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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들에게 말씀하심 / 히 1:1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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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전준식 목사 (신림교회)
제목 : 아들에게 말씀하심
본문 : 히브리서 1장 1절 - 3절


지난 해 우리는 성도의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에베소서를 나누었습니다. 올 해 우리는 성도님들과 함께 히브리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를 서로 나눈다는 것을 알고 몇몇 교인들은 메일을 통하여 또는 만나서 직접 저를 격려 해주셨습니다. 이분들의 격려에 저는 기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어야 되겠다는 부담감이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를 격려 해 주시는 분들의 한결 같은 공통점은 히브리서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이번에 기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가운데 우리가 먼저 겁을 먹고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책이 있습니다. 구약에 레위기가 그런 책이지요. 다니엘서가 그런 책이 아닐 까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또 어떤 책이 부담되게 생각되시나요? 신약에서는 바로 요한계시록과 히브리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먼저 히브리서에 대한 개론을 말씀을 드립니다. 히브리서를 누가 기록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마태가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는 누가 기록했을까요? 히브리가 기록했다 고 볼 수 있지요. 아닙니다. 히브리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유대인을 가르켜 히브리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때문에 이 편지는 누가 기록했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 알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기록했다는 주장입니다. 또 하나는 모른다는 주장입니다. 바울이 기록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히브리서에 담겨진 사상이나 문체가 바울의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이 절대로 13권의 편지만 기록하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성경에는 바울의 이름으로 13권의 편지가 있는데 13이란 숫자가 성경에 안 좋은 숫자라는 것을 아는 바울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마치 13일의 금요일을 싫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13권과 함께 히브리서를 바울의 편지로 계산해보니 14권이 된다 라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완전 숫자 7이 두 개 이니 분명히 바울이 기록 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글쎄....저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학문적인 업적을 가볍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편지를 기록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편지의 저자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도 그냥 모른다고 인정하고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문적인 입장에서 누구의 편에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인정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도 성경 자체를 인정해서 누가 기록했는지 모른다 로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누가 이 글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에게 이 편지를 보냈는가 라는 점입니다. 다른 편지들을 보면 수신자가 분명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하노라. 에베소 성도들에게 문안하노라 라고 분명히 말하는데 히브리서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절에서 우리는 수신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1절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신 민족은 히브리 사람들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라고 하지 않고 히브리라고 했다는 것이 저에게 큰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우리는 히브리인 혹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같은 민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얍복강 가에서 야곱과 씨름하면서 야곱에게 주어진 이름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떠돌이 라는 말입니다. 거렁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인지 일본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사람을 낮게 보면서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빠리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꼴찌라는 말이지요. 히브리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빠리 같은 인생을 살던 사람을 하나님은 부르셔서 선민으로 만드셨다는 메시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히브리서를 읽고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빠리 같은 인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엽전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어느 대사가 우리를 들쥐 같은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원래 하빠리 같은 인생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우월의식을 갖거나 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글을 쓴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에 왜 이 편지가 기록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은 종교가 유대교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를 빌어서 유대교가 기독교와 사촌지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나온 종교가 아닙니다.
같은 구약을 사용한다고 해서 사촌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유대교는 이단입니다. 만일 같은 구약을 사용한다고 해서 어떤 친근감을 갖는다면 이슬람도 우리의 사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슬람이 이단이듯이 유대교도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루 이틀 믿은 사람들이 아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1대 2대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유대공동체에서 예수 공동체로 들어 왔을 때 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 갈등은 크게 두가지 였습니다. 먼저 내부적인 갈등입니다. 그것은 조상 대대로 섬겨왔던 유대교를 쉽게 버리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짐승을 잡고 피를 흘리는 제사를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유대교 제사법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혹시 내가 종교를 바꾸었기 때문에 나에게 화가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양고기 냄새만 맡으면 자기 몸에 벤 양고기 냄새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대교 제사를 기억해 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어도 우리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샤마니즘이 있는 것처럼 그런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재작년에 영국에서 공부할 때 우리가 살고 있던 마을은 외국인이 한 사람도 없었던 마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시장이 없었습니다. 한국 사람은 김치를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는 민족 아닙니까? 김치가 먹고 싶어서 우리는 중국 배추를 사서 배추를 담가 먹었습니다. 김치 담그는 소금도 없는 우리는 어떻게든 김치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 공부할 일이 있어서 LA에 가보니 거기에 한국 시장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김치 한 통을 사서 뚜껑을 여는 순간 우리 식구들은 코를 벌름거리면서 김치 때문에 행복해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이 유대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외부적인 박해입니다. 조상 대대로 믿고 있는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집안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배타적인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배척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맞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주신 편지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가운데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내적으로 갈등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올 일년 히브리서를 공부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십시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받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도 열심을 내어서 나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히브리서에 대한 개론을 염두에 두시고 히브리서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승리를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는 선포로 시작합니다. 요한 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오늘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은 서로 얼굴을 보면서 교제를 하는 수단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서로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차단되었습니다.

