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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있는 사람 /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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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복있는 사람
본 문 : 시 1: 1-6
설 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시편 1편 1절에서 6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복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절을 보면 복있는 사람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직접적으로 누구를 가리켜서 복있는 사람이라고 했을까? 물론 본문에는 이런 경우의 사람, 저런 경우의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누구라는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가리켜서 말씀하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1편부터 41편까지가 전부 다윗의 시입니다. 그 중에서 다른 시편을 보면 전부 '다윗의 시'라는 것을 밝혔지만 1편과 2편에는 그것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밝히지 않은 이유는 41편까지가 그 서론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복있는 사람은 다윗을 가리켜서 한 말씀이라 생각해도 좋겠습니다.

  구약에서 믿음 생활을 하고 제일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 다윗이기 까닭입니다. 그가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가정의 막내였었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삼상 18:23). 그런 다윗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잘 되지 않았습니까? 신약에서는 예수를 믿고 잘 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 믿고 저렇게 잘 된 것은 순전히 믿음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예수 덕분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몇 마리를 잡는 것으로 울고 웃던 그가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보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서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앞장을 서는 사람 (1-2)

  '앞서가다'와 '앞장을 서다'라는 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말은 쉬운 것 같지만 어렵습니다. '앞서가다' '앞장서다'라는 말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세 부류로 나누어 보면 첫째로 앞서 가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무슨 일을 시키든지 항상 앞서 갔습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일을 할 때 앞서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따라와 주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앞서 가는 제자들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따라와 주는 제자들은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로부터 여덟 명의 제자들입니다. 교인들 중에도 따라와 주는 이들도 있습니다. 셋째는 아예 뒤쳐져서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는 가룟 유다입니다. 역시 교인들 중에는 이런 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앞서가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에서도 가장 앞서 가는 사람 즉 '앞장을 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서 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 앞에 가는 사람을 '앞장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앞에 가는 앞장서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믿고 항상 앞장서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2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좇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절대로 악인이라면 그 곁에도 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서 죄인을 따라 가면 뭐가 되겠습니까?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놈이 도적질하러 갈 때 도둑놈의 길에서 도둑놈을 따라가면 결국은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죄인의 길을 가는 것은 고사하고 서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 하였습니다. 오만한 자들이 둘러앉아 있는 자리에 가서 섞여 앉아 보십시오. 처음에는 '아닌데 아닌데'라고 하다가도 나중에는 오만해 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이상의 세 가지는 다 망할 짓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고, 죄인에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으면 망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망할 짓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 나라 국회에서 제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법을 만들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것은 하지 말라, 저것은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의 법은 누구도 간섭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홀로 제정해 놓으신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 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즐겁지 않은데 그 법을 즐거워할 수 없고, 그 법이 즐거운데 하나님이 즐겁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 즉 다윗은 하나님을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는 법을 그렇게 즐거워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법을 늘 묵상하다보니 결국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생활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이 자리잡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다윗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해야 되는 일은 곧 죽어도 했습니다. 그 당시 다윗은 믿음 생활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앞장서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모범적이었습니다. 그렇기 까닭에 안 할 것은 죽어도 안하고 할 것은 죽어도 하는 사람 즉 모든 믿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앞장을 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믿음 생활을 하고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생활에 앞장을 섰기 때문입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는 장대재라고 하는 작은 위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몇 년 전에 평양에 가 보았습니다. 장대재라고 해서 큰 언덕인줄 알았는데 그것을 깎아서 뭉개버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언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장대현 교회당은 참으로 크기도 하였고 사람도 많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 조만식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애국자로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그 분은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신 분이기도 합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하게 되었을 때 경상남도 마산 문창교회 목사로 시무하는 주기철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주기철 목사는 조만식 장로께서 오산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 그 학교의 졸업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조만식 장로는 자기의 제자를 목사로 모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보통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번은 주일날 예배 중에 설교를 시작했는데 조만식 장로가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날 계속해서 손님들이 찾아오는데 박절하게 돌려보낼 수만은 없어서 조금 늦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보았냐고 따지실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책에서 본 이야기가 아니라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배 시간에 늦게 들어오는 조만식 장로를 본 주기철 목사는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장로가 왜 예배 시간에 늦습니까? 예배가 끝날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서 계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가만히 서 있겠습니까? 망신을 시켰다 생각하고 '누가 견디나 두고 보자'라고 하면서 뒤돌아 나갔을 것입니다. 조만식 장로는 끝까지 그 자리에 서서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교인들이 예배 시간에 늦었을 것 같습니까? 늦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늦지 않았습니다. 