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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하신 분의 큰 일 / 눅 1: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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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능하신 분의 큰 일 / 눅 1:46-56
새문안교회 2003.1.19 주일예배
설교 : 강연준 목사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유년 이야기(the infancy narrative)를 길게 서술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그 가운데 여러 개의 찬가(canticle)들이 나온다는 것이 눈에 띕니다.

오늘 본문인 1.46-56는 이른바 ‘마니피카트(Magnificat)’라고 불리는 마리아의 찬가이며, 1.67-79은 사가랴의 찬가, 또 2.14은 ‘글로리아(Gloria)’라고 불리는 천사의 찬양, 2.29이하는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시므온의 찬가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유명한 찬가들 중에 하나로서, 라틴말 번역의 첫 낱말을 따와서 마니피카트(Magnificat: 찬양하였다)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립니다. 이것은 주로 교회의 저녁 예배 때 부르는 전통적 찬가로 사용되었고, 아울러 역사상 위대한 음악가들의 창작력을 자극하여 많은 걸작을 탄생케 하기도 했습니다.

문맥상 오늘 본문이 자리잡은 위치를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나사렛 동네의 처녀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인데 마리아에게 어느날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수태고지와 더불어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친척으로서 늙도록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엘리사벳도 이미 아기를 잉태한지 여섯달 째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시도록 동의하고 순종한 마리아는 그 길로 그의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였고, 엘리사벳으로부터 축복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이 축복에 대해서 마리아가 시로서 화답한 것이 바로 이 유명한 찬양입니다.

문학적 성서학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분석할 때 오늘 본문은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내포한 시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 문제들은 여러 가지 운율의 사용, 시어의 반복과 대조, 교차구조(chiastic pattern), 히브리 전통시와의 밀접한 관련성과 차별성, 구약 본문에 대한 풍부하고 복잡한 암시와 인용 등의 문학적 성서학적 문제들을 포함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마리아의 찬가는 그 시의 주제를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호소할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전체가 전하고자 하는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성격을 예언적이고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마리아는 이 노래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 노래는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와 백성들의 노래로부터 시작된 바,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또한 내용상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와도 흔히 비교됩니다. 그뿐 아니라 시편으로부터도 풍부한 인유와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찬가는 구약의 모든 시와 찬가들을 뛰어넘습니다. 그것은 이 찬가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찬양할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종말론적 차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흘러가는 역사적 과정 속에 이따금 개입하시는 간헐적 행위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철저하고도 궁극적인 구원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크게 세 가지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먼저 개인적 상황과 체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양하며, 이를 더욱 확대하여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 행하신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을 포함한 조상들과의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그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으로 인하여 찬양합니다.

46하-50절에서 우리는 우선 마리아 자신에게 행하신 은혜의 사건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을 근거로 하나님을 찬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하였다”는 말로써 그의 찬양을 시작합니다. ‘내 영혼’ 혹은 ‘내 마음’이란 말은 ‘나’라는 육신적 존재 안에 있는 어떤 불멸하는 독립된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자기 자신을 고스란히 부를 때 사용하는 구약적 전통에 따른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온전한 의미의 ‘나’라는 주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자, 이 온전한 의미의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48절에 이어지는 대로 하나님께서 여종의 비천함, 비참함을 돌아보셨기 때문입니다. 여종, 곧 계집종이란 말은 앞서서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를 듣고서 마리아가 이미 38절에서 스스로를 지칭한 말입니다.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의 여종으로 규정한 마리아는 여종으로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감격하고 감사합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습니다.” 여종은 그 신분 자체가 비천하기 마련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아무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천하다’는 말의 의미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적 의미에서 종의 신분이라거나 천한 계급이라는 의미가 아니며 하나님의 하나님의 존귀하심,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능력 많으심에 대비되는 종의 낮고 천하며 보잘것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천하다는 말의 이와 같은 의미는

