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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을 품고 사는 자 / 사 42:1 ~ 4 , 마 3:13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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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제 목 : 하늘을 품고 사는 자

구약말씀: 이사야서 42:1 ~ 4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서 1:26 ~ 31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롭게 하여 주심과 거룩하게 하여 주심과 구속하여 주심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대로,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3:13 ~ 17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그에게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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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의 찬송이 참 아름답죠? 이렇게 아름다운 찬송을 들으면, 마음이 기쁘게 될 뿐만 아니라 함께 부르고 싶으시죠? 여러 가지 봉사가 있지만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찬양과 관련해서 오늘 마르틴 루터를 예를 들어 얘기하겠습니다. 마르틴 루터, 하면 우리 교회 역사에서 종교개혁의 봉화를 든 사람으로 누구나 다 기억합니다만, 루터는 종교개혁 뿐 아니라, 세계 문명의 큰 흐름을 근본적으로 뒤집어엎고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연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에 관한 것 중에 엄청나게 큰 이야기, 다시 말해 종교개혁, 신학개혁, 문명의 개혁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사람의 인간적인 이야기, 작고 소박한 이야기는 잘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루터가 열세 살 되던 때에, 현재 동독 지역인 아이스레벤(Eisleben)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스레벤이라는 자그마한 도시에는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 성당 밖에서 한 소년이 열심히 찬송을 부릅니다. 마침 그때 성당 안에서는 성가대가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시끄럽게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서, 성가대 지휘자가 연습을 잠깐 중단하고 문을 열어봤더니 소년 하나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상당히 잘 불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이름이 뭐냐?"
    "마르틴 루터입니다."
    "몇 살이냐?"
    "열세 살입니다."
    "왜 성당 앞에서 자꾸 노래를 부르느냐?"
    "성가대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안 된다."
그러자 루터가 하는 말이, 주님이 원하셔서 택하시면 어린 사람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도 기특해서 성가대 지휘자가 그럼 한번 해봐라 해서, 열세 살 때부터 성가대에 들어갔습니다. 이때를 회고한 루터의 고백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찬송을 부르고 성가대에서 봉사했던 것은 아마도 제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는 그리고 나서 얼마가 지난 다음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법대에 들어갔습니다. 법대 재학 중이던 1505년 7월에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숲을 거닐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면서 자기 바로 옆의 나무가 벼락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는 놀랐고 이제 죽었구나 싶어서, "하나님 저 좀 살려주시면 평생 수도원에 가서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하고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이 고백 때문에 루터가 법학공부를 그만두고 수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수도원이란 영적 인생의 최고의 교육장소, 수련의 장소로 알려져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법학 공부를 중단하고 수도원에 가기를 잘했다는 그 뜻이 아닙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번개가 없었고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마 종교개혁이라는 불길을 당길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혹시나 루터 아니면 다른 사람이 택함을 받을 수 있었겠으나 그 양상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서 열심히 봉사도 하고 수도에도 정진했습니다. 그러면서 꼭 로마 바티칸에 성지순례를 해봤으면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가슴속에 타오른 의문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한 선한 행실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인간에게서 선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스레벤 성당도 물론이지만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뷔텐베르크 성당에서도 선한 행실을 돈으로 사고 팔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면죄부 판매 이야기입니다. 부패와 부정의 극치였습니다. 선한 행실을 돈으로 그리고 정치적 권력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나라도, 인간의 구원도 다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그런 구원이 왜 필요한가? 루터는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그 고민을 안고 로마를 여행하게 됩니다. 루터는 바티칸 성당을 향해서 갑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 오실 때 정문으로 올라오셨죠? 계단을 따라 오셨지요? 우리 교회 건물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건물 옆을 빙 돌아서 올라오는 계단인데, 그 계단에 담긴 뜻은 말하자면 명상과 수난을 당한 예수의 발걸음을 기억하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오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계단을 일주일에 한 번쯤은 꼭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생각하면서 한 발짝 한 발짝, 한 스텝 한 스텝 밟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건축을 자랑할 의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계단 속에 담긴 예수의 길과 그 흔적, 그리고 십자가가 새겨진 문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여기에 들어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바티칸에서 베드로성당에 가보시면 거기에도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계단이 있습니다. 이 계단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계단!" 라틴말로 "스칼라 상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성당에 도착한 마르틴 루터가 이제 거룩한 계단을 한 단계 한 단계 걷고 입을 맞추고 회개하면서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눈물 가운데 고통스럽게 되뇌입니다. "하나님 부패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선을 행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곤궁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당시에 관한 루터의 고백을 보면, 눈에서 흐르는 눈물 때문에 계단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계단을 다 올라가서 뒤를 돌아봤더니 계단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고 합니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의인으로 선택받았고, 그 선택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사실 오늘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고 봉사하고 선교하는 일은 구원과 깊이 관련된 일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행했다고 해서 구원이 당연히 보장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으로 가겠습니다. 이사야가 이런 선언을 했습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종으로 삼으셨다면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인이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이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성실하고 충실되게 수행하는 것이 종입니다.
사실 루터가 고뇌했던 문제, 이 부패와 타락 가운데서 어떻게 선행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사람들은 선행을 하면 의무를 다하게 된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의 고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고 종으로서의 의무를 다한다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안 끝난다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말하는 의무만 다하면 끝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선행이라 부르고 봉사라 부릅니다.

