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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리는 말, 죽이는 말 / 마 12: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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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살리는 말, 죽이는 말
본 문 : 마태복음 12:33-37.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요즘 부모들이 하는 고민 중에 하나가 자녀들의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화가 오면 전화기를 자기 방으로 가져가서 평균 두 세 시간씩 통화하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통화요금이 얼마 나오느냐 보다, 전화하는데 시간을 소비해버리고 언제 공부할까 하는 걱정에 있을 것입니다. 어떤 한 가정에도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 있었습니다. 역시 전화가 오면 평균 두 세시간이 기본인 이 아이를 부모가 달래도 보고 혼을 내보아도 딸의 통화시간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통화를 30분만에 끝내더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기특한 마음에 어디서 걸려온 전화이기에 통화를 간단히 하는가를 물었더니,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고 대답했답니다.

문명의 이기가 발달함에 따라 의사소통 할 수 있는 통로와 기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통로를 이용하든,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기능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써 인격을 드러내기도 하고, 말 자체가 소유한 영향력으로 인해 말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기도 하고,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짧은 말 한 마디가 희망 혹은 절망으로 남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말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까?
첫째, 성경은 먼저 말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말은 그 심중에서 나오는 것이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34~35절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여기서 말이라는 ‘로고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의미와 사상이 담겨있는 말을 지칭합니다. 34절에 ‘가득한 것’이라고 표현했던 ‘페리스슈마’는 비의지적이고 체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말은 내 안에 쌓아 두었던 것, 기존에 있던 것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표현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평소에 우리가 하는 말은 이전의 경험, 생각 등이 축적되어 있다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은 단순히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는 이의 인격이고 삶의 경험이며 앞으로의 될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서울에 있는 초등학생 2~5학년 676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를 바탕으로 저술한 책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101가지 말과 행동’ 에서 주요한 열 가지 항목을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공부 좀 해라. 둘째, 동생이 널 통해 뭘 배우겠니? 셋째, 넌 왜 매일 그 모양이니? 다섯째, 한번만 더 그러면 가만 두지 않겠어. 여섯째, 옆집 아이는 이번에도 일등을 했다더라. 일곱째, 내가 못살아 못 살아. 여덟째, 왜 그렇게 버릇없이 구니? 아홉째, 어디서 말대꾸야. 열번째, 넌 아이가 매일 돈타령이니?” 이런 얘기를 들으면 아이들은 속이 상한다고 합니다. 옆집 아이가 또 일등을 했다는 말을 들은 아이는 그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속상한 이유는, 엄마의 부러운 마음을 읽기 때문입니다.

34절, 바리새인들이 하는 선한 말, 하나님을 위하는 말 이면에 그 마음에 쌓여진 것은 악하고 비신앙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말의 변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은 경험과도 연관되지만 그 보다는 마음과 관련되어 사람의 본질과 존재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좀 더 도덕적인 사람이나 비도덕적인 사람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별 차이 없는 똑 같은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저와 여러분들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로 말미암아 부패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3절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더니’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었기에 육체의 것을 요구하고 바라는 본성으로 가득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갈라디아서 5장 19~21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불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다양한 사건과 사람을 접하며 말을 합니다. 우리 말의 근거는 갈라디아서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호색과 음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우상숭배를 나를 하나님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라 확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대화는 하나님이 높임을 받는 대화입니까, 내 자신을 높이는 대화입니까? 내가 가진 의지와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간괴와 아첨을 하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원수를 맺는 말을 하거나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편을 가르는 것 등이 우리의 대화입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존재성을 가지고 하는 말속에는 성령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요인이 있어, 결국 사망과 저주를 불러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속에 사람의 인격을 짓밟아 버리는 말이 많습니다. 시편기자가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주시기를 원한다고 기도한 것은 우리의 본질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 들일 때 나의 욕심과 부패함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 아니라, 하나님이 내 주인이 되고, 주인이 명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이 성령의 언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언어를 말할 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온유와 절제의 말로 영혼을 살리는 언어 생활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 마음속 가장 존귀한 말은 로마서 10장 9~10절 말씀 ‘내가 만일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면 놀라운 은혜 가운데서 생명을 살리는 언어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언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속에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생명이 없는 말을 합니다.

내가 쓰는 말을 점검해 보십시오. 오늘도 무엇을 즐겁게 보며 담아 두십니까? 여러분이 듣고 담아 두는 그것이 여러분의 인격이 되어 드러난다고 배웠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고 하나님의 모습을 품어 우리 맘 속에 쌓아 입술을 통해 나오는 것 주님의 언어요, 생명을 살리는 언어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격이 아름답게 세워져 가는 언어가 되길 바랍니다.

