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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써 여호와를 알자 / 호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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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힘써 여호와를 알자 (1/05)
본 문 : 호 6:3
설 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우리 교단 총회장을 지내셨고, 교계 원로이신 유호준 목사님에 관한 일화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일찍이 조실부모하시고 이모님 슬하에서 자라셨습니다. 신앙이 남다르셨던 이모님의 기도와 배려로 신학교에 가게 됐고, 목사가 되어 열심히 목회를 하시게 됐습니다. 이모님께서 연로하셔서 세상을 떠나시게 됐는데, 임종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유목사님께 이렇게 유언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목사님! 예수 잘 믿으십시오. 예수 잘 믿으셔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당부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목사에게 예수를 잘 믿으라니요... 목사는 예수 믿는 일이 직업이고, 예수 믿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유호준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는 목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킨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목양일념으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목회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목사님에게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은 어폐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모님이라는 분은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너무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계십니다. 나름대로 목회에 최선을 다하는 목사도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크게 성공했더라도 그 목사 자신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 목사뿐이겠습니까? 한평생 장로로 헌신적으로 교회 봉사를 하면서도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권사로 안수집사로 교회에 충성을 다한 사람들도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오늘 본문 호 6:1을 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호세아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외친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인들, 여호와를 섬기다가 배반하여 세상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여호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섬긴다고 자부하고 있는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 것입니다. 저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날마다 정한 시간에 성전에 와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리고, 정해진 제사를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여호와를 멀리 너무도 멀리 떠나 있습니다. 비록 저들이 몸은 성전에 와 있으나 그 마음은 너무도 멀리 가 있습니다. 비록 저들이 율법을 암송하고 입술로는 아멘하고 있지만 그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간곡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교회생활하면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학생들의 대답이 엇갈렸습니다. 믿음을 얻을 수 있다는 학생도 있고, 믿음을 얻을 수 없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엡 2: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분명히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믿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롬 10: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분명히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들음이라는 인간적인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적인 노력으로 믿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이 둘은 상반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상호보완적인 말씀입니다. 여기에 믿음의 독특한 성격이 있습니다.

  미국의 교육신학자 토마스 그룸이라는 분은 믿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본질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의 형식적인 측면입니다.

  믿음의 본질적인 측면이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철저히 헌신하는 하나님과 한 개인 사인이의 영적인 만남과 관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제 3자가 개입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정말 사적이고 은밀한 부분입니다.

  이에 비해 믿음의 형식적인 측면이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삶의 터전에서 신앙인으로 그가 드러내는 생각, 말, 행동을 말합니다. 하나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문화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제 3자에 의해 평가될 수 있고, 또한 훈련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믿음은 이 두 측면이 씨줄과 날줄로 잘 짜여진 옷감처럼 잘 어우러질 때 온전해 질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적인 측면은 강한데 형식적인 측면이 약하면 하나를 이루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반면에 믿음의 형식적인 측면은 강한데 본질적인 측면이 약하면 그 신앙생활에 힘이 없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했던 것은 이 그룸이라는 분의 견해를 빌어서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의 형식적인 면은 철저하고 강했는데 비해서 믿음의 본질적인 면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종교 전통과 관습에 치중하다가 신앙의 형식적인 면만 강조되었고, 정작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만남이 부실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이 본질은 간데 없고 빈 껍데기만 남는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본문을 보면 호세아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알자”라는 말의 뜻입니다. 히브리어 동사로 [d"y:(yada)라는 말의 뜻은 “보아서 확인하여 안다”입니다.

