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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의 필수적인 과정 / 삿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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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승리의 필수적인 과정
본 문 : 삿 1: 1-7
설 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사사기 1장 1에서 7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승리의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가나안 정복 시대에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들 사이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져 주는 것이 이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전쟁은 이등이 없습니다.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이기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승리의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정하였는데 승리를 하려면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선택적 과정이라면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마는 선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고 안하고의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루아침에 순간적으로 이기는 것도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반드시 과정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승리와 성공에는 이와 같은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승리의 필수적인 과정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과정 (1-2)

  이스라엘 족속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아말렉과 더불어 싸우지 않습니까? 그 때 이스라엘의 총 사령관으로 여호수아가 임명이 되어 아말렉 군대와 싸움을 합니다. 그 뒤에 있는 산에는 모세가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정 피곤해서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점점 패하며 몰리고, 또 다시 힘을 내어 기도를 하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밀고 들어갑니다.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지고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론과 훌이라는 사람이 돌을 가져다 놓고 모세로 하여금 앉게 한 다음에 두 손을 붙잡아 주어서 손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하여 해가 넘어가지 전에 보기 좋게 아말렉을 이기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아닙니다. 단군신화처럼 하나의 신화는 아니지 않습니까? 신화와 전설이라면 우리가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역사적인 사건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손이 올라가면 승리했고, 피곤하여 견딜 수 없어서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패하곤 하였습니다. 전투에서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나 마지막에는 끝까지 손을 들고 기도하여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피곤하다 하여 기도하기를 쉬게 되면 우리는 밀리고 몰리는 상황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피곤하지만 온 가족이 힘을 합하여 어려운 지경에서도 기도하면 승리를 거듭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승리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의 승리의 과정은 적어도 택한 백성에게 두고는 기도가 가장 먼저 있어야 되는 과정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기도가 먼저 있어야 되는 하나의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2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1절과 2절을 짧은 절이지만 두 절에는 네 마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가지 경우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기도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면서 다섯 지파에게 땅을 얻어 나누어준 유명한 지도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더 이상 점령을 못하고 여호수아는 죽습니다. 그럴 적에 나머지 일곱 지파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샅샅이 조사해서 지도를 그려 가지고 오라 하였습니다. 지도를 그려갔더니 일곱 조각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머지 기업을 이어받지 못한 일곱 지파로 하여금 그 지도의 조각을 제비 뽑도록 하였습니다. 사실 일곱 지파는 지도의 한 조각만을 받았던 것이지 땅은 한 평도 기업으로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늘같이 믿음직스러웠던 여호수아가 죽은 것입니다. 얼마나 암담합니까? 예를 들어 가족이 무엇인가 살아 보려고 아둥바둥 애를 쓰고 있을 때 기둥같이 의지했던 남편이나 아버지가 죽었다는 하는 말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아주 암담한 때 기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함께 기도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 전체가 땅을 아직 기업으로 받지 못한 일곱 지파 뿐 아니라 땅을 이미 기업으로 받은 다섯 지파까지 전부 힘을 합하여 기도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였습니다. "지금 일곱 지파가 땅을 기업으로 받지를 못하고 지도 한 조각을 받은 상태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을 물리치고 그 땅을 기업으로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우리가 한꺼번에 올라갈까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지파가 먼저 올라갈까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혹시 잘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은 내 몰라라 하고 내 뜻만 이루어 달라고 하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였습니다.

  넷째는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기도에 대하여 "유다 지파가 먼저 올라가는데 내가 저 가나안 족속을 유다 지파에게 붙여 주었노라"고 하셨습니다. 뚝 떼어서 너 가지라 하고 붙여 주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까지 기도하였습니다. 응답이 있어서 올라가 싸웠더니 승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보면 승리하기까지 여러 가지 과정이 있는 중에 기도가 가장 급선무요, 기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 없이는 되는 것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둘째, 협력하는 과정 (3-)

  솔로몬이 전도서 4장 9절에서 12절까지 협력이 얼마나 복되고 귀하다고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 친구의 협력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혼자 살면 망하고 거꾸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와 둘이 어울려 협력하게 되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망하면 다른 하나가 일으켜 주고 하나가 넘어가면 또 다른 하나가 일으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부부의 협력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혼자 자면 춥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내와 남편이 함께 안고 자면 37도의 화덕을 끌어안고 자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따뜻한지 나중에는 땀이 나서 비키라고 할 정도입니다. 부부가 이렇게 협력을 하면 서로 서로 따뜻함을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혼 할 수 있는 경우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①은 음행의 경우입니다(마 19:9). 성경을 보면 음행한 연고 이외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즉 간음죄를 지으면 이혼을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②는 믿지 않는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입니다(고전 7:15). 한 집안에서 믿는 여자와 믿지 않는 남편이 살고 있습니다. 아내는 믿음 생활에 열심입니다. 이 때 남편이 "당신 끝까지 예수 믿겠오? 하나님을 택하든지 나를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오"라고 하면 남편으로 하여금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여 이혼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남편을 택하는 것은 신앙인으로 못할 일입니다. ③은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질병이 있는 경우입니다(민 5:1-3). 문둥병이나 유출병이 있으면 집에서 내 보내라는 것입니다. 동네에서도 내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중한 병에 걸렸을 때는 이혼을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내 혹은 남편이 정신병자가 되어 도저히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할 때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이혼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입니다. 부부가 함께 서로 서로를 위하고 살아가면 따뜻함을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협력이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상 이혼을 할 수밖에 없어서 이혼했다면 빨리 재혼하십시오.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군대식 협력, 전우간의 협력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아가 싸우고 있는데 앞에서 전우가 쓰러집니다. 나는 달려나가 전진해야 합니다. 적군이 매복해있습니다. 먼저 쓰러진 전우가 적을 쏘아서 내 친구를 도와주었습니다. 이처럼 반드시 전우의 협력은 승리를 거둡니다. 솔로몬은 잠언 4장 9절에서 12절에서 우리 사람들 사이에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은 이처럼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을 보면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지파는 지도를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가진 조각만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 어느 지파가 먼저 올라가 싸울까요? 아니면 한꺼번에 올라가서 싸울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아니다 유다 지파가 먼저 올라가라"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유다 지파가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 지파를 찾아가서 협력을 얻어냈습니다. 여러분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왜 협력할 수 있었습니까?

