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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농사꾼 / 눅 8: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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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늘의 농사꾼
본 문 : 누가복음 8 : 4 -15 
설 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하늘 농사꾼!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믿음 농사꾼이라는 말이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인데, 돈 농사를 짓는 것 아니고 곡식 농사를 짓는 것 아니고 믿음 농사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 농사꾼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농사꾼이 씨를 뿌리는데 그 씨가 길바닥에 떨어지니까 새가 와서 먹어 버렸답니다. 그래서 그 농사는 안됐습니다. 그 다음 돌이 많은 돌밭에 떨어지니까 흙이 약간 있어 싹이 나고 뿌리는 내렸지만 여름 더위와 햇볕에 견디지 못해서 싹이 말라죽고 말아서 농사는 실패하였습니다. 또 다음에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니까 그래도 가시만 제거하면 그 땅은 쓸모가 있었습니다. 뿌리가 깊어지고 싹이 자랐지만 워낙 가시가 기운을 막아 버리니까 도저히 열매를 맺지 못해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 기름진 좋은 땅에 떨어지니까 싹이 나고 꽃 피어 열매 맺는데 백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농사를 비유로 들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믿음의 농사를 잘 지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믿음의 농사꾼' 혹은 '하늘 농사꾼' 이런 제목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I. 모이는 농사꾼(4절)


그런데 본문 4절에 보니까 농사꾼들은 모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이는 농사꾼, 열심히 모이는 농사꾼이 농사를 잘 짓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돈 농사를 짓는 사람, 곡식 농사를 짓는 사람은 모이지 않아도 될지 모르나 우리 믿음 농사짓는 사람들은 열심히 모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4절을 보니까 열심히 모였어요,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그러니까 모이긴 모였는데 도대체 누구들이 모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① 각계 각층에서 모임

본문에 의하면 각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했습니다. 이 각 동네라고 하는 것은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가령 예를 들면 천 년 전쯤의 동네는 한 씨족 사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동네에는 김씨 저 동네에는 이씨 건너 동네에는 최씨만 살아요. 만일에 김씨 동네에 박씨가 한 사람 이사 갔다 하게 되면 발을 못 붙입니다. 멸시 천대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 집안의 김씨가 동네 휘어잡고 사는 거죠. 저 동넨 이씨, 최씨, 박씨, 이렇게 씨족 사회를 이루고 살다 보니 동네 나름대로 전통이 생기고 그 가문 나름대로 문화가 생깁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전통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안에는 별별 사람들이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반도 있겠고 상놈도 있고 또 벼슬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부자,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 별별 사람들이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다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농사짓는 교회에서는 각계 각층이다 모여야 됩니다. 그저 이 동네 저 동네 김씨 박씨 다 모여야 된다는 뜻 이전에 오늘날 각 동네 사람들이다 모였다는 현대적인 의미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모인다는 뜻입니다. 어떤 한 계층만 모이는 교회라면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게 되면 정치가도 교회에 나오고, 농사짓는 사람도 교회 나오고, 학교 교사도, 장사하는 사람도, 회사원도 나오고 그래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은혜 받고 나아갈 때 각계 각층으로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국회 의사당 사람들만 교회에 나오면 장사하는 사람에게 전도 못합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국회 의사당에서 정치하는 사람들과 혹은 장사하는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은 학생 가르치는 것밖에 모르고 국회 의사당에서는 정치하는 것밖에 모르는데 대화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전도가 안됩니다. 그러므로 각계 각층이 모여서 우리가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각계 각층으로 돌아가서 전도할 때에 바로 그 교회가 잘 되고 하나님 나라가 잘 되고 믿음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께 모임

