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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맡은 사람의 자세 / 고전 4:1~5, 히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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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맡은 사람의 자세
본 문 : 고린도전서 4:1~5, 히브리서 3:1~6
설 교 : 박조준 목사 (갈보리교회)


오늘 우리는 2002년 6월 마지막날, 마지막 주일을 마지 했습니다. 세월은 빨리 지나 갑니다. 금년도 절반을 산 셈입니다. 우리는 6월 하면 50여년전에 있었던 6·25 동란 한국전쟁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를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겠고, 다시 그런 민족의 참극이 일어나도 안되겠습니다. 어제 서해안에서 북한의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내려와 총격전이 생기고 사상자가 생기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금년 6월은 우리 민족으로 잊을 수 없는 축제의 달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세계인의 잔치인 월드컵 행사가 열려 한달 동안을 온 국민이 감격과 흥분 속에서 지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 대표팀이 16강에만 들었으면 한이 없겠다고 기대하고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표팀이 16강에서 8강 그리고 4강에까지 진출하게 된 것은 대회역사상 이변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인이 깜짝 놀라고 한국인을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13억 인구의 대표인 중국 팀이 손을 들고 돌아갔습니다. 이제 한국대표팀이 세계의 강호들을 꺾고 4강에 우뚝 서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실력입니다. 우리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데는

첫째, 훌륭한 감독 히딩크의 용병술을 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번 한국민 에게 뿐만 아니라 세계인에게 축구계의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에게 치하를 드립니다.

둘째는 우리 선수들의 결사적인 최선의 분투였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언론들은 소위 '한국형 축구'를 극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역동적인 나라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사력을 다해 4강에 올라 한국의 위상을 올려놓은 우리 선수들에게 큰 박수를 보냅시다.

셋째는 우리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응원이었습니다. 6월 한달 우리 온 국민의 화제는 월드컵이었습니다. 경기하는 날에 구장을 메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형화면을 마련한 다른 구장, 거리, 광장을 메운 수백만의 인파는 월드컵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경우였습니다. 우리의 응원은 새로운 응원문화를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 언론은 우리의 응원하는 붉은 물결을 본국에 보내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수백만의 인파가 그렇게 질서를 잘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안전사고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동안 범죄율이 25퍼센트나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도둑도 감동해서 도둑질하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결입니다. 경기가 끝난 후 젊은이들이 뒤처리를 하고 청소하는 모습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니까 결과가 더 좋았습니다.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 민족의 표정이 변화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표정이 별로 없이 무뚝뚝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을 치르면서 우리 팀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면서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표정을 완전히 바꿔 얼굴에 웃음을 띠고 사는 명랑한 미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가 함께 뭉쳐 4,700만이 하나가 된 것을 과시했습니다.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정말 놀라왔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안될 일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세계적인 경제 평가 기관에서 우리 나라의 경제 신용도를 두단계 높여 A 판정을 한 것도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정치 하나만 장해주면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일꾼, 맡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맡은 사람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충성'이란 말의 성경 적인 뜻은 '믿음'이란 말과 통합니다. 영어로 'faithful'이란 말을 씁니다. '신실하다, 성실하다, 신의가 있다. 믿을 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충성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미쁘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믿을 만 하고, 의지할 만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21장 4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된 우리도 다를 사람이 믿을 많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에게 아무리 지식이 많고, 아무리 재간이 많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이 충성의 요소가 결여되면 그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히브리서 3장 1절에 보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면서 '예수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 6절에 "그리스도는 그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인정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슨 일을 맡았던지 맡은 사람의 자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정신입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그 국민의 주인정신이 얼마나 강하냐 약하냐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국민의 주인정신이 강하면 그 나라는 반드시 흥하고 번영합니다. 그러나 국민의 주인 정신이 약하면 그 나라는 쇠퇴하고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것을 의식하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지 주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나는 주인이다' 이 말처럼 힘찬 인생의 선언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선택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나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남이 내 인생을 살아 줄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남의 인생을 살아 줄 수도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요 내 길은 내가 가는 것입니다. 내 삶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결정될 수도 없거니와 되어서도 안됩니다. 내 삶을 내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 자유인이요 독립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가정의 주인입니다. 우리 가정의 행복과 불행은 나 자신에 달려 있습니다. 한 집안을 일으키느냐 못 일으키느냐 하는 것은 나의 의지, 나의 노력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치국의 근본은 제가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파괴되면 우리 사회가 파괴됩니다. 우리의 가정이 건강하면 우리 사회도 건강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직장의 주인입니다. 인간을 흔히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직장에서 일정한 지위와 직책을 가지고 일하면서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속해 있는 직장을 사랑하고 그 직장을 번영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이 내게 맡긴 일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맡은 일에 열과 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직장이 번영하고 내가 행복하게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민족의 주인이요, 나라의 주인이요, 역사의 주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주인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의 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 주인이요 다른 하나는 거짓주인입니다. 참 주인은 주인의 구실을 할 줄 아는 주인이요, 주인의 자격과 실력을 갖추고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주인입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인 주인입니다. 거짓주인은 구실을 못하는 주인이요, 주인의 도덕적 책임과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주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명목상의 주인이요, 형식상의 주인입니다. 그러니까 거짓 주인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주인 노릇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한번 엄숙히 물어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 삶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잇습니까?
나는 내 가정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 직장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물음 앞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정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인정신입니다.

