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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으로 온전히 성장하는 교회 /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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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사랑으로 온전히 성장하는 교회
본 문 : 베드로전서 4:7-11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지난 2002년 헝가리 태생의 임레 케르테스라는 작가가 ‘운명’이라는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글은 세계 제2차 대전 중 독일이 유태인을 600만 명이나 살해하는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15살 소년의 눈에 비췬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절망과 죽음으로 가득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날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인간의 죄성과 잔혹함을 대표하는 한 현장입니다. ‘운명’에서는 이러한 절망과 죽음의 현장에서 죄르지라는 15살의 소년이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르지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과거의 소중했던 기억과 아름다운 만남을 추억하며 또한 미래에 다시 맞을 찬란한 순간을 희망했습니다. 이것이 죄르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희망은 암울한 미래를 열어가는 힘입니다. 희망을 통해 인간은 절망의 현실 속에서 운명을 극복해간다는 내용이 바로 ‘운명’입니다. 작가는 아울러 작품을 통해 현대에도 아우슈비츠가 존재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빠른 변화와 산업화로 개인성이 상실되고, 그 빠른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개인들이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모습을 고발합니다.

사실 오늘날 사람들의 희망을 빼앗고 절망의 운명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현대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정, 직장, 교회, 정부, 경제, 정치 등 삶의 도처에서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며 외쳤던 희망은 언제 침몰되고 말았는지도 모르게 여전히 계속되는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가 함께 나눌 베드로 전서는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승리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즉 곧 닥쳐올 교회의 박해를 대비해서 고난과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고 희망을 현실화 시킬 수 있도록 격려하는 내용의 책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서도 고난과 절망의 현실 가운데 교회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비록 고난 가운데 있지만 희망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교회와 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절망과 불안과 두려움의 현장에서 희망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성경의 권면과 격려는 무엇입니까?

첫째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1절 말씀의 후반부를 보면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아 고난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이 가가깝다 하더라도 잊지 말고 가슴에 품어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 한다”입니다. 사도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할 비전입니다.

비전과 욕망의 차이를 잘 아시지요? 욕망은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합니다. 목표와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래의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비전을 가졌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비전은 적어도 초점이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의와 희락과 화평으로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룸에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다윗에 관한 책을 보면서 다윗과 함께 했던 400명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다윗은 이웃 블레셋 나라로 도망합니다. 블레셋에서도 있을 수 없어 결국 광야의 아둘람 굴로 숨습니다. 이 때 다윗에게로 친척들과 함께 삼상 22장 2절에 보면 ‘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다고 했습니다.

환란당한 모든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인생살이에 평안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희망을 두고 싶어도 둘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원어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사울의 학정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빚진 자란 나라의 경제 시스템이 잘못 되어 구조적으로 빚질 수밖에 없고 또 그 빚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어 도망 다니는 등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또 마음이 원통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단어는 한나가 자식이 없어서 원통해 할 때 사용되던 단어와 똑같습니다. 즉 호소할 때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 가서 표현할 때도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건이 자신의 상처를 건들게 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성질을 부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정의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가야할 길인지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습니다. 상처만 건들면 모든 판단력을 상실하여 자기 상처를 주인 삼아 살아갑니다.

이들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400명의 사람들이 사울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조를 창출해낸 주동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지 정권 창출의 세력 만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야가 오실 다윗 왕조의 나라를 건강한 정치와 경제, 사회가 되도록 이끌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많은 엘리트들이 압살롬에게 합류할 때에도 끝까지 다윗 왕조를 지키고 다시 회복시키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오합지졸의 400명이 어떻게 정권을 창출하고 다스리고, 위기가 올 때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둘람 굴에 모인 이들이 다윗과 더불어 무엇을 하였을까요? 그들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는 순종의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시편 57편과 142편은 다윗이 가장 곤고할 때에 하나님을 절박하게 찾으며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배우는 시기에 쓰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바로 세상과 사람에게 아픔을 가진 400여명의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하나님께 드린 고백이 시편 57편과 142편입니다. 57편 7-9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고통과 아픔이기도 한 그 괴로움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벽의 희망을 알려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주님! 이제 제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습니다. 새벽을 깨우겠습니다. 그리고 내 삶을 다해서 모든 사람들 중에 감사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겠사오며 모든 민족들 위에 주님이 찬양받으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들의 비전이 상처를 이기게 했고, 오히려 같은 상처로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게 했습니다. 자신 속에 품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참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비전이 있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꿈꾸던 목표를 이룬다해도 성공을 가꾸고 겸손하게 다른 이를 섬길 줄 압니다. 나아가 위기를 당할 때도 자신에게 유리하고 편리한 선택을 하지 않고, 당한 위기를 통해서 말씀에 자신을 점검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꿈을 이루어 드리고자 생명을 다 바칩니다. 이것이 비전을 가진 사람들의 참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도 자신의 욕망,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뜁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욕망이 채워지고 나면 방향을 잃고 인내하지 못합니다. 입지가 불리해지고 어려워지면 재빨리 변신해버립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비전이 있습니까? 교인들 가슴 가슴마다 품고 있는 꿈이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담임목사가 제시해야 한다고 합니다만,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정작 훈련받은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과 교제하는 가운데서 비전이 얻었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에게 꿈이 있습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저는 적어도 IMF 시기를 맞아 금 모으기 운동할 때까지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 온 국민은 깊은 허탈감에 빠져있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렵다고 금 내어놓으라면 그전처럼 할 수 있을까요? 성실했던 기업이 무너집니다.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영어와 컴퓨터를 못한다고 나가라 합니다. 하키 국가 대표선수로 메달을 땄던 한 사람은 한국에 더 이상 미련을 둘 이유가 없다고 자녀를 위해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버렸습니다.