각계 각층이 모여야 되고 그 다음으로는 예수님께 모여야 됩니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에게 나와 " (4절 상).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은 믿음 농사짓는 우리가 모일 때에 사람을 보고 나오면 안 됩니다. 만일 성경에 예수님 제자 중의 첫째 가는 베드로에게 나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그렇게 했다면 오늘날 이 말씀은 목사를 위해 나오라는 말이 됩니다. 담임 목사에게 나아와서 뭘 할 것입니까. 목사에게 나와야 얻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목사에게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또 사람들끼리 모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끼리 잘 모이는 일은 계꾼들이 더 잘 합니다. 계꾼들이 그 날 그 시간만 되면 꼭꼭 모입니다. 계꾼들 열 명 백 명 모인들 그것이 교회입니까. 그것이 믿음 농사입니까. 전혀 상관없습니다. 사람끼리 모여 봐야 계 놀이만도 못한 겁니다. 또한 사람을 위해 모여도 안됩니다. 오늘 교회 안 나가면 내일 당장 심방 오겠으니 목사님을 위해서 나가 줘야지. 왜 목사를 위해서 나옵니까. 사람을 위해서 나올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나온다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니까 전부 예수에게 나아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였고 예수를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가 흩어지라 하기 전에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임이라 하는 것은 꼭 예수님을 위해 모일 때에 교회가 잘 되고 하늘 농사 잘 되고 믿음의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③ 큰 무리로 모임

"큰 무리를 이루니 "(4절 하).


요즘 가만히 들어 보세요. 방송국에서 방송하는 것이나 신문에 나는 것이나 또 어떤 모임에 가거나 "교회가 물량주의에 빠졌다, 회개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량주위가 무슨 뜻입니까? 교인 많이 모이는 것, 헌금 많이 하는 것, 교회가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본-물량주의에 빠져서 타락했다고 하질 않나, 교회 좀 커지니까 목사가 뭐 죄인 같아서 얼굴 들고 못 다니겠습니다. 얼마나 라디오 신문 등 모이는 곳곳마다 욕하고 공격하는지 .... 그래서 속으로 " 자기네들은 교회가 커지고 싶지 않아서 커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욕하고 떠들어대는 사람 자기 교회는 커지고 싶지 않아서 커지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그리고는 전화, 편지로 "도와 주시오" 합니다. 욕하는 사람들이 꼭 그 일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교회 큰 것 자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키운 것 아니고 하나님이 키운 것이니 영광은 다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 교회가 커지지 않고 남의 교회가 커졌다고 욕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욕하면서 도와 달라고 손 내밀고 전화를 합니까. 거기서 언제 개척교회 세우고 선교사 파송합니까? 우리는 금년엔 예배당 다 지었으니까 내년부터는 선교사 보내야 됩니다. 내년부터 개척교회를 필요한 곳에 세워야 됩니다. 적게 모이면 내 교회하나 유지 못합니다. 많이 모여서 강력한 힘이 될 때 주님께서 큰 일을 시켜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여야 합니다. 모인 다음에 교육을 시켜도 그 때 시키고 질적 성장도 그때 있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는데 뭐가 있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모이라고 했는데도 대여섯 명이 모였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모여 힘을 합쳐야 됩니다. 주님께서 큰 일을 맡겨도 우리가 큰 무리로서 크게 일해서 봉사할 때 하늘 나라가 확장되고 하늘 나라 농사가 잘 되고 믿음의 농사가 성공할 줄로 믿습니다.


④ 지도를 받으러 모임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4절 하).

농사지으려면 우리가 모이기도 하고 힘을 합하기도 해야 되지만 농사에 대하여 앞서간 사람에게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농사는 항상 개량되어야 합니다. 옛날 농사나 지금 농사나 씨를 뿌려 농사지어 수확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옛날과 지금은 다릅니다. 벌써 생산량이 달라졌습니다. 그 다음 농기구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농사 기술이 달라졌습니다. 계속 앞서 가는 사람에게 지도를 받아야 그 다음에 우리가 성공합니다.