그러면, 주인정신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내 힘으로 내 미래를 개척하였다는 강한 정신입니다. 주인이란 말의 반대되는 말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노예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손님이라는 말입니다. 주인에게는 주인정신이 있고, 노예에게는 노예정신이 있습니다. 주인정신은 독립정신이요 노예정신은 굴종의 정신입니다. 노예는 주인에게 예속되어서 주인에게 복종하고, 지배를 받으며 삽니다. 제 발로 서서 제힘으로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노예처럼 불쌍한 존재는 없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노예에게는 인권이 없습니다. 사람이면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최대의 악은 노예제도입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노예제도가 노예정신을 없애야 합니다.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남한테 의존하지 않는 것부터 배웁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배울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주정신입니다. 지난날의 우리 국민은 숙명론과 팔자의 철학과 운수의 관념과 체념의 패배주의의 악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내 삶을 개척 할 수가 없다. 모든 일은 숙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인간의 길흉화복, 흥망성쇠는 하늘이 이미 정한 것이다' 라고 믿어서 그리 좋은 운이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상에서는 체념과 방관, 탄식과 패배주의, 무사안일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숙명론적 인생관부터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운명은 절대로 다른 사람에 의해서 결정 될 수 없습니다.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고,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성공과 승리의 문이 열립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덴마크의 탁월한 지도자요, 시인이요, 사상가요, 교육자요, 목사였던 그룬드비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 성격에 의해서 다시 한번 위대해 집시다. 덴마크 사람의 조상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바이킹이라는 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럽 사람들을 약탈하고, 살인하고, 방화하고, 유린했습니다. 온 유럽인들이 바이킹을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덴마크 사람은 과거에 바이킹으로 유명했었고 폭력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덴마크 사람은 그런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훌륭한 국민성에 의해서 다시 한번 더 위대해 집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한국은 경제력이나, 국토의 넓이로, 많은 인구로 유명해 질 것이 아니라 훌륭한 국민성에 의해서 다른 나라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유명해져야 합니다. 세상에 위대한 국민성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정말 훌륭한 민족이 되려면 먼저 위대한 국민성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자주사회의 자주인 입니다. 자(自)는 '스스로 자'입니다. '스스로'라는 말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번 우리 국민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와 질서를 지키며 응원을 한 것은 스스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인이 놀랐습니다. 스스로는 힘의 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이 자각이요, 스스로 서는 것이 자립입니다.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 자치요, 스스로 규율을 지키는 것이 자율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는 것이 자존이요, 스스로 주인이라고 믿는 것이 자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남이 하라고 해서, 남이 본다고 해서 하는 것은 타율입니다. 타율은 맡은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맡은 사람은 숙명론자가 아니요, 노력주의자입니다. 성공과 승리, 행복의 열쇠는 내 손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나의 미래도 내가 책임집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팔자의 산물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루를 살아도, 무슨 일을 해도, 주인정신을 가지고 삽니다. 주인에게는 주인정신 있고, 손님에게는 손님정신이 있습니다. 주인정신은 무엇이고 손님 정신은 무엇입니까? 주인정신은 책임정신이요, 손님 정신은 방관정신입니다. 책임과 방관의 자세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방관은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무책임한 구경꾼의 자세입니다. 방관은 책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방관은 손님의 입장에서는 것이요, 구경꾼의 자세요, 제3자의 위치에서는 것입니다.
책임이 무엇입니까? 내가 맡아서 해야할 일입니다. 어떤 결과의 원인이 내게 있다고 느끼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여기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둘러서서 구경만 합니다. 그러나 그 집주인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뛰어들어 불을 끄고, 물건을 꺼내고, 집안 식구의 생명을 구출합니다. 방관과 책임이 이렇게 다릅니다. 손님정신과 주인정신이 이렇게 틀립니다.
책임이란 말을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하는데, 대답한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르면 대답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에게는 부름의 원리와 대답의 원리가 있습니다. 아들이 나를 부르고, 아내가 나를 부르고, 이웃이 나를 부릅니다. 민족이 나를 부르고, 조국이 나를 부르고, 정의가 나를 부르고, 약사가 나를 부르고, 사명이 나를 부르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니다.

