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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을 따라 / 왕하 22: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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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을 따라
본 문 : 열왕기하 22 : 1 - 2
설 교 : 강구원 목사  (고려 갈보리교회)


다윗이 70년 동안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은 사울 시대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침내 법궤가 예루살렘 다윗 성에 안치된 후에 여호와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그것은 ①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겠다는 것입니다(삼하 7:8). ②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삼하 7:9). ③ 다윗의 이름을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존귀케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삼하 7:9). ④ 다윗의 몸에서 날 자식을 다윗의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겠다고 했습니다(삼하 7:12). ⑤ 사울같이 은총을 빼앗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삼하 7:15). ⑥ 다윗의 집과 그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하고 다윗의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했습니다(삼하 7:16).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다윗은 언제나 오고 오는 군왕들의 잣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5장 3절에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15장 11절에 『아사가 그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22장 43절에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에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열왕기하 22장 2절에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유다 제16대 왕인 요시야는 부왕(父王) 아몬이 시해당했기 때문에 팔 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BC 640∼609까지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이 시기는 앗수르가 쇠퇴하고 신흥국가 바벨론 제국이 부상하던 시기입니다. 남 왕국 유다의 왕들은 모두 20명이었는데 그 중에 선왕(善王)들은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 이렇게 8명이었습니다. 이 8명 가운데서도 다윗의 모든 길로 행했다는 이 영광스러운 평가는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walked in all the way of his father David)’로 행하는 왕만이 하나님 앞에서 선왕의 이름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모든 길(in all the way)은 명사로 쓰일 때 방법, 수단, 방면, 분야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모든 길은 어떤 것입니까?

Ⅰ. 다윗이 가진 하나님 절대 주권 사상 입니다(하나님 중심).

역대상 29장 11절에『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다윗 왕은 모든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시편 115편 3절에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교도들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을 때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 절대 주권 사상은

1)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통치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시편 2편 1-4절에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닙니다. 이 웃음은 심판과 조롱의 웃음입니다. 영광스러운 지존자와 대적한다는 것은 허사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사탄의 왕국이 난공불락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비열한 것이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말했습니다.
시편 33편 11절에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지의 영원성과 하나님의 의지 적용의 불변성과 하나님의 의지적용의 결과 성취의 충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진 하나님의 절대 주권 신앙은 그가 어렸을 때 단신의 몸으로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벌인 일전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2)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6절에『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말하기를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다고 했습니다(삼상 17:32).

3) 임마누엘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7절에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4) 신행일치의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했습니다. 엘라 골짜기의 승리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역사하신 영광의 사건입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은 완전 무장을 한 상태였으나 다윗은 평상복에 물매돌 다섯 개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상대가 안 되는 일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사람들의 예측과는 반대였습니다. 다윗의 물매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고 골리앗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삼상 17:50).
다윗은 골리앗의 칼집에서 칼을 빼어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다윗의 손에는 어느새 골리앗의 목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5) 겸손한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상 24장 11절에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찌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자기가 선택한 군사 삼천을 데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아 들염소 바위로 갈 때 길가 양의 우리에 굴이 있었는데 사울 왕은 그 발을 가리우기 위하여 굴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 굴속 깊은 곳에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진치고 있었습니다(삼상 24:3). 이때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의 옷자락을 베고 다시 마음이 찔렸다고 했습니다(삼상 24:5). 그후에 다윗이 굴속에서 나와 사울이 가는 뒤에서 사울을 소리쳐 부르고 그 뒤에서 절하면서 자신은 절대로 왕을 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고백적인 심정을 토했습니다(삼상 24:8-15). 이후에 사울과 그의 군대장관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습니다. 사울과 그의 군대장관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본 아비새가 사울을 치려고 하자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된다고 만류하고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사무엘상 26장 9절에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건너편 산에 올라가서 왕을 호위하지 못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책망했습니다(삼상 26:6).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결정적인 기회를 두 번씩이나 얻고도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더우기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대하는 다윗의 겸손한 신앙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의 신앙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6) 긍휼이 여기는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무엘하 9장 1절에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하 9장 3절에는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생각하는 다윗의 마음은 그의 혈손을 찾아 은총을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숨죽이고 살아가는 두 다리가 절뚝발이가 된 요나단의 아들이자 사울왕의 손자가 되는 므비보셋을 찾아 데리고 왔습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을 할 때 다윗은 만감이 교차되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9장 7-8절에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Ⅱ. 다윗이 가진 절대 하나님 말씀 중심 의 삶입니다(성경중심).

다윗은 그가 가진 계시의존 사색(啓示依存 思索)만이 그의 삶의 궤도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들어야 할 처지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윗 자신이 말하는 처지가 아니고 항상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는 것이 결과에 관계없이 모든 일의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반드시 물리적인 제재가 동반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이 평생에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선견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대상 29:29).

1) 선견자 사무엘과의 관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일곱 아들을 사무엘 앞에 지나가게 했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택하지 아니했습니다. 들에서 양 치던 말째 아들을 데리고 왔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했습니다(삼상 16:12).
사무엘상 16장 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절대 계시에 의하여 역사 무대에 등장되었습니다.

