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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채우시는 인생 / 창 1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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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채우시는 인생
창세기 13:14-18
박근호 목사 (구미영락교회)


일본의 명치 시대에 '난인'이라는 맑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대학교수가 찾아와 그로부터 진리에 대해서 듣고자 했습니다. 선생은 그 대학교수에게 차를 대접하며 교수의 찻잔에 차를 계속해서 따랐습니다. 차가 흘러 넘치자 교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 차가 넘치고 있습니다. 그만 따르시지요!' 그러자 선생이 말합니다. '이 사람아, 나도 눈이 있네. 그대는 꼭 이 잔을 닮았어. 그대의 생각과 견해로 가득 차 있단 말이야. 그대의 생각과 견해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기 전에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한들 그게 어디 먹혀들 틈이 있겠나? 돌아가게나. 비우고 다시 찾아오게나...'

'진정한 생이란 채워가는 것이냐 비워가는 것이냐'를 놓고 이런 저런 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생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채워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비워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각자의 대답이야 어떻든지 간에 요즈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생은 채워가는 것'이라는 답이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갖는 것 같습니다.

작금에 총리로 지명되어 어쩌면 나라를 다스려갈 분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고 의사, 변호사 등의 사회적 엘리뜨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국무총리 청문회를 앞두고 계속 불거지고 있는 것이 부동산 투기와 위장전입과 탈세 등에 대한 부분들입니다. 부동산 투기를 위해서 그리고 자녀들의 좋은 학군을 위해서 위장전입을 하고 많은 재산을 감추기 위해 재산 신고액을 줄이고 그러다 보니 거기에 따르는 은폐된 재산으로 인한 탈세 혐의가 추가되고...
이런 사람이 국가의 재상이 된다면 과연 이 나라가 어찌될까요?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자기 자식들을 강남 8학군에 넣기 위해 위장전입을 시킨 자가 과연 국가의 재상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도 해명이라고 그 수치스런 행동에 대해 '맹모삼천지교'를 들먹이는 양식을 가진 자가 총리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통탄합니다. '오호 통재라! 인걸은 어디가고 쓰레기만 남았는고! 총리자리에 저렇게 집착이 많은 사람이 임명되면 자기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뻔하다!!'

지난 주에는 또 하나의 기막힌 일을 우리가 경험했습니다. 재개발 아파트 투기에 뛰어든 부유층 사람들... 집없는 서민들이 천장부지로 치솟는 아파트값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 수십채의 아파트를 투기 목적으로 사들인 저 의사 변호사 부부 말입니다. 그들 부부가 세무서에 신고한 년 소득액수가 둘이 합쳐서 800만원이었답니다. 한 사람이 한달에 40만원도 못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는 수십억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참 어이가 없어 말이 안나오고 분노를 넘어서 허탈해 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지도층 가운데 이 고리로부터 벗어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왜 세상이 이렇게 되어갈까요? 그들이 별종이라서 그런 겁니까? 몇몇 사람이 문제라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도 기회가 없고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아마 그들의 자리에 있다면 똑같이 그런 짓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질병에 걸려있습니다. 움켜쥐고 채우는 병적 행동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어떻하든지 더 채우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한자어 '과(過)'자가 붙으면 좋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과식', '과음', '과용', '과욕', '과속', '과로', '과민', '과격'... 온갖 문제가 다 거기서 발생합니다. "과"자가 붙어 너무 지나치는 순간 모든 것이 다 망쳐지고 맙니다. 특히 물질에 있어서의 지나침은 우리 영혼까지도 망하게 합니다. 지혜로운 삶을 가르쳐 주는 잠언의 훈계가 무엇입니까?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여러분은 정말 물질을 향해 이런 마음 자세를 갖고 살고 계십니까? 물질의 복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받는 게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난했을 때 평안했던 가정이 부해지면서 그 평안이 깨어지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돈이 없을 때 별 문제없던 사이도 돈이 생기니까 서로 아웅다웅 다투는 사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할 수 있고 감사 할 수 있는 것, 내가 이미 받은 복을 세어보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서양 격언에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맺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만족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이고, 감사하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자가 사실 가장 부유한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지난 주간에 정말 아주 오랜만에 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는 영화를 비디오 테이프로 빌려 보았습니다. 대단한 수작입니다. 한번 기회가 되면 보시기 바랍니다. 수안보 충고를 다니는 음악하는 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고교 시절 그룹 사운드를 만들어서 음악을 하던 네 친구는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가게 되어서 하나는 약사로, 하나는 시청 건축과 계장으로, 하나는 환경운동가로 그리고 주인공인 상우는 계속 그대로 악사가 되어 살아갑니다. 악사라고 해봐야 가라오께의 출현으로 반주가 필요없어지자 생음악 연주는 사양길에 들어서서 겨우 삼류무대에 서서 결혼도 못하고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한 인생입니다.

