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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 하나님의 사람아 / 딤전 6: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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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안명환 목사  (부평방주교회)
제 목 : 너 하나님의 사람아 
본 문 : 디모데전서 6:11-19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디모데전서 마지막 부분에는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일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이하에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여기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17절에 '온전'이란 말이 두 번씩 반복되었습니다. 바로 '온전'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선 순위에 있어서 일보다는 사람됨이 먼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하나님의 새 성전을 건축해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만 새로운 성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의 집을 잘 짓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론 성전도 아름답게 잘 지어야 하겠지만 우리의 심령의 전이 더 잘 지어져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최대의 기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11절에 그런 강한 뜻을 담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는 말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오늘 주신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삶에서 직면할 수 있는 도덕적, 교리적인 유혹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고 있는가를 말하면서 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떨어진다,' '빠진다'하는 말은 어떤 잘못된 대상에 완전히 포로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경고하면서 오늘 주신 말씀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욕과 돈에 포로가 되기 쉬운 이 유혹의 세상에서 하나님께만 포로가 되는 삶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소망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아무에게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보아도 하나님만을 중심으로 살았던 선지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너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33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종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의 모습을 소개 하면서 일평생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그에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9장 6절에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을 찾고 있는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과정을 밟아 나가게 됩니다.

열왕기상 17장 24절을 보면 엘리야라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머물고 난 후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다루는데 그 중에 하나가 과부의 아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아들이 죽게 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여인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호소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이 사실을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의 능력과 그의 경건함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 여인이 엘리야 앞에 엎드려 고백한 말이 24절입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고백들입니까?

우리가 우리를 잘 알지 못하고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존경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약점과 허물을 다 아는 가까운 이웃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내 약점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나를 향하여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이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까?
 
1. '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을 살기 원하는 사람마다 경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그릇된 것에 대한 유혹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물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부에 대한 탐닉을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한 가지 더 경고하는 것이 있습니다.
6장 20절을 봅시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여기서는 필요 없는 변론을 피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단에 관한 경고를 많이 했습니다.

이단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변론을 위한 변론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단으로 보는 여호와의 증인이 하는 일을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둘씩 짝을 지어 가지고 다니면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 교회 문패가 붙어 있는 집만 찾아다니면서 "우리, 성경에 대한 이야기 좀 해 보실까요?"하면서 접근합니다.
그리고 변론을 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이론을 뒷받침해주는 성경 구절만 골라서 따로 외우고 다니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그들의 이론에 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토론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토론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도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단순히 신앙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만 성경 공부를 한다면 이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지식에 대한 강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삶을 위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려 다른 데로 향하게 하는 그런 성경 공부, 하나님이 기대 하시는 삶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변론을 우리는 피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유혹의 장소를 피해야 합니다. 마귀가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는 그 덫을 피해야 합니다.
청년 요셉이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피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도망 다니다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이 자기에게 죄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왜 사울왕을 죽지지 못했습니까? 그도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이 나를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면 피해야 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물러서지 말고 싸워야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내 삶이 그르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서도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시편 1편에서도 복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면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2. '좇으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절을 봅시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
여기서 여섯 가지 덕목이 강조되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 여섯 가지 인격의 덕목을 의와 경건,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로 짝을 지어 생각했습니다.
의는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받는 가장 놀라운 축복 가운데 하나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강조된 덕목이 경건입니다.  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한 인격적인 덕목이라면,  경건은 그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삶의 자세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닮아 가는 인격적인 특성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믿음과 사랑입니다.
의가 없이 경건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 사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관계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 할 덕성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실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덕목인 믿음과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갖추고 있는 덕목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짝이 인내와 온유입니다.
이 두 덕목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사건들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인답게 인내하고 있습니까? 인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유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이 온유함을 나타낸다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온유라는 말은 얌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약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거칠고 힘이 센 야생마가 잘 길들여졌을 때 '온유하다'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굉장한 힘을 자제하고 있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내와 온유는 환경에 대하여 요구되는 그리스도인의 덕목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의와 경건을, 자신과 이웃에게는 믿음과 사랑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는 인내와 온유를 좇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내 인격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이웃을 용납하고 용서함으로 주님을 닮아 가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손해본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싸우라'고 했습니다.

무슨 싸움입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 쓴 바울의 마지막 편지가 디모데후서 4장 6절입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기의 인생의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싸운다'는 말은 사단과 또는 죄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마귀와 싸운다는 것이고 죄와 싸운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과 싸운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마귀 짓을 하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자기에게서 가장 큰 마귀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싸움은 다른 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할 때,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의미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18절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부요함을 추구하는 것은 승리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의 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서는 날, 세상에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했고,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싸우라"는 말은 다른 것으로 싸우지 말고, 우리의 인격이 주님 앞에서 어떻게 다듬어져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선하다'는 말은 단순히 '착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선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바꿔도 됩니다.
 
4. '취하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취하라'는 단어는 아주 강한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고하게 붙잡고 누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 영생을 즐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영생을 값없이 받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업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내 소망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 나라에 있습니다"라고 증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고 그것을 감격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생을 누리며 즐기고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봅시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말로는 "내 소망은 저 나라에 있습니다"라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무언가 잡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영생을 누리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내 놓을 수 있는, 그리고 그런 일을 하면서 그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영생을 즐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끝으로,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 명령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왜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까? 주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언제까지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까? 주님 나타나실 때까지입니다. 이 '나타난다'는 말은 새벽에 동녘이 밝아 오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새벽에 여명이 밝아 올 때 주님이 다시 오시고, 새로운 역사의 여명이 밝아 올 때, 하나님 나라의 동이 터 올 때, 주님의 영광스러운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 이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오늘 내가 가장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돈입니까?
정욕입니까?
자존심입니까?
권력입니까?

아무리 몸부림쳐봐도 쥐고 갈 수 없는 돈을 위해서 그것의 노예로 살다가는 우리의 많은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업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이게 될 때,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소망이 진실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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