예배시간에 늦은 것이 자기의 잘못인 줄 알고 "목사님 미안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주목사도 조장로에게 "장로님 참 미안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장로님께서 "미안해 할 것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질서를 잡는데 조장로님이 앞장을 서 준 것입니다. "그렇게 야단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돌아가 버렸으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조만식 장로는 교회를 위해서 앞장을 서준 사람입니다. 정말 복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교인들에게 앞장을 서서 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유익을 주는 사람 (3-)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을 보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곳에 큰 시내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시내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시내입니다. 그런데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라고 하였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니까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난 나무입니까? 척박한 땅에 있던 나무를 옮겨 심은 나무입니까? 옮겨 심은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키고 옮겨 심은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윗을 가리켰다고 해도 좋습니다. 다윗의 "시"이기 까닭입니다. 나무가 척박한 땅에서 싹이 나고 자랄 때 그 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무 자체가 너무 좋아서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큰 냇가 즉 물이 끊어지지 않는 냇가에 심었습니다.
  다윗은 스스로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비천한 자리에서 왕궁에 옮겨 심으셨다는 말입니다. 왕의 자리가 얼마나 좋은 자리요, 하나님이 잡아 주신 귀한 자리입니까? 나무가 스스로 옮겨 심기지는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옮겨 심듯이 하나님이 옮겨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그 나무가 무럭 무럭 자라서 열매를 맺는데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매를 한 번 밖에 못 맺지만 더운 지방에서는 철을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를 따기만 하면 그 다음에 이어서 꽃을 피우고 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일년에도 두세 번을 맺게 됩니다. 무슨 열매 나무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열매를 시절을 따라서 맺었습니다. 나무가 '내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오고 가는 짐승들에게 먹이로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주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열매를 맺습니까?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나무로서 제구실만 열심히 한 것입니다. 나무가 열심히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가 되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시절을 따라서 열매맺어 오고 가는 짐승들을 전부 먹게 하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다윗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통해 얼마나 유익을 주었습니까? 그래서 '복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차라리 내가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손해가 될지라도, 밑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유익을 주는 복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은 내가 손해보는 것 같아도, 밑지는 것 같아도 너를 유익하게 하면 결국은 그 복이 나에게 돌아오는 복있는 사람이 됩니다.

  헤르만 헷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곳에서 한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 아기의 이름을 어거스투스라고 지었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찾아와서 아기 어머니에게 "소원을 한 가지만 이야기 해 보라. 꼭 한가지만 들어 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투스 어머니가 "이 아기가 자라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는 곳마다 미움을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랑을 받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어거스투스는 어릴 때부터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젊은이가 되어서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제법 들면서도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너도 나도 사랑을 해주니까 내가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 사람이 변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만하게 놀고 도도하게 놀고 아니꼽게 놀았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의 곁에 있으려고 하겠습니까? 전부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나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교만한 사람을 누가 좋아합니까? 교만한 사람을 우리는 봐 주지 못하고 버리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완전히 왕따가 되었습니다. 따돌림을 받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쯤 되면 미칠 지경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머리를 싸고 누웠습니다. 그 때 어머니를 찾았던 그 할아버지가 어거스투스를 찾아와서 "자네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으니 말해 보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투스는 어머니가 소원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대답을 합니다. "할아버지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어주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자꾸 받으려고만 했습니다. 나눠 줄 줄을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소원이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투스는 자기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져 사랑을 나누어주다 보니 이제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그를 떠났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돌아왔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정말 재미있고 살만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혜택을 주고 유익을 주었기 까닭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랑을 받아야합니다. 미움을 받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받으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남에게 베풀고 주고 사랑을 나누고 유익을 주는 사람이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받으려고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납니다. 나는 버림을 받습니다. 너에게 주고 나누고 베풀고 유익을 주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얼마나 보람있는 삶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행 20:35). 유익을 주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들 많이 버십시오. 잘 되십시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뒤를 봐 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으로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인정을 받은 사람 (4-6)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6절을 보면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면 더 좋고 못 받는 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는 반드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부부가 재미있게 살아갑니다. 동네 사람들이 "저 집의 아내는 참으로 멋지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정을 받아 나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편은 "내 아내가 그렇게 좋으냐? 네가 일년만 데리고 살아보라"하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이쯤 되면 행복합니까? 불행합니까? 동네 사람들은 아무개 아내가 굉장하다고 칭찬이 대단하지만 남편은 왜 네가 데리고 살아 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아내가 얼마나 불행합니까? 이번에는 그 반대로 동네사람들이 "아무개 집 남편은 법 없이도 살 정도로 훌륭하다"라고 하면서 칭찬을 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같이 사는 아내가 볼 때는 "아니올시다"라고 합니다. 누구가 칭찬을 하면 "네가 몽땅 다 가지라"고 합니다. 아내에게 인정을 못 받는 남편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남편에게도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아내에게도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동네 사람에게 인정을 못 받을지언정 아내에게 인정을 받고, 남편에게 인정을 받아야 행복한 부부가 아니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다윗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살아가는 인생 길을 하나님은 인정하셨다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진정한 성군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은 복된 사람입니다.