여기 본문을 보니까 예수님께 모인 무리들이 무엇 하러 모였습니까? 지도 받으려고 모였습니다. 하늘 농사꾼으로서 하늘 농사 잘 지으려면 예수님께 지도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이 비유라고 하게 되면 영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인데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그대로 이야기해 봐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쉽게 풀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니며 설교학을 배울 때에 설교학 교수가 "한국에서는 아무 목사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그렇게 잘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교 다니면서 그 교회엘 열심히 나가 보았는데, 내가 볼 때엔 하찮게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 저런 설교를 잘 한다 하고 모여드는가 싶어 마땅치 않아, 몇 번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해 보니까 참 훌륭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교회에는 장관들도 나오고 벼슬로 말하면 쟁쟁한 분들 그리고 박사도 수십 명 나오고 있는데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할머니도 나와서 좋아할 정도로 설교를 쉽게 합니다. 그러니까 박사도 나와 성경을 쉽게 풀어 주니까 좋아합니다. 박사라고 해도 성경은 무식합니다. 세상의 박사이지 성경도 박사입니까. 또한 무식한 할머니도 나와 쉽게 풀어 주니까 전부가 다 하나같이 은혜 받습니다. 그런데 내가 들어보니까 연애 소설에 나오는 미사여구의 문장들은 없었습니다. 철학에서 쓰이는 유식한 문구도 없었습니다. 좋은 옛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저것도 설교인가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철학 사전 찾아서 철학 용어 쓰셨어요? 아니 어느 소설에 있는 문장 빌어 썼습니까? 보통 쓰는 말, 보통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우리 생활 주변에서 피부로 느끼는 것으로 쉽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사람들이 쉽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지도했고 사람들은 바로 이 지도를 배우러 나간 겁니다. 예수님께 직접 3년 반 동안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믿음의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늘 지도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틀림없는 정통적인 신앙으로 우리가 믿음의 농사 잘 지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모이는 농사꾼, 각계 각층에서 모였고, 예수님께 모였고 큰 무리로 모였고 지도를 받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II. 일하는 농사꾼(5-8절 상)


우리는 모이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일을 해야 합니다. 가정에 식구들이 모였을 때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남편, 아내, 아빠, 엄마가 있습니다. 아들과 딸들이 있습니다. 텔레비젼을 보고 저녁을 먹고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보니 재미있습니다. 재미있다고 해서 그 다음날 낮에도 모여서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모였다가 아침 식사 후에는 즉시 흩어져 나가야 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일하러 나가고, 아들은 아들대로 딸은 딸대로 일하러 가야 합니다. 아내의 일터는 부엌입니다. 아내도 출근하는 것입니다. 안방에서 부엌으로 출근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일도 사실 월급 받고 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는 집안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 모여 힘을 얻고 회사에 나갑니다. 회사에 나가서 일하다 보니 윗사람에게 구박 당하고 억울한 일 당할 때도 많습니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며 웃고 푹 쉬고 나면 전혀 딴 기분, 새 사람이 되어서 일하러 나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의 농사짓는 사람들도 믿음 생활하다보면 속상하고 억울한 일 많습니다. 피곤한 심신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예배시간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아 새 마음 새 기분이 되어야 일하러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① 씨 뿌리는 일

농사짓는 것을 가만히 보면, 나도 농사꾼의 아들인지라 재미있습니다. 봄철이 되면 소에 보쟁기를 메워 밭을 갈아요. 밭가는 사람도 보통 일꾼이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보쟁기 메워 밭을 갈라고 하면 못 합니다. 그만큼 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 거름을 줍니다. 그 다음 이랑을 밟아 나가야 됩니다. 이렇게 발로 밟아 나간 다음 씨를 뿌리는 겁니다. 덮어놓고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그 다음 덮는 사람이 덮습니다. 농사짓는 것이 하나 같지만 이런 여러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밭가는 사람, 거름 주는 사람, 김 매는 사람, 밟아 나가는 사람, 덮는 사람이 있지만 그 중의 최상의 일꾼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밭 잘 갈아도 씨를 엉망으로 뿌려 놓으면 농사는 망칩니다. 서툰 일꾼이 뿌리면 고랑에 듬뿍 떨어지고 이랑에도 듬뿍 떨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안 나올 곳은 듬뿍 나오고 나올 곳에는 안 나옵니다. 밭을 아무리 잘 갈아줘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사람을 보시기 바랍니다. 떨어질 곳만 골고루 떨어뜨리는 것이 최상의 일꾼입니다. 하늘 농사짓는 믿음 생활이 교회 생활 중에서 최고입니다. 식당에서 봉사를 해 주는 일꾼, 구역에서 봉사하는 일꾼,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일꾼, 청소하면서 봉사하는 일꾼, 헌금 봉사하는 일꾼 그 외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일꾼은 씨 뿌리는 일꾼, 즉 전도인 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농사는 헛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농사짓는 데 씨 뿌리는 것이 최고인 것처럼 교회 안에서 최고의 일꾼은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려서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본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에는 씨 뿌리는 사명과 일감을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할 일은 복음 전하는 일, 이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사명이요,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② 씨를 선택하는 일