둘째, 성경은 우리 말에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가 있다고 말합니다. 36절 말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에는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계신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오,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기에 말씀은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또,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생기가 있으리라 하시며 생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언어는 하나님 모습을 닮아 권세가 있고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선물을 죽이는데 사용하던지 살리는데 사용하던지 심판하시겠다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무익한 말이라고 하는 ‘아르곤’은 쓸데없는 말, 부주의한 말, 무의미한 말, 무가치한 말을 의미하나 존 맥아더 목사님은 조금 다르게, 비생산적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황무지와 같은 무책임하고 적절치 않은 말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창조적인 능력과 힘으로 용기를 주고 잠자고 있는 능력을 일깨우는 능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반면,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거나 낙심하게 만들고 새로운 희망과 기를 꺾어 버리는 언어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 속에서 말 한마디로 인해 기가 꺾이고 고민하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세상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반면, 말 한마디 때문에 다시 용기를 갖게 되는 일 또한 많습니다. 이처럼 말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9~10절 말씀 ‘이것(혀)으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말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험한 말은 정신적인 것에 영향을 끼치고 육체적인 질병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잠언 6장 2절은, ‘네 입의 말로 내가 얽히게 되었으며 네 입의 말로 내가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천냥이 있으면 노비에서 평민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이 속담은 말 한마디가 팔자를 바꿀 수 있다는 의미로 쓰여졌다고 합니다.

말은 자아상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인정 받는 말, 사랑 받는 말, 칭찬 받는 말을 많이 들은 사람은 세상을 볼 때 자신감을 갖고 낙관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와는 달리 비관적인 말, 조롱하는 말을 많이 들은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묶는 절망적인 말을 한다고 합니다.

뉴욕에 퀸즈 장로교회에는 한진관 목사와 김태열 사모가 개척하여 시무하고 있습니다. 김태열 사모는 두 살 때 부모님의 등에 업혀 만주로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천연두가 돌았고 한집에 세 어린이가 천연두에 걸렸는데, 이 사모님 만이 한 전도사님의 기도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때 사모님의 어머니는 딸의 얼굴에 남은 천연두 흉터를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으로 떼어내었고, 김태열 사모의 얼굴에는 많은 ‘마마자국’이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모님의 어머니는 “얘야, 한 집에 세 어린이가 천연두를 앓게 되었는데, 전도사님의 기도로 너만 살아났어. 하나님이 너를 살리신 게야. 너의 얼굴에 있는 자국은 하나님께서 널 살리신 표시란다. 이 자국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너를 살리신 것을 떠올리고 하나님께 은혜를 갚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딸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태열 사모는 하나님께서 살리셨음에 확신을 갖고 매사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후에 이화여대를 나와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또한 사모님은 거절하는 남편을 3년 동안 끊임없이 좇아 다녔고 드디어 결혼에 성공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격려의 말에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헤쳐나갈 용기와 힘을 얻게 되어 운명이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인생을 바꾼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권세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듣기 원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저는 여러분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가 너의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야, 너는 사랑 받는 존재야,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아. 너는 나의 자녀이고 너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그를 믿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었으나, 주의 음성을 듣고 운명의 궤도가 바뀌게 되었던 사람입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는 음성을 들려주심으로 인해 여호수아는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적군들에게 잡혀 갔을 때 기습 공격을 해서 롯을 되찾아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보복의 두려움으로 심히 떨고 있을 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가 되리라’는 주님의 말로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주님께로부터 듣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께 책망의 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듣고 싶어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나와 같이 확신의 음성을 듣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신 것처럼 우리의 말도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로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는 큰 권세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귀하고 보석 같은 언어는 ‘형제님, 당신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자매님, 당신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입니다. 잠언 20장 15절에 세상엔 금도 있고 진주도 있지만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한 말에 대해서 반드시 영적 책임을 묻겠다고 하십니다. 37절 말씀 ‘네가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말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심판 날에만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이 아닌, 사용한 말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것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18장 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 맘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이길 수 없다고, 여기서 죽는 것이 낫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정탐꾼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4장 28절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대로 그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 된다, 죽겠다, 할 수 없다 한 사람은 광야에서 다 죽었으나, 믿음의 눈을 떠서 약속과 믿음을 선포했던 사람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잠언 18장 20절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인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평소에 말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시인하는 대로 하나님은 그대로 삶 속에서 이루어주시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순간 하나님의 임재함을 믿고, 나와 함께 계시는 왕, 나의 제사장이 되시고 선생님이 되심을 믿는 믿음 위에서 말하고, 그 믿음 위에서 결정하고,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내어 놓는 말은 아무리 도덕적이라 할지라도 생명력이 없습니다. 환경을 바꾸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시인하며 선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주 쓰시는 단어는 “CAN(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면 너는 할 수 있다는 하나님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주 쓰시는 이 말을 우리도 이웃에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WILL(될/할 것이다)”이라는 단어입니다. 밝은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희망의 말을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나누며 살 때, 우리의 언어는 영적인 언어요, 하나님의 언어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잘 쓰시는 말은 격려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 하십니다. “낙심한 이유를 안다. 그러나 내가 있잖니?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서로 격려하며 생명을 나누는 말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말을 많이 하면 허물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험한 말이 나올 때, 술수와 권고와 당 짓는 마음이 내 안에 있구나를 깨닫고 성령의 마음으로 바꾸는 작업들이 필요합니다. 또한 내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세가 있음을 깨닫고 내가 한 말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언어는 달라질 것입니다. 믿음의 언어, 생명의 언어, 남을 살리는 언어를 증거하고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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