  ①은 혈연적으로 가깝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는데 네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배 다른 형제들이 많습니다. 은근히 견제하고 속으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유다와 시므온은 레아라고 하는 본처 소생으로 동복형제입니다. 즉 배가 같은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혈연적으로 아주 가까운 형제이기에 더욱 좋았습니다.

  ②는 지역적으로 가깝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제비 뽑은 땅의 바로 옆에 시므온이 제비 뽑은 땅이 있었습니다. 멀리 있는 지파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지파입니다. 이 경우 지연적으로 즉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지파입니다. 혈연적으로, 지역적으로 가까운 두 지파가 협력했다는 말입니다.

  ③은 서로 돕기로 하여 협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가 "내가 나가서 싸울 때 네가 도와주면 네가 싸울 때 나도 가서 돕겠다"라고 하여 서로 도와주기로 하고 협력하였습니다. 도와만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이 베풀기만 하고 한 쪽은 받기만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입장이 비슷하여 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끼리 돕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④는 승리하기까지 협력하였습니다. 협력하다가 중도에 그만둔 것이 아닙니다. 승리하기까지 협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이렇게 철저하게 협력하고 보니 혼자 나가서는 고생하며 죽으며 어렵게 승리할 것인데 결국은 쉽게 승리했습니다. 협력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셋째, 결사적인 과정 (4-7)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드는 사람입니다. 강도가 들어와도 죽기 아니면 살기입니다. 강도가 오히려 무서워 달아납니다. 강도인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네가 칼을 들었어? 죽일테면 죽여봐"라고 달려들면 강도는 기가 죽어서 도망을 갑니다. 칼을 들고도 기가 죽어서 도망을 갑니다. 목숨을 내 놓고 사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불신 세력이 기독교를 핍박합니다. 그러나 목숨을 건 순교자는 종당에 승리합니다. 둘이서 싸울 때에도 '죽여 보라고 죽여봐'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는 죽겠다는 데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가서 일당 백을 하고 일당 천을 합니다. 아무도 못 당하지 않습니까? 결사적인 행동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가깝고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협력해야 합니다. 협력한다고 승리가 굴러 들어옵니까? 마지막에는 목숨을 내 놓고 나가서 싸워야합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져도 되고 이겨도 되는 것입니까?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어린아이가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하는 것입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입니다.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과 시므온 지파가 협력하여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더니 승리하였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7절을 보면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명을 죽이고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에 베섹이라고 하는 곳은 철옹성 같은 성읍입니다. 거기에는 아도니 베섹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 전에 칠십 왕을 점령하고 승리한 후 끌어다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끊었습니다. 벌벌 기어다니면서 밥을 던져 주어 강아지처럼 주워먹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내버려두면 죽었습니다. 칠십 왕을 상대로 해서 싸워 이겼던 아도니 베섹과 싸우는 것이 장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게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가나안 족속의 강자입니다. 그래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더니 마지막에는 아도니 베섹이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가는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서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을 끊으니 "내가 그 전에 행한대로 받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끌어왔더니 거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깨끗한 승리입니다.

  여러분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는 것을 '자살'이라고 합니다.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는 사람의 용기가 보통인줄 아십니까? 한번 높은 곳에 올라가서 죽겠다고 뛰어 내려보십시오. 용기가 없는 사람은 뛰어내리지 못합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됩니다. 왜 '자살'을 합니까? '살자'고 하지 말입니다. 자살할 용기를 가지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자살할 용기를 가지고 목숨을 내 놓고 살아 보십시오. 왜 못살겠습니까? 그렇기 까닭에 결사적인 과정이 최후의 승리를 장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과정을 거쳐 반드시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생을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승리의 필수적인 과정은 첫째로 기도하는 과정입니다. 기도 이외에는 이런 승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의 지름길입니다. 둘째로 협력하는 과정입니다. 혼자 하는 것 보다 둘이 함께 하면 절반의 힘밖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결사적인 과정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행동해야 합니다. 사업도 공부도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지파의 승리가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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