여성들이었습니다.

현대 과학은 자녀를 얻지 못할 때 부부 모두를 클리닉해서 남자에게 문제가 있는지, 혹은 여자에게 있는지를 분명하게 가려주고 또 문제를 해결하도록 치료의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아마 과거에는 그런 과학적인 그러한 분석은 어려웠을 것이고, 우리 나라의 전통을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하면 거의 대부분 그것은 여자의 몫으로 그래서 쫓겨나기도 하고, 평생토록 기죽어 살기도 하고 그랬던 것이 과거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한 것은 이들 여성들이 잉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견디기 어려운 정신적 고통을 겪고 가정의 불화가 생기기도 했고, 그리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나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그런 케이스였고, 또 이삭 같은 경우에는 리브가가 아이를 낳지 못했을 때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간절하게 이삭이 하나님께 구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아내의 태를 열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기도가 더 힘을 얻었든지, 아니면 남편의 기도가 더 상달되었든지 중요한 것은 그 부부가 하나님 앞에 자녀를 위해서 눈물겨운 기도와 사모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1장에 보면 사라는 자기의 남편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던 해에 아들 이삭을 낳았고, 창세기 25장에 보면 리브가는 남편 이삭이 60세가 되던 해에 야곱과 에서를 낳았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노아의 아내는 삼손을 낳았고, 한나는 사무엘을, 그리고 엘리사벳은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 평안의교회 안에도 자녀를 사모하지만 얻지 못했던 사랑하는 평안의 가정들 위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본래 잉태치 못한 자였지만 사모하며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그들을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그들 가정에 임함으로 태를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살았고, 세례 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나사렛에서 무려 130㎞나 떨어진 예루살렘 근처의 아인카림이라고 하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오늘 제가 봉독해 드린 말씀은 마리아가 그 먼길을 떠나서 친족이기도 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그리고 그 방문한 마리아를 맞이하면서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봉독되어졌습니다.
마리아를 보면서 엘리사벳은 말합니다. "여자 중에 복이 있는 자로다" 많은 여성들 중에서 여러분 자신이 "나는 여성들 중에 복이 있는 여성이다"라고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반대로 "나는 많은 여성들 중에 그 많은 행복하고 정말 살 맛 나는 그 많은 여성들 중에 왜 나만 이럴까?"라고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자기를 평가 절하하는 그래서 마음 아파하는 여성들이 계실 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갈 때 그리고 그들의 대화 속에서 축복이 선언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만나자마자 마리아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여자 중에 복있는 자로다" 얼마나 마음에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겠어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고민하셔야 합니다. 어떤 말로 상대방을 축복할까? 만나자마자 속상하고 김새는 소리하지 말고 아무리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해도 그렇지요. 기분 좋게 차리고 나왔는데 말 한마디 때문에 그날 기분을 온통 망가뜨려 놓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참 안타까운 일들이지요.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을 어떻게 축복할까? 어떻게 세워줄까? 어떻게 그들에게 삶의 의욕을 돋구어줄까?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들은 마리아가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처녀로서 이 앞에 제가 소개한 이 여성들은 결혼한 아내로서 가정으로서의 고민이었는데 마리아는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정혼만 해놓은 상태였는데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네가 복이 있는 자로다"하면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아들을 낳게 할텐데 그 아들을 예수라고 해라. 모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고, 그는 왕 중의 왕이 될 것이고, 다윗의 위를 이어갈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로 인하여 기뻐할 것이다" 너무 엄청난 말씀을 했을 때 마리아는 그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난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짧게 말씀했지만 아마도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는 많은 대화가 오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일이 주어졌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능력의 덮으심이 너와 함께 한다고 했을 때 그냥 그 자리서 "아멘!"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어요? 아마 저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성 논리적으로 말하겠지요. "내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아직 나는 아이도 기다리지 않았는데.." 여러 가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이유들이 제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부분을 보면 주님께서 이 마리아의 대화 중에 여러 대화 중에 결론적으로 가브리엘 천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다시 말하면 지금 내가 하나님의 이 놀라운 뜻을 너에게 전하는 것은 물론 메신저로서 전하는 사명을 가졌지만 분명히 네가 알 것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이성이나 과학이나 이런 부분에서 접근해야 할 부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신앙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으로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의 부활하심을 결론적으로 마리아에게 전하고 있어요. 그리고 마리아는 38절에 보면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결론은 마리아도 믿음으로 받은 줄로 믿습니다.