10년 만에 만난 저들은 옛날의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돈에 눈뜬 약사, 자리에 연연하는 공무원, 환경운동을 한다고 공무원인 친구와 늘 대립하는 친구... 저들 모두는 너무도 변해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안보 건축과 계장인 친구가 감사에 걸려서 면직되어 버리고는 상우를 찾아와 푸념을 합니다. 그 중에 이런 넋두리가 나옵니다. "성우야, 너 행복하니? 행복하겠다. 너는 그래도 니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잖아. 나는 평생을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나도 못하고 살았다. 이제 뭘하고 살지... 너 따라다니면서 다시 드럼이나 쳐볼까... 미안하다...' 그리고 그 친구는 실직에 따른 가장으로서의 생활의 압박과 삶의 허무에 짓눌려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환경으로 보면 악사인 상우가 제일 불행한 인생입니다. 집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 그저 키타 하나 달랑 들고 이러저리 부평초처럼 떠도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심적으로 보면 어쩌면 그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모든 걸 비우고 살기 때문입니다. 자존심, 체면, 자기입장... 다 버리고 삽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자신들에게도 한번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너 행복하니?'라는 그 질문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행복하십니까?... 만약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건 우리가 너무 자기 스스로 채우려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 피곤하고 막막하고 허탈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스스로 채우려는 그 마음을 버려야 우리 인생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채우려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님이 채워주셔야 합니다. 그게 좋은 것입니다. 내가 채우려는 것은 아무래도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결과가 안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은 참으로 우리 인생에 유익한 것들입니다. 복있는 삶을 살았던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자기가 채우며 살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불행에 빠집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비우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그 잔은 다윗이 채우는 잔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잔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행복했습니다. 다윗은 실로 '주님이 채우시는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그런 또 하나의 인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재물로 인해 행복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불행이 시작됩니다. 정말 어쩌면 '일만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 돈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재산이 불어나자 협력국면에서 대립국면으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됩니다. 이렇게 재물의 늘어남은 저들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지 아니하고 적대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더 채우려는 바로 그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정적으로도 문제가 되었지만 이웃에게도 덕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주변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의 이러한 다툼과 대립은 덕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영광을 가리울 뿐만 아니라 안 좋은 일을 일으킬 수 있는 빌미를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불러 '우리가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불미한 일이 있어서야 되겠느냐? 그러니 좀 떨어져 사는 것이 아쉽기는 하겠지만 분가하면 이런 마찰은 없을 것 같으니 그렇게 하자' 제안합니다. 그러면서 롯을 데리고 나가 밖을 보여주면서 "네 앞에 온 땅이 있다, 네가 좋은 곳을 차지해서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고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줍니다.

여기서 성서가 보여주는 롯의 모습은 참으로 철없고 배은망덕한 모습입니다. 롯에게 있어 삼촌인 아브라함은 친아버지나 진배없는 자입니다. 그러면 '숙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숙부께서 먼저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남는 땅으로 제가 가겠습니다' 뭐 이랬어야 하겠거늘 롯은 대뜸 눈을 부라리고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합니다.
10절에 보면 그가 그 땅을 선택한 까닭은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대로 결과적으로 롯은 자기가 선택한 땅에서 포로가 되어 고생을 하게 되고,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재산과 아내도 모두 잃게 됩니다. 그야말로 패가망신을 당하고 맙니다.
사실 롯도 아브라함에는 못 미쳐도 그와 비슷하게는 살 수 있을만한 조건 속에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가 아브라함의 생애와는 비교하기 어렵게 극과 극으로 갈라진 결정적 전환점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속에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녁을 바라볼 때,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했다고 했습니다. 물은 목축에 있어 결정적인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툰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도 물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삭의 목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대부분 물 때문에 목자들끼리의 싸움이 빈번했습니다. '여호와의 동산같다'는 표현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최고로 좋은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아뭏튼 그는 엄청나게 좋은 축복의 땅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마 그날 롯은 일생일대에 최대의 기쁨에 잠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축복의 땅을 택한 것이 아니라 저주의 땅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 바보 같고 어리석었습니다. 어쩌면 자기가 어른의 체신도 있으니 먼저 그렇게 말하면 롯이 '숙부 먼저'라고 말할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롯이 그렇게 처신하지 않음으로서 아브라함은 물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에게 남겨진 땅은 물도 부족하고 토양도 박토인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유와 과정이야 어찌 됐든 그는 "에덴 동산 같이 좋은 곳"을 양보했습니다. 그땅은 요즘으로 비유하면 엄청난 수익이 보장된 재개발 아파트보다 더 좋은 땅입니다. 그는 자기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그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땅을 빼앗고 확보한 것이 아니라 양보하고 비웠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킨 아브라함의 자태였습니다.