여러분! 서로가 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서로 대화가 단절 된 삶은 지옥입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단절 된 삶을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말은 하지만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이라면 정말 답답한 일일 것입니다.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 말을 하지 못하고 우리가 외국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하지 못하면 서로 교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통역을 세우면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오랜 시간과 시대를 거쳐오면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다니엘처럼 꿈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아브라함처럼 직접 만나서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에스겔처럼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두 번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까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목사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꿈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고나 어려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모른 채 살아갑니다. 마치 외국인과 대화를 할 때 서로가 알아듣지 못하듯이 하나님은 계속 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무엇을 누구를 말씀하시려고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2절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 할 때 이 말씀을 이해하도록 해석 해주고 하나님에게 우리의 말을 대신 전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성령님은 그것을 해석 해 주십니다. 구약에 모든 사람들이 한 모든 말들은 이 한 분만을 말씀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그림 언어로 다시 설명 해 보겠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퍼즐 게임이 있습니다. 많게는 1000개의 조각들을 맞추는 게임입니다. 아이들은 그 조각들을 방바닥에 쏱아 놓고 맞추기 시작합니다. 1000개의 조각을 맞추고 나면 그것이 때로는 백설공주로 나타나가도 하고 멋진 성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66개의 조각들이 있습니다. 창세기라는 조각, 레위기라는 조각들이 있는데 이 조각들을 맞추어 보니 그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예수님을 말씀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이 분을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해석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그토록 많은 사건들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나에게도 지금 말씀하시는 능력으로 다가오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조각난 인생들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셔서 이미 내 안에 성경이 일어난 많이 하나님의 사건들이 임했다고 고백하는 완성 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일어난 사건을 듣고 부러워하는 사람보다 그 사건이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났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가끔 뉴스를 보면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돈들이 수레로 실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돈이 산더미처럼 쌓인 채로 나갑니다. 은행 창구에서 은행 직원이 많은 돈을 들고 있는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뉴스를 보고 그 돈 만지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뉴스를 보면서 누구를 부러워합니까? 그 돈의 주인을 부러워하지요.

그렇습니다. 모세는 엘리야는 아브라함은 모두 은행에 창고 직원에 불과 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이 돈 주인에게 돈을 전달해 주는 심부름꾼에 불과 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엘리야 같은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3절의 말씀처럼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움을 겪으면 어떤 마음을 먹습니까? 왜 나는 다윗처럼 살 수 없을까? 왜 나는 엘리야처럼 살 수 없을까? 엘리야를 부러워하고 모세를 부러워합니다. 아닙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 엘리야는 모세를 쳐다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을 쳐다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만유의 후사이시고 만유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았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의 삶에 반드시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이 능력의 예수님을 꼭 붙드십시오. 우리의 눈동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히시기를 바랍니다. 연합하십시오. 본드로 붙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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