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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동하는 믿음, 소망, 사랑의 공동체 / 약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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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행동하는 믿음, 소망, 사랑의 공동체 
본문 / 약 2:26
설교 / 전충현 목사 (영암교회)


오늘은 새 해 첫 주일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여러분께 새 해를 맞이하여 우리 교회가 올 한 해 동안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여러분께 제시하고자 합니다.

인도의 <간디>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

성도 여러분 !
그의 여기 이 말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
예수는 좋아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
그의 여기 이 말은 그 사람만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닐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던지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
무엇이 문제입니까 ?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그런 말을 하고 싶어하겠습니까 ?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  거기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이 보이십니까 ?

그렇습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
그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까 ?
행함이 없는 믿음 !
그것은 곧 영혼이 없는 몸처럼 죽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
결국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여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가 참고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보시겠습니까 ?
<살전 1:2-4>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329면.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

성도 여러분 !  보이십니까 ?
여기 이 말씀 안에서 우리가 <택함 받은 증거,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  어떻습니까 ?
여러분은 구원 받으셨습니까 ?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으셨느냐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여기 이 <세 가지 증거>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이 세 가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이 세 가지 모습은 구원받았다고 자처하는 우리네 삶 속에 열심히 채워나가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먼저 <믿음의 역사>를 보시지요 !
어떻습니까 ?
지금 우리 안에 <믿음으로 좇아나는 역사>가 있는지요 ?
<믿음으로 좇아나는 삶의 흔적>이 우리 안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좌절>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도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낙심>도, <탄식>도, <불평>도, <원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
여기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우리네 삶 속에 없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이정표로 삼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가슴>은 언제나 말씀을 향해서 열려있습니다.
<그들의 귀>는 언제나 말씀을 향해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삶의 현장에는 <이김>이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을 딛고 일어선 <이김의 역사>가 저들의 삶 속에는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보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어떤 삶의 정황을 놓고도 그것을 <우연>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
여기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맞는지요 ?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 맞습니까 ?
그렇습니다.
우리는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처럼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믿고 있다면 거기에 걸 맞는 행동이 우리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지 아십니까 ?

한 동안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정부는 그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습니다.

한 번은 <경상북도 도지사>가 독도에 가서 전투경찰들을 위문하려고 했는데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며 이렇게 분개했습니다.
  정말 독도가 우리 땅이 맞는가 ?
  정말 독도가 경상북도에 속한 땅이 맞는가 말입니다.

지금도 독도에 가려면 이 나라 외교통상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답니다.
마치 외국에 나가려는 사람이 외교통상부 장관이 발행하는 여권을 받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
이런 모습을 두고 우리 안에 어떻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일본 사람들은 어떤지 아십니까 ?
그들은 아예 <몇 몇 사람의 호적>을 그곳으로 등록 시켜 놓았습니다.
그 뿐인 줄 아십니까 ?
그들은 <공시지가>까지 산정해 놓았습니다.

독도가 너네 땅이냐 우리 땅이냐는 논란이 일본과 우리 사이에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이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꾸만 우리 안에 생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리 안에는 그 믿음에 따르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번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훌륭한 믿음의 선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그처럼 말씀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오늘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그러기에 <850 : 1>의 싸움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신 <엘리야>의 하나님 !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로 하여금 200여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무사히 건너게 하신 하나님 !
그 하나님 역시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드온>으로 하여금 <135,000 : 300>의 싸움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 !
그 하나님 역시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안에도 <간증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믿음으로 좇아나는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네 삶이 <간증이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003년 한 해 동안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도 <행동하는 믿음>으로 인한 간증거리가 많이 쌓여져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제 <사랑의 수고>를 보시지요 !
앞에서 말씀드린 인도의 <간디>는 <한 나라가 망할 때의 징조>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말했습니다.
  1) 원칙 없는 정치
  2) 도덕 없는 경제
  3) 인간성 없는 과학
  4) 희생 없는 종교