  어느 나라에 한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 임금에게는 아들도 없고 딸만 있는데 형제도 아니요, 외동딸이었습니다. 그 딸이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지 모릅니다. 이제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주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열이 펄펄 끓고 헛소리를 하는데 어느 누구도 고치지를 못합니다. 무슨 약을 써도 소용이 없고 어떤 의사를 불러도 전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공주의 병을 고쳐 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는다'라는 방을 도성 곳곳에 붙였습니다.
  한 곳에 삼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맏형이 망원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망원경으로 보니 그런 방이 사방에 붙여 있기에 동생들을 불러 놓고 이런 방이 붙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둘째는 양탄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탄자에 올라타면 비행기가 날아가듯이 날아갑니다. 너무 급해서 삼형제가 올라타고 삽시간에 왕궁으로 날아갔습니다. 막내는 만병통치약이 되는 사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주가 있는 곳에 도착한 후 공주에게 그 사과를 먹였더니 잠자다가 일어나는 사람처럼 일어났습니다. 삼형제 중에 누구에게 공주를 줄 것인가에 대해 왕이 판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즉 왕에게 인정을 받아야합니다. 자기들끼리 저마다 공로를 주장했습니다. 첫째는 "내가 망원경으로 보았기에 방이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지 망원경으로 보지 못했다면 너희들이 무엇을 또 어떻게 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형님이 망원경으로 보았지만 촌각을 다투는 마당에 우리가 걸어오려면 몇 일씩 걸려야 하는데 나의 양탄자가 있기에 그것을 타고 삽시간에 날아왔으니 고칠 수 있었지요"라고 공로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자 막내가 "우리가 날아왔으면 무엇을 합니까? 만병통치약인 사과를 먹였으니 공주의 병이 나았지요"라고 역시 공로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자 둘째가 "사과가 있다고 해도 날아오지 못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라고 하면서 싸웠습니다.
  그 때 임금이 판정을 합니다. 맏이에게 "망원경을 가진 자네는 내 공주를 고친 다음에도 망원경을 그대로 가지고 있나? 없어졌나?" "여기에 있습니다" 그 때 임금이 "그러면 공주를 위해서 손해 본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둘째에게 "자네 양탄자가 아직도 남아 있는가? 없어졌는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 갈 때 타고 갈 것입니다" "그럼 자네도 형과 마찬가지일세"라고 판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막내에게 "자네는 내 딸을 고쳤는데 고친 다음에 그 사과가 남아 있나? 없어졌나?" "없습니다" "그러면 자네 공로가 제일 큰 걸세. 다른 사람들은 다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손해 본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자네는 전부 공주를 위해서 희생했으니 진정으로 자네가 공주를 살렸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이처럼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윗처럼 인정받아야 하겠습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 인정받는다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첫째로 앞장서서 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믿음 생활에도, 봉사에도, 전도에도, 기도에도 무슨 일에나 앞장서는 복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유익을 주는 사람입니다. 받으려고만 하지말고 베풀고 나누고 섬기고 유익을 주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면 좋고 인정을 못 받을지라도 만왕의 왕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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