롯이 자신을 떠났을 때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마음이 아렸을까요? 헤어짐에 대한 서운함도 있었겠지만 롯의 철없는 행동이 가져다 준 아픔도 있었을 겁니다. 허탈하기도 했을 것이고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니니 영원히 이르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지만 롯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건 곧 롯의 선택은 부도날 약속어음을 취한 것이고 아브라함의 선택은 부도없는 당좌수표를 취한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뒷받침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뒷받침되는 모든 것은 다 참으로 인생의 복된 것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의 우선권을 주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은 기분내기 위해서 인심쓰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집단의 생존과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우물 한 두개 때문에 전쟁하던 시대인데 물이 넉넉한 초원을 양보한다고 하는 것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도 선택할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데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충분히 부자였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요? 아니 부자라고 돈싫다는 사람 보셨습니까? 부동산 투기해서 돈벌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부자들입니까 가난한 자들입니까?..
아브라함의 행동은 어리석을만치 신앙적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물댄 동산 같은 곳을 양보하니까 그 물댄 동산을 수천 개나 더 만들 수 있는 만군의 여호와가 네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며 축복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인생이 무엇으로 사는 겁니까? 진정한 축복이 무엇입니까? 흩어 구제해도 부요하게 되는가 하면 과도하게 움켜잡아도 가난하게 된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인생을 사랑하며 어떤 인생에게 온전한 복을 주시는지를 아십시다. 이게 '어디다 투기해야 떼돈 벌 수 있을까' 라는 정보보다 더 귀한 정보입니다. 우리는 자칫 자기 눈에 좋은 것에 집착해서 그것을 안 빼앗기려고 애쓰다가 사람 잃고, 신앙 잃고, 축복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좋은 것을 양보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진정한 축복의 길이 보이는 겁니다.

롯이 택한 곳은 좋은 곳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썩은 곳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도끼가 발등에 놓인 곳이었습니다. 허울좋은 부도 직전의 회사와도 같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만 잘 벌린다고 좋은 곳일 수 없습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자기의 모든 재산을 두고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도망가듯이 소알성으로 피할 때 하나님의 동산 같던 그 요단 골짜기가 다 무슨 소용이 있었습니까? 그나마 그 목숨조차도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하며 간청해서 살아나게 된 것 아닙니까?

좋은 것을 양보하고 비켜 설 때 우리는 곧 죽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거 양보하면 나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불신의 마음일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믿음의 눈과 귀와 마음을 가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했을 때 사실 뭘 볼게 있었겠습니까? 이미 좋은 곳은 조카 롯이 차지한 후였고 남은 것은 거친 산과 벌판뿐이었을 겁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동서남북을 푸르고 울창한 숲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 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상황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눈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세상 재물에 혈안이 되어 살지 말고 좀 눈을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방을 넓게 둘러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땅만 바라보지 마시고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눈앞에만 보지 마시고 저만치 멀리 내다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마시고 영의 눈을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내가 채워가는 인생이 얼마나 어리석고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인생이 얼마나 복된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좀 비우고 양보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가 되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밟고 지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롯과의 결별을 결정하게 된 것도 7절에 보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곧 이방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안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래서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해가면서 덕스럽게 일을 처리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게 가치 있고 선한 인생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다투고 싸워서 움켜쥐고, 누리면 잠시 소유에 배부르고 편안할 수 있겠지만 그게 복된 자의 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아보이는 것을 양보했더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채워주시겠다는 겁니다. 세상 그 무엇이 좋다고 한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것보다 더 좋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비우기 전에는, 양보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이 안보입니다. 그러나 양보하고 비우면 하나님의 뜻이 더욱 선명해 집니다. 이게 믿음 안에서 체험하는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어리석게 병을 더 만들어가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불면증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잠못자는 괴로움을 잊고자 그는 잠오는 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알씩 먹었지만 차츰 수량이 많아졌습니다. 나중에 그는 잠못자는 질병 위에 수면제 중독이라는 또 하나의 질병을 얻었습니다. 혹 때려다 혹을 붙였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런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을 비우고 주님을 기대하며 살면 주님이 우리 삶을 건강하게 하시고 풍성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제 자기를 비워 열매를 맺는 결실의 계절 가을입니다. 진정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면 스스로 채워가는 인생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워가는 인생들에게만 일어나는 놀라운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주님이 부어주시는 다함없는 은총이 내 잔에 넘치나이다' 고백하며 복되게 살아가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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