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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혈육을 입으신 이유 / 히 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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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윤성진 목사 (부산영락교회)
제 목 : 혈육을 입으신 이유
본 문 : 히브리서 2: 11-18


1년 전에 전남 완도군 미라리에 살던 신중길 씨가 1톤도 안되는 양식관리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1급 폭풍주의보가 내려졌습니다. 기상상태가 나빠지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뱃머리를 돌리는 순간에 기관이 고장나면서 표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배는 강한 바람에 밀려내려가고 험한 파도에 배 안에는 물이 반 쯤 차였습니다. 살 소망이 거의 없어 졌습니다. 60대의 신씨는 6일간 파도와 추위와 배고픔과 싸웠습니다.

6일 동안 먹을 것이라곤 출항할 때 싣고 나간 조그마한 물병 두 개와 직접 잡은 삼치 다섯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강한 바람에 제주 마라도 남쪽 65마일까지 떠 내려갔습니다. 탈진상태에서 죽음 직전에 있을 때에 근방을 지나가던 100톤 급 중국 저인망 어선 절영호에 발견되어서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신문에는 현대판 <노인과 바다>라고 기사를 썼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조난 당한 사람을 건져내듯이 죄와 죽음과 지옥과 사탄에 매여있는 우리를 건져내기 위하여, 구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14절에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오신 이유는>이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이어서 나오는데 16절에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8절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혈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느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을 도와주기 위하여>오셨다는 것입니다.


1. 우리를 붙들어 주기 위하여 혈육을 입으셨습니다.

표류하고 있는 죽음 직전의 신중길 씨를 절영호가 도와주기 위해서, 구조하기 위해서 다가갔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고, 도와주고, 구조하기 위하여 혈육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성탄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붙들어주다>라는 말은 아주 특별한 말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로 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한 밤중에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을 아시고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밤 네 시 였습니다. 밤 네 시, 어두울 때에 바다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너무 놀라고 무서워 귀신이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신 것에 너무도 놀라고 신기하여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요청을 하자 예수님은 <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바다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갑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믿음이 약해져서 물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물에 빠져들어 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소리를 지르며 허우적 거렸습니다. 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시며 건져 주셨습니다. 여기의 <붙잡으시며>라는 말과 오늘 본문의 <붙들어 주신다>는 말이 같은 뜻입니다. <붙들어 주신다>는 말은 ‘손으로 붙잡아 준다’는 뜻도 되지만 ‘돕는다’는 말도 되고 또 ‘건져준다’는 말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육체를 입고 오셨는가 하면 물에 빠진 베드로를 붙들어 주셨듯이, 건져 주셨듯이, 도와 주셨듯이 죄악에 빠진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건져 주시기 위하여, 도와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질병에 빠진 우리를 건져 주시기 위하여, 가난에 빠진 우리를 부요케하시기 위하여, 실패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하여,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악의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난을 당한 신중길 씨는 배라도 타고 있었지만 우리 모두는 죄악의 바다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누군가가 와서 붙잡아 건져주지 않으면 죽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죄악의 바다에 빠져서 다 죽게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 자신의 모습이 죄의 바다에 빠져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절망적인 모습이었음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말을 하면 죄된 말을 하고, 생각을 하면 죄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면 죄된 행동을 하게 되어서 이 죄의 결과로 우리는 다 죽음에 매여있고, 사탄에 매여있고, 지옥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우리 모습은 이와같은 절망의 상태였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기쁜 소리는 자기를 건져주기 위해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죄의 바다에 빠져 죽어갈 때에 우리를 붙들어 건져주기 위해서, 도와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내어 놓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날을 <기쁘다 구주 오셨네!>,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기뻐하며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혈육을 입으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붙들어 주기 위해서, 누구를 도와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까?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어떤 존재입니까? 히브리서 1장 14절을 보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를 <부리는 영>이라고 했으니 우리가 천사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천사동원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우리가 오라고 하면 천사들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무엇이든지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우리가 부리는 영이 아닙니다. <부리는 영>은 다른 번역에는 <섬기는 영>인데 내가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리는 영입니다. 우리를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보낸 영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사람이 천사를 오라, 가라하며 부린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천사를 만나면 떨고 두려워 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일꾼들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사탄과 귀신들도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그들도 사실 구원이 필요합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범죄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들도 구주가 필요한 죄지은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천사를 붙들어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천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천사를 도와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을 붙들어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를 붙들어 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구를 붙잡아 주시기 위해서, 누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까?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는가하면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도와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은 육적인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3장 10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헐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에서 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의 의로 정하셨다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마차가지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함께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믿음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예수님이 확실하게 믿어집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며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도 의롭다함을 받았고,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믿음으로 우리도 의롭다함을 받았으니 우리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 예수님이 믿어지면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도와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혈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사를 붙들어 주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에 비하면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으시는 사람들은 붙잡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소수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사람들은 질적(質的)인 면에서 연약한 사람들이요, 수적(數的)인 면에서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건져 주시기 위하여 도와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며 얼마나 찬송해야할 일입니까?
소수의 사람들만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삼고 다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기 원하시는데 원하시는대로 다 구원하지 못하신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든지 모든 인류를, 아담의 자손들을 다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만 구원하여 자녀로 삼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들을 만세 전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정해주시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3.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혈육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18절에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가 받는 시험과 같은 시험을 받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같은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도 잘 아시고 동정심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옛말에 ‘과부사정은 과부가 알고 홀아비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같은 처지가 되어보아야 그 사람의 사정을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사고로 오른 팔을 잃은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힘들어서 두문불출하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절망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가 잘 아는 훌륭한 목사님 한 분을 모셔올테니 만나보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누구와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목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방으로 들어오는 목사님을 본 순간 청년은 깜짝 놀랐습니다. 목사님은 양 팔이 없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양쪽 팔 대신 빈 소매만 펄럭이는 것을 보고 놀란 얼굴을 한 청년에게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보게. 자네는 한 팔만 없지만 나는 두 팔을 다 어릴 때 사고로 잃어버렸다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나는 오히려 두 팔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네. 내가 그런 고통을 겪었으므로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어떻게 도와주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줄 것인가를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네”. 청년은 자신의 불구를 가슴 깊이 이해하는 목사님과 친해지게 되었고 절망에서 벗어 나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끼니 때를 넘긴 군중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저들을 그냥 돌려 보내면 안된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저들이 그냥 가다가 기진하여 쓰러지게 해서는 안된다.>고 염려하시면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그 사건을 통하여 신령한 양식에 대한 말씀을 하시려는 뜻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정을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지으시고, 온 천지를 소유하신 부유한 분이시지만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 태어나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가난이 무엇인가를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이 얼마나 불편하며 가난이 얼마나 어렵다는 사실을 몸소 다 체험을 하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시면서 배고픈 사람의 고통을 친히 체험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너무 시장하셔서 길 가에 있는 무화과 나무의 가지를 들추시며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세상에 이런저런 고통과 설움이 많이 있지만 배고픈 설움보다 더 큰 설움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설움까지, 이런 고통까지 다 당하셨습니다.
가난과 배고픔을 아신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굶주린 백성의 배고픔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필요를 채워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처지를 다 아십니다. 우리의 가난을 아십니다. 우리의 아픔도 아십니다.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해보셨기 때문에 배신의 아픔도 아십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실만큼 죽음의 공포와 고통까지도 다 체험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아십니다. 실수한 베드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용서하고 이해하며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우리들을 붙들어 주시고, 건져 주시고, 도와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은 능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고 오셨지마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처지에 있는 우리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처지를 다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을 믿고 그 앞에 모든 사정을 다 털어 내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능히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처지를 다 아시고 겪으셨지만 도울 힘이 없으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능히 도울 수 있으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일으키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있는 것도 없게 하시는, 천지를 지으실 만큼 전능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건질 수 있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난과 슬픔을 다 아시고 불쌍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주신 것처럼 죄에 빠진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능히 도우실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주님의 능력을 믿고 도움을 받으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질병에 빠진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도우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가난에 빠져 고통하고 있는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탄에 매여있는 우리를 풀어 자유케 해 주시기 위해서, 시험에 빠져있는 우리가 시험에 이기게 하기 위해서,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실망한 자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서, 죽음의 두려움에 빠져있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나쁜 습관에 빠져있는 자를 새 사람 만들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와 꼭 같은 몸을 입고 오셨지만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디든지 예수님의 도움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는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담배 하나도 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 아닙니까? 마약 하나도 마음때로 끊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시면 끊어집니다. 냄새도 맡기 싫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어느 교회의 전단에서 <미국 전 마피아, 마약 조직의 대모 아무개 여전도사 간증>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마피아 조직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입니까? 마약조직의 대모가 마약을 끊고 마약을 하는 사람들의 선교를 위해서 일 한다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어떤 나쁜 습관도 끊고 새사람이 되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5. 혈육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

