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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 / 레 2:11-13,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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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
말 씀 : 레위기 2:11-13, 마태복음 5:13-16     
설 교 : 이화림 목사


  우리 교회 금년표어는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교회 표어를 정하는데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란 표어는 처음입니다.

  오늘읽은  5:13-16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여덟가지 복을 말씀하시고 그 후에 바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산을 팔복산이라고 하는데 제가 성지 순례 갔을 때 가보았는데 아주 낮은 산입니다. 신안다리 건너편에 보이는 산보다 훨씬 낮은 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위에서 여덟가지 복을 말씀하시고 그 후에 무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의 사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가운데서 너희는 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나는 소금이 아니어도 되고 너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합시다. 그리고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교회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서양 속담에 없어서는 안될 아주 요긴한 사람이나 그 사회에서 유용한 사람을 가리켜 아무개는 세상의 소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소금이 아주 귀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이 하는 말 가운데 세상에 태양과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소금이라는 말을 듣고 대체로 3가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소금은 방부제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방부제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소금 외에도 방부제로 쓰는 약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소금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방부제를 연상했을 것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부패를 조장해서는 아니되고 같이 부패해도 안됩니다.

  다음에 소금은 음식에 맛을 냅니다.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없이는 요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소금은 맛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조절하는 조미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무미건조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맛을 주어야 합니다. 살맛이 나지 않는 세상을 살 맛이 나는 세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다음에 소금은 순결을 뜻합니다. 옛날 로마 사람들은 소금을 순결의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원시 종교에서 그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에도 소금을 뿌렸는데 이것은 그들의 순결을 의미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레 2:13절에 보면 소제를 드릴 때 너의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너의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너희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너의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고 했습니다. 겔 43:24절에 흠없는 제물을 드리되 하나님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내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너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이 썩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세상에 맛을 내는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미건조한 세상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소금이 되라는 말은 순결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더러워져도 예수 믿는 사람은 깨끗하게 거룩하게 순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검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범죄자 4800명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은 28명이었습니다. 전 가족이 예수 믿는 사람 중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조사를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어느 종합병원에서 외래환자를 안내하는 안내원의 아내가 남편의 수입으로 근근히 살았는데 30년 동안 근무하고 은퇴한 후에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퇴직금이나 연금도 없었지만 조금씩 절약한 보람으로 혼자서 평생을 굶지 않고 살만큼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아내는 55세였습니다. 그 아내는 어떻게 하면 뜻있고 보람된 생활을 할까를 늘 생각했습니다. 병원에서 안내일을 하던 남편의 일을 나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병원에는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환자가 있는데 간호사도 잘 돌보아 주지 않고 가족도 늘 와서 위로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병원에 나와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환자에게 가서 말벗도 되어주고 아픈 데를 주물러 주기도 하고 발도 씻겨주고 열심히 봉사 했습니다. 그러면서 외래환자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를 살폈습니다. 그러다가 조그마한 주머니를 만들어 가위와 종이와 노끈과 연필과 면도기등을 준비해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한 환자들에게 빌려주는 일을 20년 동안 한결같이 했습니다. 이분이 하는 일은 보람을 크게 느끼는 일도 아니었고 남이 알아주는 일도 아니었고 보수가 있는 일도 아니었고 신문에 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을 20년 동안을 계속한 것은 굉장한 믿음의 역사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을 생각하면서 세상에 소금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기쁨이라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옛날부터 유대나라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돈에 사는 장사꾼이 폭리를 얻기 위하여 구브로 섬에 가서 소금을 밀수하여 산 속에 창고를 지어서 저장해 두었습니다. 값이 비쌀 때 팔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급히 창고를 짓느라 마루도 안하고 지붕도 허술하게 했습니다. 얼마 후에 보니까 소금이 전부 녹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장사꾼은 크게 손해를 보고 쓰레기를 길가에 버렸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맛 잃은 소금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맛 잃은 소금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몸은 예배당에 와 있으나 예수님께 대하여 관심이 없고 거듭난 사실이 없고 자기 사명을 망각한 사람은 맛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맛 잃은 소금은 쓸모가 없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맛 잃은 소금이 되면 큰 비극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맛 잃은 소금이 많습니다. 소금 구실을 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부패를 부추기고 부패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현 정부를 썩을 대로 썩은 정부라고 했습디다. 요사이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 받는 사람이 많고 구속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대개가 좋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부패방지 위원장 내정자가 부패 때문에 사퇴했습니다. 소금은 고작 3%정도로 바닷물을 짜게 하고 썩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예수 믿는 사람이 1천 2백 만명이나 되지만 사회는 이렇게 썩어가고 있습니다. 소금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안교회 성도들은 소금이 됩시다. 썩지 않게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됩시다.