농사지을 때 선택을 하게 되는데, 밭에 농사를 지어도 해마다 똑같은 것을 심지 않습니다. 바꿔야 됩니다. 금년에는 무슨 농사를 지을 것인가 이것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씨앗은 알곡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으로 고릅니다. 못된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골라냅니다. 이것이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금년에 목화를 심을 것이냐 밀을 심을 것이냐 선택해야 됩니다. 종자를 선택한 후에 못 되고 잡된 것은 버리고 뿌려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선택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안 따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 돼지에게는 그 자유를 안주셨습니다. 개에게도 그런 자유를 안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개가 남의 물건을 훔쳐먹었다고 책임 묻지 않습니다. 돼지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아니합니다, 개나 돼지에게는 자유를 안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내가 자유롭게 말하고 싶으면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책임은 꼭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셨기에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믿음 생활해 나갈 때에 우리는 좋은 것 선택하고, 바른 것 선택하므로 믿음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갔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 오시면 항상 먹을 것 대접하는 것밖에 모릅니다. 동생 마리아는 열심히 말씀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니까 언니가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집에 먹으러 온 줄 아느냐, 내가 먹을 것 없어서 오는 줄 아느냐, 봉사하는 것보다 내 말 들어 주는 게 더 좋다,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했다, 이래야 믿음의 농사가 되는 거다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편을 선택할 때에 믿음의 농사가 잘 되는 줄 믿습니다.


③ 땀을 흘리는 일

좋은 종자를 뿌려 놓았다고 그 농사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풀을 뽑아 줘야 되고, 물을 대주어야 되고, 돌도 제거해 줘야 되고 가시도 제거해야 되고, 잘 가꾸어 주고 땀 흘리는 노력 없이는 안 됩니다. 농사는 땀을 흘리는 만큼 우리에게 수익을 줍니다. 농사는 게으름 피우는 만큼, 땀 안 흘리는 만큼 수익이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 사람은 속일지라도 식물은 속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땀 흘리는 만큼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땀흘려 하는 일, 여기에 우리 믿음의 성장이 있는 줄로 압니다. 우리의 믿음의 농사가 잘 되는 것은 앉아서 쉽게 되는 줄 아십니까.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일할 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노력없이 크지 않습니다. 내가 애쓰고 땀 흘려 노력할 때에 크는 법입니다. 일하는 농사꾼! 씨 뿌리는 일, 선택하는 일, 땀흘려 일하는 일이 우리에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III. 배우는 농사꾼 (8 하 - 15절)

우리 농사꾼은 모여서 힘을 기르고 나가서 일해야 되는데 그것으로 끝이 나면 안 됩니다. 또 배워서 금년 농사는 작년 농사를 그대로 지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워야 됩니다. 그런데 보니까 들어서 배웠다는 것입니다.