각 세대별로 나라가 위태로우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참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으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하지 않겠다고 답한 사람이 절반에 가깝습니다. 젊은 세대일수록 참여하지 않겠다고 답한 비율이 높습니다.

경기는 침체되는데 작년 한해 우리나라 국민이 도박에 쓴 돈이 총 11조에 달한다고 합니다.
레저시장의 67%를 도박이 차지했고, 2년 사이에 배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15-64세 국민 1명이 1년에 32만원을 도박비용으로 사용했다는 말이 됩니다. 경마 매출액이 가장 높은 해였고, 합법적인 경로인 주식을 통해서는 그나마 서민들 마음속에 남아있던 작은 꿈마저도 다 부서뜨렸습니다. 새해가 왔고 새 정권이 들어서고 모두들 변화가 왔다고 하지만 자기 이익과 욕망으로 가득한 이 땅의 거센 흐름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다윗과 400명의 사람들처럼 이 땅에 희망이 현실화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비전을 다시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간직해야 할 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래야 위기와 절망의 시기에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이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가슴에 품고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주님만 의지하고 새벽을 깨우는 파수꾼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두 번째 희망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서로’라는 단어가 세 번에 걸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봉사하라, 서로 대접하라” 이러한 행동은 공동체 의식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죄를 덮어주고, 모든 사람이 청지기 정신으로 자기 소유를 서로 봉사하는 데에 사용하는 이것은 바로 한 형제자매라는 의식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 휘튼 대학의 성서학 교수이면서,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빌스 목사의 멘토인 길버트 빌지키언 박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꿈은 바로 공동체라고 말했습니다. 즉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는 시편 131:1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다는 말입니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근본적이고 영원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협회의 교리 선언은 하나 됨의 원형적 공동체이신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시고 각 위격은 피조된 인격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한 분이며 능력과 영광이 동등하시다’ 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깨어졌습니다. 둘은 하나의 공동체가 아닌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원망하며 반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됨의 일치와 조화를 잃었습니다. 깨어진 형상의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새로운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를 개인적으로 축복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온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 믿음의 한 공동체를 만드실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도 죄로 인해 나누어지고 분열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간의 공동체 됨을 파괴한 죄의 문제를 십자가상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다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하나를 이루어 냅니다. 서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다투던 제자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하나의 신앙고백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친밀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형제와 자매 혹은 동역자라는 호칭에서 드러나듯이 마음을 함께 느끼고 나누는 특징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가진 고민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고 아껴주는 일이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서로를 섬깁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서로를 존중하고, 사회적 소외계층을 향한 배려와 나눔이 있는 등 남의 아픔을 나누어 지고자합니다. 평등의식 위에서 서로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인정하고 수용합니다.

우리의 희망과 꿈은 공동체가 될 때에 이룰 수 있습니다.

군중과 공동체를 비교해 보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군중입니다. 농구장에 모인 관중들을 보고 공동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목적과 이익에 따라 모여 있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군중은 자기희생이 없고, 충동적이며 철학도 일관성도 없습니다. 군중은 약한 사람은 도태시켜버립니다.

반면에 공동체는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이 건강해질 수 있도록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서로 희생하며 봉사합니다. 자기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섬기고 베푸는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로 있던 군중인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만들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공동체’에 있기 때문에 당신의 속성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약속했을 때,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군중에서 공동체로 만드는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공동체가 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군중은 어떠한 일을 이루어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연합할 수 있습니다.

어부를 중심으로 구성된 12명의 제자들이 공동체가 되었을 때에 세상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여 회개하며 주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시작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될 때에 우리의 희망은 현실화 됩니다. 공동체는 반드시 주님의 복된 나라를 만들어 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군중입니까 아니면 공동체입니까? 우리 교회에 진정한 사랑이 있습니까? 은혜를 입은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고 있습니까? 서로 대접해주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고 있습니까?

금년 우리는 “사랑으로 온전히 성장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세웠습니다. 사랑으로 온전히 성장하는 교회는 희망을 삶의 현장에 실현시키는 공동체입니다. 희망을 잃어가는 이 시대와 실현되지 못한 거짓 희망으로 체념하고 사는 백성들에게 진정한 소망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을 우리 주님이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이 땅에 진정한 소망을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신앙고백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소망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참된 비전을 소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비전을 품고, 한 교회됨의 공동체성을 이루어가는 교회 그래서 새벽을 깨우는 사명을 감당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치유하는 믿음의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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