결론이 중요하지요. 주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고 힘들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이셨지만, 반면에 참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주님은 피곤하실 때 피곤해 하셨고, 슬프실 때 눈물을 흘리셨고, 괴로울 때 마음 아파하셨어요. 십자가를 진다고 할 때에 육신을 가지신 그 주님으로서 감당해야 할 그 고통도 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십자가의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지만 주님의 결론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제가 성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결론을 가지고 오는 사람입니다. 다 자기 맘대로 해놓고 와서 보고의 형식은 갖지만 사실 보고는 아니예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할텐데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맞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으면 얼굴색이 변하지요. 그런 사람들은 제일 목회하기가 피곤한 사람들이예요. 결론을 가졌으면 가져올 이유가 없어요. 그냥 하시면 돼요. 자기 뜻대로 자기 멋대로 하면 되는 거지 그걸 뭐 또 체면치레로 가지고 옵니까? 준비 과정에서 기도하는 과정에서 그때 와서 상의를 해야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하면서 나눌 수 있고, 그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가 함께 순종해 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결론을 다 지어놓고 그리고 형식 차례를 치루는 사람들은 참으로 힘든 사람입니다.

주님의 결론,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겠다고 하는 말은 이것은 이성으로 되어지는 결론은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되어지는 결론도 아닐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 앞에 고백하였듯이 이것은 바로 믿음의 고백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향해서 축복을 몇 가지 하는 중에 마지막 45절에서 이렇게 축복합니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네가 지금 성령으로 잉태되고 하나님의 능력의 덮으심을 입는다고 하는 사실을 네가 말씀으로 받아들인 바로 너가 놀라운 하나님의 복이 임할 거다" 엘리사벳으로서도 자기의 친척인 마리아가 그런 믿음으로 그런 상황을 감당하였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대견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 속에는 믿음으로 고백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는 그래서 언제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합니다. 성경 66권 전체 중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주님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에 대하여,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짧게 짧게 되어 있지만 그 하나 하나가 그냥 지나갈 것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제일 먼저 뭐라고 고백하십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천지창조에 대한 고백이 안되면 사도신경은 시작할 수가 없지요. 그것까지는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지요? 그거 고백이 안되면 그 다음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냥 예배 자리에 자리만 하나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그 한 소절 한 소절, 끊어서 읽지요? 저는 사도신경을 보면서 읽습니다. 못 외워서가 아니라 예배를 인도하는 인도자로서 단 한마디라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함께 따라하면 다같이 하는 것은 쉬운데 마이크 앞에서 크게 하려면 한 마디라도 틀리면 예배에 덕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사회할 때는 늘 제가 보고합니다. 그리고 읽을 때 가능하면 한 소절, 한 소절 끊어서 읽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리고 숨을 한번 쉽니다. 숨을 한번 쉬는 것은 육신의 호흡이지만 그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해요? 마음으로 아멘! 아멘이 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로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도신경이 한 소절 소절마다 계속 믿음으로 믿음으로 되어진 다음에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하고 마지막 아멘은 최종적인 거예요. 그것이 신앙고백으로 되어지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으로 내게 다가왔을 때 그것이 다른 이성이나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그것을 전하고 있어요. "믿은 여자에게, 바로 너에게,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인 너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도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인카림에서 생활하면서 그해 대제사장의 반열에서 그는 반차에 따라서, 순서에 따라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가정도 나이가 많이 들어감에도 자녀가 없어서 늘 안타까워했습니다. 성경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데 놀라운 일은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더라" 그랬습니다. 남편 신앙과 아내의 신앙이 하나님 보시기에 다 좋았다는 말입니다.

부부 신앙은 수레바퀴와 같아요. 같은 수준에서 가야 합니다. 뭐 100% 같을 수는 없겠지만 비슷한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수레바퀴 하나가 그 지름이 짧으면 어떻게 돌아갑니까? 이상하게도 큰 바퀴 중심으로 돌지 않지요? 작은 바퀴 중심으로 돌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가 알 수 없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이지요. 아마 고등학생들은 다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만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럽니다. 사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적이고 충성한 진실된 사람들이 많지만 잘못된 사람이 하나 문제를 터뜨리면 온 세상이 그곳으로 흙탕물이 튀깁니다.