그렇습니다.
<원칙 없는 정치>가 이제까지 이 땅을 이렇게도 어지럽혔습니다.
그런 면에서 원칙을 가지고 정치의 마당에 서겠다는 <새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에게 상당한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도덕 없는 경제> !
이것이 이 나라 구석구석을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의 어느 곳을 파더라도 <심한 악취>가 풍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성 없는 과학 > !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사람의 손에 의해서 조작되어 태어난 복제인간 !
그런 인간이 이 땅에 가득하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간디가 마지막으로 지적한 '한 나라가 망할 때의 징조'는 무엇이었습니까 ?
그것은 <희생 없는 종교>였습니다.
희생 없는 종교 !  어떻습니까 ?
간디가 꼭 무속신앙인의 삶을 두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가 말한 희생이 없는 종교 !
그것은 곧 예수쟁이인 우리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예수는 좋아해도 기독교인들은 싫어한다'고 말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 !
행동하지 않는 사랑 !
그것이 한 나라의 흥망성쇠까지 좌우한다고 하니 정말 두렵지 않습니까 ?

요즘 기독교가 점점 무당화 되어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여러분도 보셨습니까 ?
  사업에 실패하신 분 !
  고민이 많으신 분 !
  아이를 갖지 못하시는 분 !
  능력 있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시는 분 !
  어려운 병이 있으신 분 !
  다 오십시오 !
  여기 능력 있는 종이 오셨습니다.
여기 이렇게 적힌 전단지가 전봇대 여기 저기에 붙어 있는 것을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그런 곳에 몰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자기자신>에게만 쏠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살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도 그렇게 <제한적>일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울타리를 여간해서는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가족 사이>에도 이기심은 점점 더 크게 자리해 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없다>의 작가 <전여옥> 씨가 최근에 쓴 <대한민국은 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보면 우리는 그 심각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본 책에서 저는 <이런 제목의 시>를 보았습니다.
  <제목 :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덜 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데 관심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성도 여러분 !  어떻습니까 ?
아이를 위해서 한없이 자기의 것을 포기하려는 부모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

행동하는 사랑 !
그것은 <가족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희생이 없는 종교>는 한 나라로 하여금 망하게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기에 행동하는 사랑 !
그것으로 우리는 이 땅을 채워가야 합니다.
2003년도 한 해가 우리 안에 이런 사랑이 가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망의 인내>를 보시지요 !
어떤 사람이 일을 하다가 실수로 커다란 냉장고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냉장고는 고장난 것이라 사람이 갇혀도 얼어죽을 염려는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
불과 몇 시간 후에 그가 그곳에 갇힌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어죽을 염려가 전혀 없는 그곳에서 그는 시체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내가 살 수 있다는 소망 !
그런 소망의 인내가 그에게는 너무나도 부족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믿음으로 사는 우리네 삶이 꼭 이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 동안 그 사람의 <찬양>과 <기도>와 <헌신>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우리 안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고후 12:10> 말씀을 같이 보시겠습니까 ?  신약성경 299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약할 그 때가 곧 강함이니라 !
사도바울의 여기 이 신앙고백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약하면 약할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은 더욱 더 크게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우리가 약할수록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더욱 더 크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기 이런 모습을 얼마 전에 우리 곁을 떠나 하나님 품에 안기신 <서애란 성도님>을 통해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그녀는 가진 것이 너무나도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물질도 그렇고, 지식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친구도 그랬습니다.
그녀는 딸 하나를 데리고 정말 외로운 인생을 살다가 결국은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 품에 안기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녀가 죽음을 정면으로 당당하게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여, 오라 !
  네가 나를 삼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
  천만에 !
  너는 그럴 수 없어 !
죽음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그녀가 저에게 보여준 눈빛은 그처럼 당당한 눈빛이었습니다.
그것은 약하디 약한 인생의 삶 속에 나타난 <주님의 강하심>이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
<롬 8:35> 말씀을 말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절대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지금 어찌하고 있습니까 ?
세상의 그 무엇이 지금 여러분으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하고 있습니까 ?

소망의 인내 !
행동하는 소망 !
그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2003년도 새 해를 맞이하여 <첫 주일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다시금 허락된 이 해 !
우리가 <아무런 목표의식>도 없이 출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올 한 해 <우리교회의 목표>를 <행동하는 믿음, 소망, 사랑의 공동체>로 정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
믿음, 소망, 사랑 !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라고 말씀하신 것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
이 세 가지는 우리네 삶 속에 항상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이나 구호로만 우리 안에 있으면 곤란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소망>이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올 한 해 이런 모습으로 내가 <구원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충분히 증거하며 살아가는 우리 영암의 가족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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