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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산을 위한 세 가지 질문 /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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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결산을 위한 세 가지 질문
본 문 : 마태복음 25:31∼46
설 교 : 김정석목사 
 

오늘은 2002년도를 사흘 남겨둔 날입니다. 새 해를 맞이한다는 설레이는 마음과 올해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다짐이 있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를 거의 다 보내고 또다시 새해를 준비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화살같이 빠르다, 혹은 물같이 빠르다고 말합니다. 지날 때는 모르다가 돌아보면 무서우리만치 빠른 것이 시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어르신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시간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묻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인생에서 무엇이든지 노력하고 견디면 나아지고 극복할 수 있는데, 아무리 버티고 싸워도 시간은 붙들고 있을 수가 없고,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나이 먹고 힘없이 늙어가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야속하다고 생각해도 기다려주지 않고, 아쉽다고 해서 머물러 주지도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암과 싸워 하나님의 은혜로 병을 극복한 오혜령 씨의 글을 읽어보면 평소에는 생각 없이 지냈던 하루 하루가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더랍니다. 그래서 흐르는 시간을 조금 더 천천히 느끼며 의미를 맛보고 지나고 싶은데 시간은 그렇게 나를 위해 천천히 흘러주지 않아 너무 안타깝더라고 합니다. 한 해를 돌아보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새 해를 시작하면서 기도로 준비하고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잔뜩 품었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그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코 앞에 새 해를 앞두고 있습니다. 아마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어떠한 일들을 지나왔든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주어진 모든 시간을 다 보내고 한 해를 마감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서 있다고 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감한다 하면 우리는 언제나 결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결산이 필요합니다. 결산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새 해를 맞이할 때 우리는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써 출발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산과 평가를 통해 잘된 것은 계속 발전시키고 잘못된 것은 버림으로써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물으시는가를 돌아보며 자신을 진단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비유는 유명한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본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뜻을 따로 설명치 않아도 될만큼 의미가 분명한 비유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사실 우리가 오해하기가 쉬운 비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따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본문에 따르면 마치 천국은 행함으로 평가받고 갈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주님의 의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의 표현으로 우리 주변의 이웃들의 요구에 반응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부인이 좋으면 처갓집 말뚝에다가도 절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의 표현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모아놓은 지식이나 얻어놓은 명예나 쌓아놓은 재산을 표준으로 삼지 않으시고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한 것으로 우리를 결산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을 우선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나누시고 결산을 하시고 계십니다.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팔레스틴의 양은 희고 염소는 검습니다. 그래서 한 눈에 봐도 양과 염소는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한 무리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그 모습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셨는데 오른 편은 영광스러운 자리요, 왼편은 형벌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임금이 묻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인데 그렇다면 한 해를 마감하는 우리도 같은 물음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3가지 질문은 무엇입니까?

(1)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했는가?

양과 염소에게 다른 상황이 주어졌던 것이 아님에 주목해야 합니다. 똑같이 주린 자와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병든 자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둘의 자세가 달랐습니다. 그들의 다른 자세가 다른 결과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다른 결과에 대해 핑계를 댈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도 이러한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많은 일에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자기의 환경이나 여건만을 탓하는 사람을 보게됩니다. "~~였으면" "도와주는 사람 하나라도 있었으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누구에게든지 기회는 온다고 합니다. 문제는 기회를 잘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들어 잘 활용하느냐 못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흔히 운이 좋았다고 표현들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은 다릅니다. 주어진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열매를 거두게 되더라는 것이 공통의 고백입니다. 기회라는 놈은 뒷대머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잡지 못하고 지나가면 미끄러워서 뒤에서는 잡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혹시 내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오늘 이 마지막 주일까지 핑계대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엇이 없어서...나만 유독히 힘들어서...'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더 큰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공평하게 365일 이란 시간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동일한 상황에서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행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의 시간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chronos 인데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듯 시계가 지나감으로 사라지는 시간의 개념입니다. 다른 하나는 kairos 인데 그것은 일의 질에 따라 측정되는 시간 개념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 우리가 백년을 살았다고 해도 의미있는 삶을 한 번도 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의 나이는 1살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루가 24시간 주어졌는데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며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면 24시간 산 것이지만 무의미한 것에 나의 시간을 허비했다면 하루를 살아도 계산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따라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느낌이나 자세가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시간의 구체적인 경험을 하는 경우의 예를 든다면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반공교육을 받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80년대 강의라야 일반적으로 북한의 참상을 강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50분 강의를 듣는데 너무 지루했습니다. 왜 그리 시간이 가지 않는지. 두 번째도 강의였는데 역시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3번째 시간은 북한의 행사를 보여주는 영화상영이었습니다. 외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한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빨리 지나는지 똑같은 50분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같은 50분의 시간인데 길이의 느낌이 전혀 다른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 중에 성서의 말씀을 빌어서 천 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고 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몇 년을 살았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주님이 원하시는 시간을 만들고 지나왔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나의 한 해를 kairos의 시간으로 묻기를 바랍니다. 과연 내가 올 해를 주님께서 주셨는데 의미있는 시간들로 최선을 다해 만들었는가 묻기를 바랍니다.