예를 들어서 경찰관이 무슨 총을 가지고 강도질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럽니다. "요즘 경찰관들 다 썩었어" 그렇게 말을 하지요. 그러나 경찰관의 99.9%는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정직하게 살고, 시민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목사 중에 한 사람이 잘못되어서 신문에 나면 "요즘 목사들 다 썩었어" 이렇게 말하지만 그런가요? 99.9%는 정말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일생을 내어놓고 헌신하는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그 작은, 잘못된 작은 부류들이 전체에 흙탕물을 튀겨놓는 것이지요.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아내가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신앙적으로 가정은 발전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내가 아무리 눈물겹게 헌신을 하려고 해도 남편이 뒷바라지, 신앙적인 도움을 주지 않으면 정말 그것은 가시밭길이 아닐 수 없어요. 그래서 부부는 늘 함께 믿음의 길도 함께, 소망의 비전도 함께, 언제나 함께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께서 그들 두 사람이 모두 의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7절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의인이고 주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살은 그 가정에 수태치 못하더라" 그랬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부부가 의롭게 사는 가정이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가정인데 그런데 왜 아이를 못 낳습니까? 이런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민을 주고 때때로 힘들게 하는 거예요. 신앙생활 잘하는 의인의 가정이면 아이도 잘 낳아야 되는데 "주님, 이번에는 아들주세요"

그러면 아들을 쑥 낳고, "주님, 이번에는 딸입니다" 그러면 딸을 쑥 낳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 부부를,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 부부를 왜 하나님은 수태하지 못하게 하셨을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의인도 가질 수 있는 고통과 고민이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주의 종의 가정에도 고통이 있고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위해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반열에 따라, 차례를 따라 제사장 직무를 행합니다. 기분 나쁘겠지요. 아무리 헌신되게 주의 일을 했어도 자녀가 없으면 아마 실족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사가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하고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분들은 다 행복하신가요? 여기 계신 모두는 모두가 다 만사형통한 분들만 오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제목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고민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어요. 그렇지만 주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은 반차에 따라, 순서에 따라 신실하게 감당하는 이 모습이 정말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이 이 사가랴 가정의 모습과 같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잘될 때만 잘하는 것은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 기뻐하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평범한 존재가 아니잖아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노라"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당신의 자녀로, 특별히 삼으셨는데 지나가다가 그냥 만난 사이가 아니잖아요. 그런 특별한 존재인,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인 내가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때로 고민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 사가랴 가정에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의 가정에 아들을 줄 거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가정에 큰 은혜를 주셔서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 그러면서 그 낳아야 할 아들 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 아들을 낳으면 너도 기뻐하고 너를 아는 모든 이웃들이 기뻐할 거다"

우리의 태어남의 존재가 기쁨의 존재가 되어야겠지요? 생일 축하할 때 장난삼아 이런 노래합디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우리 크리스챤들은 장난으로라도 그런 노래하면 안됩니다. 우리 성도로서는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아무리 코미디이고 장난이라도 해야 할 것이 있고, 안 할 것이 있어요. 부부가 앉아서 장난한다고 "여보, 우리 이혼 한번 해볼까?" 그런 얘기를 농담으로 합니까? 그거 무덤까지 갈 동안 정말 그 단어는 쓰지 말아야지요. 그 단어를 쓸 때에는 천지가 개벽해야지요. 조그만 말다툼마다 그런 단어가 나온다면 그건 정말 곤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의 태어남에 대해서 그 자신도 기쁨이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도 기쁨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축복이예요. 자녀의 주심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가랴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저가 태어나면 우선 너희들이 기뻐할 것이요,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태어날 그 아들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요...."

여러분, 자녀를 축복하실 때 좀 크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어느 방송을 들으면서 제가 우리 친구 목사님 딸 결혼식을 다녀왔는데 딸 결혼식을 다녀오며 제 생각에 "아, 나도 이제 곧 이 자리에 서겠구나" 생각을 했어요. 자, 다녀오는 동안에 라디오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주부가 글을 써서 게스트가 읽는데 자식이 이뻐보이는데 그것을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그 아이의 귀에 점이 있으면 "얘, 귀에 점이 있으면 복이 있는 자라고 그러던데 어쩌면 너는 귀에 점이 있어서 이렇게 복이 있니?" 뭐 자기의 손의 모습이 아주 동글동글하면 "야, 손이 동글동글하면 재능이 있다던데 넌 어쩌면 그렇게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니?" 그냥 하나 하나를 모두 뜯어서 그렇게 축복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자식이 늘 잘하지 만은 않지요? 속을 썩이고 아주 힘들게 해도 이 어머니는 그렇게 욕을 한다고 합니다. "이 크게 될 놈,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큰 일을 할 놈" 이러면서 욕을 한대요. 그건 욕이 아니라 축복이지요. 저는 그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분이 상담대학원을 나왔나..." 보통 수준의 어머니가 아니지요?