52절에서 이와 동일계열의 ‘비천한 자’라는 말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그 보잘 것 없는 여종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특별하게 마음 써주셨습니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크나 큰 사업에 보잘 것 없는 여종을 택하시고 값지게 사용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48절에서 하나님이 돌아보시기 전의 상태와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신 이후에 상태를 대조합니다. 즉, 이전의 ‘비천한 자’가 하나님의 관심과 은총으로 말미암아 대대로 ‘복 있는 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49절은 이 은총을 다른 말로 표현하여, “능하신 분이 내게 큰일을 행하셨다”고 하며, 마리아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십니다. 그 거룩하심은 그분이 하신 일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보잘 것 없는 마리아에게 크나 큰 일, 놀라운 일을 이루신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일이며 바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시므로 그분은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제부터 이 찬가는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의 성격을 마리아 개인 차원의 복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이스라엘 공동체적 차원의 관점으로 노래합니다. 마리아 개인만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일, 큰 일의 수혜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수혜자가 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큰 일이 일종의 대역전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베푸시는 것임과 동시에 심판하시는 것이며, 복을 베푸시는 것임과 동시에 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역전은 50절로부터 53절까지 반복되며 강조됩니다.

50절은 우리말 번역뿐만 아니라 희랍어 원어상으로도 앞 문장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장구조상 자연스럽지만, 내용적으로는 다음에 나오는 문장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자비로우심을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대대로 내리십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두려워하는 이들’은 복수(plural)이며 그 목적어는 ‘그분,’ 즉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리아 개인에게만 내리신 복이 아니라 겸손한 자 일반에게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 반면 교만한 자들이 받는 보응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는 힘있는 팔로 그들을 쓸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겸손한 자들이 받을 보상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그분의 뜻에 맞서는 교만한 자들이 받을 보응은 더욱 구체적인 예시로서 두 번 더 반복됩니다.

