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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월 초하루에 / 창 8:13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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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교 자  : 김인환목사
† 설교제목 : 정월 초하루에
† 성경본문 : 창세기 8 : 13 - 22


13] 육백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14] 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2003년 새해에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적이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새것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다는 것은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의 새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때에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실존적이고 종말론적 개념입니다.

한국인은 조상 때부터 새해에 대한 의미를 크게 부여했습니다. 새해가 되면 새 옷을 입었습니다. 저도 어려서 평상시는 새 옷을 사 입을 수는 없으나 설날이 되면 새 옷을 입고, 새 양말에 새 신을 신었습니다. 그래서 새해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새 옷을 입었다고 새것은 압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야 새해가 되는 것입니다.

정월 초하루는 새로운 결단을 가지고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시인 괴테가 “인생은 첫 단추가 중요하다”고 한 말의 의미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월 초하루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정월 초하루에 있었던 새 역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사건을 살펴보면서 금년 새해를 계획하고자 합니다.


첫째, 노아 할아버지가 방주에서 나온 것이 정월 초하루였습니다.

노아의 나이 601세가 되던 해 정월 초하루에 온 지면에서 물이 걷히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입니다. 구원의 새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금년에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기쁨과 확신이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의 이웃에게는 전도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존재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무엇입니까? 죄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멀어졌을 때 예수 안에서 그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이런 구원의 기쁨이 분명히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노아 할아버지의 때에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를 지며 사는 그들을 가리켜 “사람이 육체가 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홍수로 인간을 심판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던 우리를 예수 안에서 구원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여기까지 이른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제가 예일대에서 공부할 때에 한국인 천문학자가 있었습니다. 이분의 말에 의하면 100 년 전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별똥이 저 시베리아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별똥이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떨어졌다고 가정한다면 그 피해는 엄청났을 것이라고 합니다. 별똥은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지구에 이르기 전에 녹아버리는데 어떤 것은 너무 커서 지구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은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이른 것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이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기쁨을 남에게도 나누어주고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가 친척 친구가운데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이 해에 꼭 교회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 그런 결심과 계획이 있어야 우리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작년에도 여러 가정에서 인가귀도의 역사가 일어낫습니다. 금년에도 그런 기쁨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둘째, 히스기야 왕이 정월 초하루에 성전을 성결케 하는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히스기야의 부친 아하스는 악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무신론자 공산당이나 하는 짓을 이스라엘 왕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14대 임금이 된 히스기야가 왕이 되자 정월 초하루에 성전을 정결케 하는 역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어느 해에 히스기야도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가 정결케 한 그 성전에 와서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15년의 삶을 더 주셨습니다.

여러분! 금년엔 정초부터 교회 생활, 예배 생활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주일 성수와 거룩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제가 성은교회에 와서 목회하는 가운데 늘 아쉬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일 대예배를 드리는데 너무 어수선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시작하는데 교인의 절반도 오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파킹장이 부족하여 차를 세우느라 어렵고, 5층에 예배당이 있는데다가 엘레베이터가 하나뿐이어서 여러분이 어려운 것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아주 아쉬운 예배를 매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 할 때였습니다. 당시 성서공회 총무였던 선배목사님이 우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 후 복도에서 저를 부르더니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김목사! 예배가 너무 어수선해!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안내위원이 왔다갔다하고 왜 늦는 교인이 그렇게 많아! 예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 왜 늦게 오는 교인이 앞으로 와서 앉게 하느라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드는 거야!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제가 책망을 단단히 들었습니다. 그 교회는 파킹장도 넉넉한데도 늦는 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꿔 생각을 해야합니다.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음악 연주회가 있다고 생각할 때 연주하는 도중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연주회가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연주회만 못해서여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어수선하고 교회생활이 어수선하면 우리의 삶이 어수선하여지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아도 교회가 부흥되었을 때 그 나라가 잘되었던 것입니다. 영국, 독일, 러시아, 스페인, 이태리와 같은 나라들도 교회가 부흥되었을 때 나라가 부강했습니다.

여러분! 금년에도 더욱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고 교회를 자기 몸과 같이 정성껏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했던 다윗의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셋째, 에스라가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에스라 7:9-10). 에스라는 선비요 학자였습니다. 제사장 여호사다의 직계 후손으로서 바벨론에서 대접받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고 떠난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벨론은 세상을 상징하고 잇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벨론과 예루살렘을 대조시켜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에서 살던 엘리멜렉이 흉년을 만나 그곳을 떠나 모압에 와서 살다가 자기도 죽고 두 아들도 잃은 이야기가 룻기에 나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 품과 교회를 상징한다면, 바벨론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더 사랑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 편이 있고 세상편이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이고 바벨론은 바벨론입니다.

제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코메디언이 한 말이니 웃어 넘기시기를 바랍니다. 골프선수 박세리와 영국의 에리자베스 여왕과 공동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박세리도 공주출신이고 에리자베스 여왕도 공주출신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더 있는데 박세리는 골프공을 가지고 놀고 에리자베스 여왕은 필립공을 가지고 논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웃기려고 만든 이야기입니다. 그건 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억지로 비슷하게 짝지어 맞추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금년엔 온전히 하나님에 속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에스라가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에 오는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에스라 7:9).”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발걸음에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한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 안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장담하니 실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베드로를 붙들어 주니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한 것인데 베드로가 그것을 모르고 장담하다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니 우리가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온전할 수 없는 것이 약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일 날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온전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의 주위에서 주일 날 대형 사고들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발걸음이 바벨론을 향해서는 안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야 합니다. 새해에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심이 변치 말고 결실을 맺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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