왜 나를 부릅니까? 필요하기 때문에 나를 부르는 것입니다. 청년 이사야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는 소리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하나님을 뵈었읍이로다" 그때 스랍중에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그에게 날아와서 그의 입에 대며 '보라 이것이 네 이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했습니다. 이일이 있은 후에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청년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대답해야 합니다.
부르시는데 대답하지 않는 것은 비겁하고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것은 맡은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르면 대답해야 합니다. 12사도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답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의 부름에 대답하고 나섰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의 부르심에 대답했습니다. 나이팅겔은 사랑의 부르심에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부르면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필요해서 나를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용감하게 대답하는 것이 책임감입니다. 책임은 인격의 엄숙한 응답입니다. 응답하려면 성실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실과 용기의 덕이 없는 사람은 불러도 응답할 줄 몰고, 책임을 느낄 줄을 모릅니다. 책임은 인격의 척도요 표준입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다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책임사회의 책임적인 인간입니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모여야 책임 사회가 됩니다.
무책임하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부끄러운 일입니다. 무책임하다는 것은 사람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요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맡은 사람의 자세는 주인정신의 자세요, 주인 정신은 책임정신입니다. 주인은 강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영국 속담에 '하인 열 사람의 눈보다 주인 한 사람의 눈이 밝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의 시력은 1.2고 하인의 시력은 0.2가 되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책임의식 문제입니다. 책임을 느끼면서 보는 것과, 책임의식 없이 보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구실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다 하는 것이요, 사람이 사람의 구실을 못한다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직위에 따르는 책임을 우리는 직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직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한 나라에는 국민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국민 각자에 책임이 있습니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배는 선배를 원망하고, 국민은 대통령을 원망한다면 그 나라의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나라가 바로 서라면 국민 하나 하나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주인의 눈으로 보고, 주인의 귀로 듣고, 주인의 머리를 생각하고, 주인의 가슴으로 느끼고, 주인의 손으로 일해야 합니다. 방심상태로 보면 보아도 안보이고, 들어도 안 들리고, 머리가 있어도 생각이 안나오고, 가슴이 있어도 느낌이 없습니다. 세상에 주인정신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손님의 방관정신을 버려야 합니다. 방관정신은 무책임 정신입니다. 방관자는 스스로 책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의미 없이 온 것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심부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명적 존재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각각 책임이 잇는 것입니다. 책임을 안다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시작이요, 책임을 행한다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끝입니다. 스스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은 스스로 사람의 특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맡긴 심부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인의 마음으로 살아야지, 손님으로 살면 안됩니다. 우리 하나 한가 가정을 책임지면 가정이 서고, 교회를 책임지면 교회가 제구실을 하고, 나라를 책임지면 대한민국이 부강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삼천리 금수강산을 주인처럼 섬겨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나라를 이룩하는데 우리 하나 하나가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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