  이스라엘에 성지 순례를 갔을 때, 안내를 해 주던 가이드 분이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의 아내를 압니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야다’라는 동사로 표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뺨을 맞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를 안다고 하면 오래 관계를 맺어서 서로 깊은 정이 든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당신 아내를 안다고 하면 서로 정을 통한 관계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뺨을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히브리어로 누구를 안다고 하면 직접 그 사람을 만나보고 사귀어 보고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 여호와를 직접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호와와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에 관해서 직접 만나고 사귀어 본 체험을 토대로 무엇인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여호와를 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 오해를 합니다. 책을 통해서 읽고, 성경공부를 통해서 배우고 나서 여호와를 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학자들이 여호와에 관해서 가장 많이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여호와에 관해서 객관적인 지식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분이 선을 보기 위해 중매쟁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적당한 사람이라고 중매쟁이가 한 사람을 천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준비해서 건네주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 사람에 관한 정보를 공부했습니다. 신체적인 조건이 어떻고, 공부는 어떻게 했고, 가정 배경은 어떻고, 꿈은 무엇이고, 취미는 무엇이고... 그 나름대로 어떤 사람일거다 머리 속에 그려봅니다. 그런데 이 정보만 가지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개를 받아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좋은 느낌이 있어서 계속 만났습니다. 점점 그 사람에 대한 보다 정확한 그림이 그려집니다. 마음에 확신이 듭니다. 결혼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고, 신학공부를 해서 하나님에 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들은 마치 중매쟁이가 가져다 준 정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일 뿐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고 할 때 그 지식은 자기가 직접 만나서 사귀어 보고 알게 된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관계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지식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성경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모두가 여호와에 관한 관계적인 지식,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윗은 한 평생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체험적으로 관계적으로 주님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시 23편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자기가 여호와를 만났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지내보니까 그분은 마치 목자와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펴보니까 이런 여호와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더란 말입니다. 대제사장도 랍비들도 장로들도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두가 이런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알자고 외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지식을 갖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강조했습니다.

  ‘힘써’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d"r:(radaph)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끝까지 추적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냥을 해 본 분들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사냥감을 추적한다는 것을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맹수의 제왕이라는 사자도 사냥감을 추적할 때 25% 밖에 성공하지 못한답니다. 사냥감에게 쉽게 들키거나 사냥감을 잡기도 전에 사냥감이 도망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냥꾼들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 성품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집중력입니다. 사냥감을 포착했으면 한 눈을 팔면 안됩니다. 끝까지 그 사냥감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내력입니다. 사냥감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려면 이런 성품이 필요합니다.

  우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저것에 한 눈 팔다가 시간 날 때 가끔씩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해 가지고는 여호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집중해서 응시하듯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나아갈 때 여호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일에 실패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집중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세상일에 몰두하다가 여호와를 잃어버립니다. 또 많은 경우 닥쳐오는 환란과 풍파에 정신 팔다가 여호와를 잃어버립니다. 또 많은 경우 마르다처럼 주를 위해 봉사하다가 거기에 몰두하여 여호와를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대한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인내력이 필요합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다가 지치고 포기해 가지고는 여호와를 알 수 없습니다. 사냥꾼이 사냥할 기회가 올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응답이 임할 때까지 기다릴 때 여호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일에 실패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인내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작심 삼일 때문에 여호와를 잃어버립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여호와를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대한 인내력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힘써 여호와를 알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여호와를 알기 위해서는 안내가 필요합니다. 어떤 지역을 여행할 때 지도가 필요하듯이 여호와를 알기 위해서는 지침서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 지침서가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단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저들은 저마다 여호와를 잘 안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들이 옳고 우리 기성 기독교인들이 잘못 됐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잘못된 것은 지침서의 안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저들은 저마다 성경 외에 다른 지침서들을 나름대로 만들어서 그것대로 교인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길을 잃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자기 나름대로 묵상하고, 연구해서 여호와를 알고자 한다면 백 번 실패합니다. 아니 여호와 아닌 다른 우상을 여호와로 알고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여호와께로 안내하는 지침서인 성경을 잘 배워서 성경이 제시하는 여호와께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말씀’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로고스(lovgo")입니다. 이것은 대체로 선포된 말씀, 제시된 말씀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다른 하나는 레마(rJh'ma)입니다. 이것은 대체로 내게 주신 말씀, 깨달은 말씀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읽은 전체의 말씀을 로고스라고 한다면 그 중에 내 마음에 부딪혀 큰 깨달음을 준 말씀이 바로 레마입니다.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내 귀로 들은 전체가 로고스라고 한다면 그 중에 내게 깨달음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이 바로 레마입니다.

  바로 이 레마의 말씀이 주님께서 내게 개인적으로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레마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보다 더 잘 여호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셋째, 말씀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그대로 삶 속에서 순종하여 실천해야 합니다. 그 때 그 말씀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분이시라는 것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창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기사가 나옵니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니라” 말씀이 실제로 역사하여 구체적인 열매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대로 생활화했더니 말씀 그대로 내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금년 표어로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정했습니다. 온 교우들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머무르지 말고 보다 살아있고 체험적이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에로 나아가지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를 제대로 잘 믿어보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말씀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생활화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시 119편 말씀처럼 주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이 더욱 소성케 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게 하소서.
      말씀을 배우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생활화하는 일에 힘쓰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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