(2)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감당했는가?

주변에 목마른 자, 주린 자, 헐벗은 자...들이 있다는 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들을 돌보라고 부여하신 사명이요, 책임인 것입니다. 염소가 책망받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냥 바라보고 들으라고 주변의 고통받는 이웃이 있고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들어야 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눅 10:36에 보면 "네가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던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눅 10:37) 그 때 주님은 답이 맞았다고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은 구경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하라고 하시는 사명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염소는 그것을 하지 않았고, 양은 그것을 감당했습니다.

투르의 말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로마 군인이요, 크리스챤입니다. 어느 추운 날 거지가 구제를 요청했습니다. 말틴은 주머니에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는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말틴은 자기가 입은 헌 외투를 벗어 반을 찢어 그 거지의 등을 가리어 주었습니다. 그 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헌 외투 반 조각을 두르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물었습니다. "누가 그것을 예수님께 드렸나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종 말틴이 내게 준 것이니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통로를 통하여 내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모습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살아가는 주변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시는 것들이 거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 해를 돌아보며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책임을 다했는가? 아니면 나는 구경꾼이 되지는 않았는가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새해를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드는 다짐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3)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지 않았는가?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을 보면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은 지식이 모자라거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그의 그러한 부정적인 모습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일이 안되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만 집착을 하게됩니다. 그러다 보니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언제나 포기하게 되고 주변이나 환경을 원망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향상이나 열매라는 것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능하다고 소문난 사냥꾼이 겨울에 토끼사냥을 나갔는데 빈 손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오늘 사냥은 빈 손이네요?" 그러자 대답하기를 "겨울에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워낙 귀가 밝아 조금만 가까이 가도 도망가버리고, 뒷다리가 길어서 도망치는데는 당할 자가 없구요, 색깔이 주변의 색과 비슷해서 발견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자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한 신사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토끼를 잡으러 나갔나요? 아마도 당신은 겨울 내내 토끼를 결코 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토끼를 못 잡는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 어디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의지나 신념이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 어느 일도 할 수가 없지요" 맞습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은 창조력이 없고, 늘 불평과 불만이 있기 마련입니다. 본문의 염소가 그런 사람입니다.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바라보면서도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긍정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만들어서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가능성과 소망을 주실 뿐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아도 꿈을 주셨지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을 덥썩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러한 사람은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시도하고 노력해보게 됩니다. 바로 그 때에 놀라운 열매와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목회할 때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목회하던 곳은 아주 작고 한적한 읍이었습니다. 대개의 농촌교회가 그러하듯이 청소년과 청년들이 숫적으로 빈약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소망이 있기에 전심으로 그들을 위한 목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어서 가을 행사를 준비하며 전도사님과 교사들, 그리고 임원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개 가을이면 교회마다 문학의 밤을 하는데 저희교회도 첫 회 문학의 밤을 위한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나 형식이나 스타일이 비슷했습니다. 회의를 하면서 우리는 좀 색다른 그러면서도 거대한 축제를 마련해 진행해 보자는 의견으로 방향이 모아졌습니다. 이름도 "Jestival"(Jesus+Festival)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교회가 있는 읍에서는 무리였습니다. 규모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도저히 힘들 것 같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 번 도전해 보자고 의견들이 모아졌습니다. 특히 시골지역에 사는 젊은 층에 복음을 매개로 해서 문화적인 것을 맛 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전도사님과 교사들, 그리고 모든 임원과 회원들이 하나가 되어 뛰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어르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녹음하고, 수준높은 연극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리고, '장터에 난리났네'라는 연극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교회의 내부와 외부를 장식하고, 삐에로 복장을 손수 만들어 교회 앞에서 홍보하고, 길거리 나무에도, 오르내리는 계단에도 홍보지를 붙여서 온통 읍 전체가 Jestival의 홍보로 장식이 되었습니다. 나무에도 예쁘게 장식을 해서 매달아 홍보를 했습니다. 너무나 힘이 들고 버거움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전도사님과 교사들은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갖고 쉬지 않고 뛰었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교회는 읍내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일부러 거기까지 걸어오기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실 동원에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땀으로 준비한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교회에 수 백명이 모여 정말로 예수님 안에서 축제를 누렸습니다. 저는 그 때 함께 했던 교사들과 전도사님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 이루어 낸 기적이었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내게 주어진 상황을 바라보며 정말로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지는 않았는가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서서 세 가지 물음을 통해 한 해를 정리하시고 주님과의 결산을 통해 새 해를 분명한 다짐 가운데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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