52절에 나타나는 첫 번째 예시는 권력자들과 비천한 자들이 하나님께 받는 대접을 병치하여 대조합니다. (여기서 권력자들과 비천한 자들도 모두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권력자들과 비천한 자들이 받는 대접 역시 매우 놀라운 역전으로 나타납니다. 권세있는 자들이 그 권좌에서 내어쫓김을 당하였다는 것이며, 그 반면 비천한 자들은 높이 올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53절에 교차대구적으로(chiastically) 나타난 두 번째 예시도 역시 놀라운 역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굶주린 자들에게 좋은 것을 내리셔서 배부르게 하셨고 그 반대로 부자들은 빈손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른바 복음주의 학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해석자들은 이 구절들이 분명히 정치-경제적 의미를 지닌 것이기 때문에 너무 성급하게 영적인 의미로만 축소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이 다른 복음서들에 비하여 사회적 약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므로, 이 찬가를 그러한 맥락을 무시하고 해석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권세자들과 부자들의 몰락과 비천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높여짐을 설명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역사상 많은 권력자들이 실각한 것을 알고 있고, 역사상 어떤 나라에서는 전제군주에 대항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나서 지배체제가 큰 격동을 겪었고 이른바 공화제라는 지배체제가 자리잡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20세기에 몇몇 나라에서는 봉기를 선동한 자들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고 부르는 봉기가 일어나서 지배체제가 전복된 일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물론 세월이 흐른 후 이 혁명이 사실상 수포로 돌아가버린 일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 가운데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높은 지위 혹은 지배자의 지위에 오른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 시대에 직접 목격한 것만 고려에 넣어도 수 많은 부자들과 갑부들이 몰락하는 것을 보았고, 거꾸로 가난 속에서 일어나서 신흥부자가 되는 사람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런 예들이 이 찬가가 노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입니까? 이런 사회적 변혁이 곧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 찬가에 대한 정치-경제적 해석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단적인 증거는 신흥권력자들이나 신흥부호들의 권력과 재력이 하나님의 구원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그리 올바르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것을 너무나 자주 보아왔기 때문이며, 그 권력과 재력도 얼마가지 않아서 부패하고 몰락하는 것을 흔히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 찬가가 민중을 위한 하나님의 혁명을 노래한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여러 교설들이 있었지만,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봉기와 전복이 가져온 사회적 변혁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구원 행위였다고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결실을 맺은 예를 우리는 인간사에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권력자들이나 비천한 자들, 그리고 굶주린 자들과 부유한 자들이라는 말이 지닌 사회학적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아울러 그 의미가 단순히 사회학적인 의미와 동일시될 수만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의미에 대한 열쇠를 50절과 5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50절에 나타난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라는 어구와 51절에 나타난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입니다. 권력자들과 부자들은 한 편으로 사회학적 의미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분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비천한 자들과 굶주리는 자들 역시 사회학적 의미를 수반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찬가를 하나님의 혁명에 대한 예찬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만 그러합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사용된 동사들의 시제가 과거라는 것에 주목하여 이것이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한정된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상 나타난 과거 시제는 희랍말의 이른바 무시간적 단순과거(timeless aorist) 혹은 격언적 단순과거(gnomic aorist)를 옮긴 것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용법은, 형태상으로는 단순과거이지만, 실제적 의미는 과거에 일어난 특정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사악한 구조를 역전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무시간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종말론적 구원 행동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찬가의 마지막에 마리아는 이 모든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것임을 노래합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이제 영구적으로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기초한 것임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격의 찬가를 끝 맺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리아의 찬가에 담겨있는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이 찬가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몸소 체험하고 또 그것을 통하여 또 인류를 향하여 행하실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내다보는 한 신앙인의 찬양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우리가 마리아가 되어 예수를 잉태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품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품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일어난 개인적 사건에 그치지 아니하며,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원대한 역사를 바라보고 또 거기에 나 자신을 드려야 함을 깨닫지 않습니까? 마리아의 찬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는 자들이 누구인지 살펴봅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비천한 자이며, 하나님 앞에서 목마르고 주린 자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이며,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않은 자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시 말해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누가복음의 평지수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입니다. 여러분이 인간적으로 하찮은 지위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돈이 없어서 궁핍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세상 사람들 앞에 서기 위해서는 문제가 될 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서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알고, 그분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자를 구원하시며, 또 그런 자를 들어 쓰셔서 세상을 향한 구원을 완성해 나가십니다. 여러분에게 권력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큰 부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권력자의 지위에 있는 것, 많은 부를 가진 것 자체를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해답은 51절에 이미 나왔습니다. 권력을 가지되 교만하여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권력으로 자신을 높이며, 압제를 일삼고, 악한 일을 도모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가로막고, 자신의 악한 권력을 영구화하려고 획책하는 자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영원하며, 그 권력이 자기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리라고 착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교만한 권력자를 반드시 응징하시며, 수치를 당하게 하십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롬 13.1이하와 딛 3.1을 통하여 우리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함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권세가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위해 내리신 것임을 아울러 알 수 있습니다. 권력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도구가 되는 것이며, 다스림 받는 백성들이 바른 삶을 살도록 지도하고 인도하는 것이며, 그들이 윤택한 삶을 누리도록 백성을 보살피고 섬기는 것입니다. 권력과 아울러 경제적 부라는 것도 이와 같은 기준에 비추어 소유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오늘은 총회가 정한 여전도회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히 여전도회회원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여종으로서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몸소 체험하였고 그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인간이 만든 갖가지 사악한 구조의 대 역전으로 나타납니다. 여성 여러분, 역사적으로 공식적 지배구조를 만들고 지배력을 행사해온 사람들은 주로 남성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한 연약한 여성을 택하시고 이 세상을 향한 구원의 역사에 그를 소중하게 쓰셨습니다. 현세의 계급적 지배구조 속에 늘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현실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머니로서 섬세하고도 사랑이 넘치는 여성적 영성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육신적 결핍과 영적 목마름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 헌신한 여러분들의 손길을 통하여 충족과 해갈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나고 찬미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을 개인의 안락하고 안전한 삶 속에만 매몰 시키지 말며, 여러분에게 일어난 개인적 구원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 대한 구원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선호하는 왜곡된 가치관과는 다른 깊은 영적 가치관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현체제(status quo)에서 현실적 힘을 행사하는 사회적 강자들에 대한 숭상과 찬미가 아니라, 현체제의 강자들이 억압하고 소외시켜온 사회적 약자들을 보살피시고 일으키시며 건지는 일을 포함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뜻은 그것에 멈추지 않고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 땅에 직접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이 하나님의 사업의 수혜자가 되었으니, 이제 여러분이 이 일의 완성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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