예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영광의 보좌를 내어 놓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 앞에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내 손을 내어 미는 것입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나를 붙들어 주세요, 나를 건져주세요, 내가 처한 형편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도와 주셔야 됩니다.’ 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들어 가는 베드로를 건져 주셨듯이 내 손을 붙잡아 주옵소서. 나를 도와 주옵소서. 내 가정, 내 직장, 내 자녀를 도와 주시옵소서. 내 연약함을 도와 주셔서 건강케 하여 주시고 내 가난을 도와 주셔서 부요케 해 주시고, 내 못남을 주께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주님의 손을 잡기만 하면, 의지하기만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을 도와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헤롯 왕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백성들은 다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인생이 놀랍게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습니까?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까? 세상사람들의 죄는 다 용서 받는다고 해도 내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고민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바로 그런 죄 가운데 빠진 나를 건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질병 가운데서 고통하고 있습니까? 그 질병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가난에 빠져서 고통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친히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실패와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 있습니까? 이런 처지에 빠져있는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나를 도와주시려고 오신 주님께 손을 내밀고 도움을 요청해 보세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힘으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직도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의 한계상황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개는 자기 목에 걸린 줄이 닿는 한계 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줄의 끝에서는 1센티미터도 더 나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느끼기 전에는 별별 큰 소리를 다 칠 수 있지만, 정말 인간의 막다른 골목, 그 한계상황에 닿게 되면 인간은 지극히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도움을 청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겠다는 간절한 믿음으로 손을 내밀었듯이 그런 믿음으로 주님께 손을 내밀어 보세요.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의 내민 손을 붙들어 주시고, 건져주시고, 도와주셔서 우리가 처해 있는 모든 삶의 문제를 다 해결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를 도와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영접하고 붙들어서 삶의 크고 작은 문제를 다 해결받아서 정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뜨겁게 주님을 예배하며 찬송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왜 혈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지난 주일에는 <우리의 형제가 되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삼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우리에게 선포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리놓아서 우리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오신 주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혈육을 입고오신 이유를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붙들어 주시기 위해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 죽음의 문제, 삶의 문제, 가난의 문제, 질병의 문제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께 손을 내밀어 주님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고 도와 주실 것입니다.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하나님의 도움을 입을 수 있는 이번 성탄절 되어서 다시 한번 주님을 찬송하며 바르게 예배하며 우리를 위해 혈육을 입고 오신 주님을 뜨겁게 경배할 수 있는 영락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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