이어지는 이사야서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구원이라 이름하는, 기쁨이라 이름하는 행복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 종들이 구원받는 게 아니라, 택함을 받은 종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선택된 사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그 사람은 의무만 다한다고, 일만 마쳤다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못 마쳐도 하나님과 함께 살고 다 마쳐도 그분과 함께 삽니다. 그 사람은 주인과 함께 사는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루터가 로마서 본문을 통해서 오직 의인은, 택함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또 여러분의 이웃 중에 상한 갈대 같은 인간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정신지체아를 자식으로 갖고 있는 사람 계십니까? 인간 가운데 상한 갈대입니다. 여러분이 선물로 받으셨지요? 상했다고 꺾습니까? 여러 부모 중에, 친구 중에, 고초를 당하고 질병을 앓는 분 있지요? 그냥 죽게 내버려둡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사람을 상한 갈대 같더라도 결코 꺾지 않으십니다. 꺼져 가는 등불 같더라도 결코 끄지 않습니다. 왜? 택했으니까.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 많이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상처받은 갈대, 꺾인 갈대, 좌절한 인생, 불행한 인생, 그렇다고 인생을 끝냅니까? 끝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인륜으로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사람은 상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꺾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꺼져 가는 등불이라고 해서 끄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 반대로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먼 나라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사방 각지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다 당신에게로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려고 세례 요한에게 나왔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께 말합니다. "제가 당신한테 세례를 받아야지 어떻게 제가 당신께 세례를 베풉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대가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이루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으로 하늘이 열리고 열린 하늘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택했다.'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고, 그 들은 말을 그대는 가서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대가 나한테 세례를 베풀어라."

오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난 예수에게 아까 루터의 경험과 똑같은 경험을 하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주의 영이 비둘기 같이 임하면서 하는 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나는 너를 택했다." 선택받은 사람, 선택받은 민족, 선택받은 가정, 그것은 선택받지 않은 것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에게는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을 구약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은 선택한 자와,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은 항상 함께 계신다는 말,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자와 항상 공존(共存)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공존하시는데 하나님이 꺾으실 리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는데, 누가 등불을 끕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 자는 선택받았음을 생각하십시오. 선택받은 자는 죽음의 길까지도 함께 가야 하고, 부활의 생명까지도 더불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고난과 역경의 계단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운 길, 하나님이 선택하셨으면 그 길로 가십시오. 약자를 선택한 하나님은 하나님 없이 강하다고 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택하여 하나님 없이 잘난 척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랑할 것이 있거든 우리 주님만 자랑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출세한 사람, 하나님 없이 생명을 얻은 사람, 한번 살아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언제까지 살 겁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 항상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을 선택하여서 "임마누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선택받은 자, 그 사람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부여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사명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까 마르틴 루터 얘기를 했습니다만, 이 사람과 이름이 같은 사람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흑인 해방 운동가, 목사,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좋은 일 하는 사람은 일찍 죽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은 서른 아홉 살 때 총격에 쓰러졌습니다. 1968년 4월 4일 서른 아홉 살의 나이로 살해를 당했는데, 살해당하기 딱 두 달 전인 68년 2월 4일, 아틀란타에 있는 에벤에셀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가 죽는 걸 아는 모양이에요. 설교 가운데 일부를 인용해보겠습니다.

"난 요즘 가끔 죽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을 하다보니 내 장례식은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부탁컨대 제가 죽고 장례식을 치르게 되거든 장례식은 길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조사가 있을 텐데 조사도 짧게 해주십시오. 제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400여 개의 표창장도 받았지만, 제가 죽거든 이런 표창과 상 받은 이야기를 조사에 길게 나열하지 마십시오. 꼭 조사가 있어야 한다면 한마디를 부탁드립니다. '마르틴 루터 킹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 북 치는 사람이었다.' 이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제가 남기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저는 하나님이 주신 이 생명을 헌신적으로 바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설교하고 두 달 뒤에 피살당했습니다. 총격에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오늘 본문 말씀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택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려고 하는 정의와 평화, 이 복음을 들고 북 치면서 다니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나의 의무는 북 치는 일입니다. 저는 종이지만, 택함 받은 종이기 때문에 이 북소리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하나님의 소리, 북소리, 이 소리를 저는 알라바마에서 워싱턴까지 계속해서 울리고 다닐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이 있는 동안 나는 북 치고 다닐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기에 이 북소리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담깁니다."

루터 킹은 갔으나, 이 사람은 간 날 많은 사람이 애도했고, 이 사람이 죽은 날을 휴일로 정하고 흑인의 해방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매일같이 평화와 정의의 새로운 북소리가 미국 땅에도 아니 우리 가슴속에도 울려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라는 북을 계속해서 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이 북 치는 소년, 소녀로 산다면,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주신 북을 쳐야 합니다.

음악을 통해서도 북을 쳐야 합니다. 그림을 통해서도 북을 쳐야 합니다. 또 말씀을 통해서도 북을 쳐야 합니다. 선포하는 장소와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그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살려주시는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마음에 고통 당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 함께하는 나라,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바라는 바입니다.

요즘 우리 한반도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다른 건 그만두고, 핵무기, 걱정입니다. 우리 물어봅시다. 핵무기 속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십니까? 수십 만 명, 수천 만 명을 죽인다는데, 그 죽이는 무기 속에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핵무기는 미국이 가졌든, 북한이 만들었든, 하나님은 거기에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도 하나님이 핵무기를 가지고 딴 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핵무기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 사랑의 무기를 우리는 갈구해야 합니다.

루터에게서처럼 하늘이 열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감동 감화를 주셔서, 이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창출하는 사랑의 북소리를 울리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절망과 좌절과 패배의 소리가 아니고, 파괴의 소리가 아니고, 강요된 소리, 조직적인 폭력의 소리 말고, 살려주는, 고요한 생명의 사랑의 소리가 울려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울려나도록 하나님의 북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에게 오늘 하나님께서 평화와 정의와 생명의 북소리를 주신다고 믿습니다. 이 북소리가 우리의 소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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