  다음에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요일 1:5절에 하나님은 빛이라고 했고 요 8:12절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빛의 근원이고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빛을 받아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이는 반사체의 빛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생소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이방인의 빛이라고 불렀고 유명한 랍비는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의 빛을 비추라는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빛을 세상에 비추라는 말씀입니다 빌2:15절에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라고 했고 엡5:8절에 너희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을 밝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밖으로 볼때는 밝은 것 같으나 영적으로는 매우 어두운 세상입니다. 롬 1:21절에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했고 엡 4:18절에 저희 총명이 어두워졌다고 했고 골 1:13절에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고 어두움의 권세가 세력을 펴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밝은 사람보다 양심이 어두운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밝은 빛이 되어 어두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태양 빛이 우주에 반드시 있어야 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 될 세상의 빛입니다 빛은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속도로 옆에는 갓길에 반사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밤에 차를 타고 가면 길옆에 있는 반사경이 차의 헤드라이트에 비칠 때 반사의 빛을 보내므로 옆 길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바르고 안전한 길로 가도록 인도해 줍니다. 높은 산봉우리의 등대는 비행기의 길을 인도하고 바다 곁에 있는 등대는 뱃길을 인도해 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 흑암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빛의 밝은 길로 의의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망의 길을 향해가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빛을 받아 인생 항로에서 등대지기의 사명 즉 빛을 발산하는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빛은 위험을 경고합니다. 도로공사를 할 때 위험표시판에 빨간빛이나 노란 빛을 반짝 반짝 하게 해 놓습니다. 위험을 경고하는 표시입니다. 조심하라는 표시입니다. 또 시내나 시외에 보면 빨간 빛과 노란 빛이 교차해서 반짝거리는 신호등이 있는데 경고표시입니다. 광주시내에 보면 많은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푸른 신호등은 가라는 표시이고 노란신호등은 기다리라는 표시이고 빨간 신호등은 가지 말라는 표시입니다. 만일 운전기사가 빨간 신호등이 켜 있는데 무시하고 진행한다면 다른 차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도고 큰 사고가 날 것입니다. 인간행로에는 가야할 길이 있고 가서는 안될 길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발람 선지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발락왕에게 가던 길은 가서는 안될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귀에게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들릴라의 집이 있는 블레셋으로 가는 길은 가지 아니했어야 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갔기 때문에 두 눈을 빼이고 연자 멧돌을 돌리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길은 가서는 안될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께서 나타나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가서는 안 되는 위험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사람에게 경고의 신호 위험신호를 보내서 그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빛입니다. 빛이 없으면 생명이 없고 빛이 없으면 나무가 자랄 수가 없고 꽃이 필수가 없고 오곡백과를 수확할 수가 없고 벌레도 살수가 없고 모든 짐승과 새도 사람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만큼 빛이 중요합니다 낮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볼 때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밤에 달을 볼 때 별을 볼 때 전기불을 볼 때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합시다. 그리고 빛으로 삽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을 비추어서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해야 합니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생명 길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빛이 없으면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어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귀한 존재입니다. 없어서는 안될 존재입니다. 14절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말은 빛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지만 약간 다른 뜻이 있습니다. 산 위에 있는 집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아랫마을에서 다 올려다봅니다. 불을 지피면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이고 저녁에 등불을 켜면 그 불빛이 환하게 들어 납니다 마치 바다에 등대와 같습니다. 마당에서 싸우면 그것도 다 보입니다. 좋은 것 나쁜 것 있는 그대로 다 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산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교회가 주목받고 비판 받는 이유도 산 위에 있는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교회를 모든 사람이 와서 살기를 원하는 좋은 동네 참으로 살기 좋다는 아름다운 소문이 퍼지는 동네로 만듭시다. 우리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삽시다. 15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고 했습니다.  옛날 유대사람들은 불을 항상 켜 놓고 필요가 없을 때에는 말같은 그릇으로 덮어두었습니다. 불이 꺼지면 큰 일입니다. 유대 나라의 가난한 서민계층의 가정에는 벽에 돌출된 등경이 있었습니다. 16절에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빛은 착한 행실과 모범적 행실을 의미합니다. 착하다는 말이 헬라어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아가도스라는 말은 단순히 성격이 좋다는 뜻입니다. 칼로스라는 말은 선할 뿐 아니라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을 말합니다. 16절에 쓰여진 말은 칼로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착한 행실은 단지 선할 뿐 아니라 아름답고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착한 행실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빛을 비추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착한 행실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와 시선을 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오산학교에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 동상 제막식 전날에 이승훈 선생이 오산학교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내 동상이 세워지게 된 것은 내 생각에 내가 똥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겨울에는 대변이 얼어서 위로 올라 옵니다. 아무도 치우지 않습니다. 그것을 교장이 도끼로 깍아냅니다. 얼었던 대변이 튀어 입으로 들어옵니다. 교장이 이렇게 착한 일을 함으로 감화를 끼쳤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동상 제막식이 끝나고 5일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하기를 자기 시체를 땅에 묻지 말고 뼈를 생리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보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느냐 못받으시느냐는 예수 믿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착한 일을 안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합니다. 칼빨트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신앙은 그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고 야고보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자 프랜시스를 처음에는 앗시시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의 착한 행실이 알려지자 차차 풀랜시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프랜시스처럼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유한 상인으로 그 지역에서 유력한 사람 버나드가 프랜시스의 헌신과 착한 행실에 감호를 받다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프랜시스를 찾아와 "저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앞으로 선생님이 명하는 대로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얼마 후에 신부 한 사람이 따르게 되었고 계속 자원해서 프랜시스를 따르는 사람이 13년 동안에 3천 여명이나 되었습니다. 프랜시스의 착한 행실이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착한 행실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 모두 소금과 빛이 됩시다. 진실로 진실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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