① 들어서 배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8절 하) 했습니다. 귀가 없습니까? 귀는 있지요. 그러나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관심이 없는 귀는 듣지를 않습니다. 보십시오. 어느 모임에 복부인들만 모였습니다. 복부인들만 모였을 때에는 어느 아파트가 당첨되면 얼마 남고 어느 아파트는 위치가 좋고 이 소리하기 전에 다른 소리는 듣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복음 전하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전혀 관심 없이 안 듣습니다. 이건 들을 귀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한번 들어 보라는 겁니다. 들어야 배웁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듣지 않으면 절대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들을 때에 분별력이 생기고 우리의 믿음은 자라서 믿음의 농사가 잘 됩니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하늘 농사꾼으로 일등 농사꾼이 되는 것입니다.


② 물어서 배움

그 다음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 이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9절)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쉽게 가르쳤는데도 뜻을 모르겠던가 봅니다. 뜻을 잘 모르겠으니 베드로도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시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 항상 그저 넘어가지 마십시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전화해도 좋습니다. 찾아와도 좋습니다. 또 그것이 시간상 어려우면 우리 교구장 목사님들이 심방할 때 물읍시다. 그저 넘어가지 맙시다. 어물어물 넘어가면 내 믿음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모르는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겁니다. 물어서 배우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설명해 주는데 "길가에 떨어졌다" 하는 길가는 누굽니까? 마음이 길바닥처럼 되어 아주 완고한 사람입니다. 길바닥을 봅시다. 곡괭이로 파도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이런 길바닥같이 완고한 사람! 이런 사람은 지금 이 시간에는 듣고 있지만 돌아서면 다 빼앗기고 맙니다.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다 빼앗아 갑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비가 쏟아진 다음 파서 뒤엎고, 뒤엎은 다음에야 옥토가 겨우 될 수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죽었다 살았다 몇 번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완고"한 마음이 절대로 옥토가 되지 않습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 " 아 그렇습니까? 그래야겠다 꼭 해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나가서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면 돌밭에 뭐가 있습니까. 말라 버리고 맙니다. 다 말라서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왜? 세상에 나가서 믿음 때문에 어려움 당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안 당할 어려움을 믿음 때문에 당합니다. 주일날에는 더 잘 벌 수 있는데 예수 믿는 까닭에 문 닫고 나와야 됩니다. 벌써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두번 하다 손해 보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문을 열고 믿음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씨앗을 받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나갔지만 믿음 까닭에 당하는 어려움 때문에 다 말라죽어 버렸습니다. 또 가시 떨기는 이 세상의 재산, 명예, 권세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다 보니 이 믿음, 그리고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도저히 귀에 안 들어옵니다. 이런 사람은 결실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옥토에 떨어졌다는 것은 좋은 마음 바탕, 심성이 좋은 바탕 위에 그 말씀을 받아 들여 그대로 열매 맺는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니까 확실히 배우고 깨달아 믿음이 바로 서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물어서 깨우치고 계속 배워 나가면서 복음에 바로 서야만 믿음의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③ 순종해서 배움

우리가 들어서 배우고 물어서 배웠다고 해서 농사가 잘 됩니까? 순종을 해야 됩니다. 순종하고 나면 배우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아는 것만 순종하려고 하면 성경에 몇 가지 없습니다. 모르는 것도 믿고 순종하면 순종한 다음 나중에 배우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다. 이브라함이 고향 떠날 때 갈 바를 알고 갔습니까? 모르고 갔습니다. 왜 가야 되는 줄도 몰랐습니다. 어디로 가야 되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순종하고 보니 축복의 가나안 땅이 앞에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순종했기 때문에 배웠습니다. 우리는 순종하고 배우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부였던 베드로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한 말이 뭡니까? 경험과 이성과 생각으론 전혀 맞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지만 예수님 말씀이니 순종해 보겠습니다. 그는 순종으로 배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 이로운 것만, 이치에 맞는 것만 순종하려고 하면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배워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늘 농사꾼은 모이는 농사꾼, 열심히 일하는 농사꾼, 계속해서 배워 나가는 농사꾼입니다, 여기에서 배워서 농사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성공한 농사꾼이 됐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농사를 짓는 하늘 농사꾼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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