2) 나단 선지자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절에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잉태시켰습니다(삼하 11:4-5). 그리고 변방에 있는 우리아를 소환시켜 이미 잉태한 그의 아내와 동침시켜 자신의 범죄 사실을 숨겨 보려고 했으나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가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이 그를 불러 집으로 가지 아니한 이유를 물을 때 우리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있고 왕의 신복들이 바깥들에 진치고 있는데 자기 혼자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처와 같이 동침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결단코 할 수 없다고 그의 충정을 고백했습니다(삼하 11:11).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장세워 전사하게 했습니다. 우리아의 장사를 마치고 다윗은 밧세바를 궁으로 데리고 왔습니다(삼하 11:27). 이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악행을 책망하니 다윗이 나단의 말을 듣고 나단에게 말하기를 내가 범죄했다고 고백했습니다(삼하 12:13).
시편 51편 1-4절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선지자 나단의 말을 듣고 통회자복하는 고백입니다(시편 51:1-19).

3) 선견자 갓과의 관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24장 11-12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시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고 했습니다(삼하 24:1).

역대상 21장 1절에는 사단이 다윗을 격동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성경이 상호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단도 부리시기 때문입니다(욥 1:12; 삼상 26:19).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시고자 다윗의 의식 속에 있던 악한 의도를 허용하셨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군대를 의지하는 인본주의 발상이었습니다.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후에 하나님 앞에 자책하고 범죄했다고 고백했습니다(삼하 24:10). 이때 선견자 갓이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다윗에게 와서 다윗의 범죄에 대해 세 가지 벌을 제시하고 그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생각하기를 칠 년 기근과 석 달 동안 적에게 쫓기는 것보다는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원하여 그는 온역을 선택했습니다.
이 때 온역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칠 만이나 죽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재앙을 멈추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에게 명하여 재앙을 멈추게 하시고 다윗의 회개를 받아주셨습니다.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갓에게 명하여 다윗에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응답하셨습니다.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허용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복제 인간의 출현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문화적 욕구, 정치적 욕구,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의 삶은 선한 일에 더욱 겸손하고 연약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책망 받는 것의 한계를 가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은 순종의 차원을 넘어서 철저히 자신이 그 말씀의 지배 하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을 수 있었고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잠언 1장 23절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고 했습니다.
잠언 6장 23절에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12장 1절에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잠언 13장 1절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잠언 13장 24절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잠언 29장 1절에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잠 12:1).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잠 13:1).
잠언 12장 15절에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는 분을 당장에 내지만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다고 했습니다(잠 12:16). 하나님의 징계와 훈계는 현대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자는 신권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신권이 무너지면 부권도 무너지고 부권이 무너지면 무질서와 혼돈이 오게 되고 그 다음 순서는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Ⅲ. 다윗이 가진 성전 중심의 삶입니다 (교회중심).

다윗은 성전 중심의 통치이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법궤를 찾아 안치하는데 있었습니다.
역대상 13장 3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자…}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B.C. 1085년 엘리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 중에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돌아온 후 70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법궤를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모셔와서 안치시켰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장막을 쳤습니다(대상 15:1).

2)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데 있었습니다.
역대상 22장 5절에 {다윗이 가로되 내 아들 솔로몬이 어리고 연약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전은 극히 장려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역대상 22장 8절에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대상 29:1). 따라서 그는 성전 건축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준비했습니다(대상 29:2-5).

3)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데 있습니다.
역대상 29장 3절에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69편 9절에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고 한 말은 다윗이 시온산에 성막을 세우고(삼하 6:12-19), 언약궤를 옮겨 온 것을 말합니다(삼하 7:2). 무엇보다도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많은 재료들을 준비하고 명한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대상 28:11-18).

이 말씀은 신약에 예수님께서 성전 청결 운동을 하실 때 인용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장 17절에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했습니다.

4) 성전 건축을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승계하는데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방백들을 명하여 성전 건축의 대명을 받은 솔로몬을 도우라고 했습니다(대상 22:17).
역대상 28장 5-6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여러 아들을 주시고 그 모든 아들 중에서 내 아들 솔로몬을 택하사 여호와의 나라 위에 앉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려 하실쌔 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전을 건축하고 내 여러 뜰을 만들리니 이는 내가 저를 택하여 내 아들을 삼고 나는 그 아비가 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역대상 29장 19절에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예비한 것으로 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을 가리켜 열왕기상 15장 5절에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5장 32-33절에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 모든 일을 다 행했느냐?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실수가 많았습니까?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다윗의 모든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다윗을 통하여 현실화 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오늘 우리가 다윗으로부터 받는 일체의 선한 교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과 맺은 메시야적 축복의 언약을 그 어떤 환란 가운데서도 굳게 믿는 믿음입니다. 그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며 불변하신 언약입니다. 따라서 그가 받은 하나님의 은총 역시 불가항력적인 은총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성전(교회) 중심으로 승화되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길입니다.

다윗은 장차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고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런 일을 능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길과 우리의 길은 동일한 축복의 노선입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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