자식을 축복할 수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대부분 축복보다는 저주를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우리 한 세대 위의 부모님들, 일반적으로 자식에게 퍼붓는 욕은 저주에 가깝지요? 제가 이 강단에서 할 수가 없는 욕들입니다. 기가막힌 욕들을 우리는 밥먹듯이 들으면서 대부분의 한민족 자손들이 듣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달라져야지요?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향한 말들은 축복이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요한을 축복하십니다.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요한은 이스라엘 자손을 주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는 "이스라엘 자손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엘리야의 능력과 심정을 가지고 그 일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차를 운전하실 때는 주로 우리 맹집사님과 민전도사님이 하시지만 가끔은 성도들이 할 때도 있지요. 운전할 때는 늘 목회자의 심정으로 하기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차가 사고가 나거나 교통 법규를 위반했을 때 얼마나 하나님 영광을 가릴 것인지까지 생각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자손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일할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강대강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례 요한을 사가랴 가정에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늙어서까지 아이가 없으니까 "한번 너희들 품에 아이를 한번 안아봐라" 그런 의미에서 아이를 주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실 때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자녀들은 다 주님의 뜻이 있어요. 그 뜻을 분별키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 뜻에 여러분들이 늘 맞추어 가면서 살기를 원해야 합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을 사가랴의 가정에 주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자, 그 말씀이 바로 17절에 나와있습니다.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사역을 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주신 이유는 첫째로 주 앞에 앞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연령으로 보면 6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사역을 앞서서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30세가 되어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까지 조용히 고향에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6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는 이미 30세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지역에서 아주 능력과 권위가 있는, 백성의 존경을 받는 그런 선지자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도 그를 두려워했고, 심지어는 헤롯 임금도 그를 두려워할 정도의 영적인 파워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늘 자신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일을 위해서 그의 사역을 감당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그의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가랴 가정에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축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예비하는 축복, 예비하는 자의 축복입니다. 그렇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탄절이 되면 연극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연극에서는 예수님이나 혹은 마리아나 요셉, 이런 사람들은 주인공에 버금가는 위치입니다. 그런가 하면 동방의 박사들도 나올 것이고, 헤롯 왕도 나올 것이고, 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목자들이 사람들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지 몰라요.

늘 교회에서 이런 연극을 이렇게 배역을 맡기다 보면 우리 선생님들은 고민이지요. "누구에게 이 배역을 줄까?" 사실 저의 가정은 보면 목회자의 가정이라고 너무 플러스 알파가 아니라 마이너스 알파의 어려움이 많아요. 맨날 우리 아들 사탄을 시키고, 뭐 지나가는 사람 시키고, 속상해 해요.

사실 세상적으로 하면 아빠가 담임목사니까 요셉을 하고 마리아를 하고 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것을 원치 않지요. "야, 사탄이라도 있어야 천사가 돋보이지. 열심히 해보아라... 오히려 격려합니다. "아마 선생님이 너는 목사님 아들이라고 너는 그것 시켜도 시험에 안 들 것 같아서 그거 시켰을 거야. " 늘 마이너스 알파이지요. 손해가 많습니다. 배역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장로님의 아들들이나 권사님 딸들을 다 마리아를 시키거나 다 요셉을 시킬 수는 없겠지요. 모두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만은 그러나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준비하는 자의 축복, 이 세례 요한은 자기의 그 명성과 권위와 능력을 주님이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러 오셨을 때 송두리째 주님 앞에 내어놓았어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조차도 모두 다 주님께 보냈어요.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나는 아니라" "그러면 누구입니까?" "내 뒤에 오시는 바로 저 분이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것들이 다 그 분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라고 하는 것, 다시 말하면 그는 사역을 출발하면서 사역의 의미를 알고 있었어요.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이 되는 것도 기쁠 지 모르지만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 주님을 위해서 준비하는 자로서의 삶을 철저하게 살았고 그리고 그는 가장 헌신적인 주의 일꾼으로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우리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줄로 믿습니다. 사가랴 가정에 주신 자녀는 그와 같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가랴를 말을 못하게 하셨어요. 아이가 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하셨어요. 말을 하지 못하면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사람들이 말 못하는 사가랴를 보고 얼마나 많은 추측을 하고 여러 가지 억측을 했겠습니까? "저 사람이 갑자기 말을 못하나?" 제사장이, 목사님이,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나? 아이를 낳는 동안 얼마나 정신적인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하지만 그는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하다가 아내가 세례 요한을 낳은 후에야 주께서 그 입을 열어 주신 줄 믿습니다.

오늘 '엘리사벳의 임한 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의로움과 신실함으로 살지만 때때로 우리에게 수태치 못하는 것과 같은 고통과 고민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 앞에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말없이 감당했던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들에게 하나님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놀라운 주의 일꾼을 그의 가정에 주셨고, 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준비하는 앞서 준비하는 은혜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엘리사벳을 통하여 허락하신 놀라운 뜻을 분별케 하시고, 순종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언제나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주의 종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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