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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있는 더 나은 의 / 마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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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우리에게 있는 더 나은 의
본 문 :  마 5:20
설 교 : 박상훈 목사 (숭동교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얼마 전 미국의 뉴욕 타임즈지에 이러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시대 미국의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누구인가?"
1위는 대통령도 아니었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도 아니었습니다. 1위를 차지한 인물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었습니다. 뉴욕 타임즈지는 이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역대의 어느 대통령보다도 아니 몇 사람의 대통령을 합해 놓은 것보다도 더 지대한 영향을 미국 국민들에게 주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가정이 파탄에서 회복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탈선 현장에서 돌이킬 수 있었다. 그러니 그의 영향력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수많은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온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청년 시절 시카고의 휘튼대학을 다닐 때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학 교수들 가운데, 자기들의 지성만 믿고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저하지 않고 비판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 밑에서 교육을 받다보니,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도 예전처럼 은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어떤 결론이라도 내려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성경을 들고서 휘튼대학 구내에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러 교수님들 밑에서 여러 학문을 접하다 보니까, 제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성경을 읽어도 예전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그는 조용한 달빛 아래서,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는 성경 말씀을 신뢰하라. 그리고 성경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라."
그 순간 불현듯이 그에게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인간이 알면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크다 한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어찌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 머리로 성경 말씀을 의심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내 생각, 내 경험, 내 논리, 내 판단까지도 성경 말씀에 의해서 의심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신뢰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든지 성경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겠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성경 말씀에만 절대적인 권위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설교할 때마다 늘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The Bible Says, "성경은 말씀하시기를"입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이성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입니다. 그는 성경 말씀에만 절대적인 권위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바르게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의 절대성과 영원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축복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자기의 인간적인 냄새나는 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피상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성경 말씀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큰 자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5:20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에게 있는 더 나은 의를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는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없는 의가 우리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들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더욱더 의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매 순간 마다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살펴봅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지를 살펴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있는 더 나은 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에는 여러 종파가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똑같은 하나님을 믿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개신교가 있고, 천주교가 있고, 그리스정교가 있고, 영국의 성공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크게 네 종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른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파였습니다.

첫째,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분리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스스로를 세상에서 분리시켜 경건하게 살겠다는 뜻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주의자들이었습니다. 또 유대교 여러 종파 가운데서 가장 엄한 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뿐만 아니고 조상들의 유전까지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경건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 그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도 바리새인이었고, 또 사도 바울도 본시는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사두개파에 속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두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의롭다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사독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윗 왕 때는 제사장으로서, 솔로몬 왕 때는 대제사장으로서 사역했습니다. 아마도 사두개라는 이름은 사독이라는 인물에서 연유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들이 제사장 직분을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 등의 이권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가운데서도 율법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율법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의 존재도 믿지 않았고, 천사들의 존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 에세네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직후에 살았던 유대 역사가 필로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과 격리해서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만들고서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주로 사해북서부에 위치한 쿰란 지방에 모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서 일명 쿰란공동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그들이 언급되지 않은 주된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격리해서 살았으므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별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늘날에 와서 아주 널리 알려진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에 의해서 베껴진 성경 사본이 1947년, 양치는 목동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 것입니다. 이른바 사해사본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성경 사본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는 근대 고고학 역사에서 가장 값진 발견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 전체를 다 주어도 사해사본과는 맞바꿀 수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사해사본을 굉장히 값지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에세네파는 오늘날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넷째, 열심당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입니다.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였고, 또 한 사람은 가나안인 시몬이었습니다. 눅6:15에 보면, 이 가나안인 시몬을 셀롯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셀롯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열심당입니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열성적인 애국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인들도 당연히 나라의 정치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고 무력을 써서라도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이렇게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파, 네 종파로 나누어졌습니다. 바리새파는 전통주의자들이었습니다. "Go back"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사두개파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Go ahead"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에세네파는 격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Go away"를 주장했습니다. 열심당파는 혁명주의자들이었습니다. "Go against"를 주장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네 종파와는 별개로 또 하나의 뚜렷한 사회 계층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서기관이라고 불리 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소장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성경을 베껴야 했습니다. 그 일을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손으로 베끼는 일을 하다보니까 성경에 관한 한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때때로 율법사라고 불리기도 하고, 또 나중에는 그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랍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서기관은 신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그가 속한 종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컨대 목사와 장로는 신분입니다. 장로교인, 감리교인하면 그가 속한 교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사두개인은 성경 가운데서도 율법만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 가운데서는 물론 사두개파에 속한 사람들도 더러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다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주로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서기관은 한 마디로 성경박사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유대 종파 가운데서도 가장 엄한 파로서, 경건하게 산다고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만일 천국에 단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면 한 사람은 서기관일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리새인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의 주인되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까요?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의가 가진 문제점을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의 의는 지극히 외적이고 형식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그 실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마음 속으로야 형제를 미워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그대로 지킨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또 마음에 음욕을 품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았습니다. 단지 그것이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한, 그들은 자기들이 간음하지 말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그대로 지킨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겉으로는 그들이 깨끗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은 너무나도 지저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인정은 받을 수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의 의는 부분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5:4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온전한 의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지극히 부분적이었습니다. 그 예가 마23:23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여기에 나오는 박하, 회향, 근채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양념이나 향료로 사용하던 식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원의 한쪽 귀퉁이나 화분에 이들을 심어서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이용했습니다. 박하는 잎을 사용했고, 회향이나 근채는 씨앗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박하 잎을 따서 일일이 세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가운데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회향과 근채의 작은 씨앗들을 따서, 그것들도 일일이 다 세어서는 열 개 가운데 하나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조상들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무엇이라고 질책하셨습니까?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예수님은 미6:6-8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천천의 수양도 아니고,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질에 굶주리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6:8의 말씀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첫째, "공의를 행하며," 곧 의입니다.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 곧 인입니다. 셋째,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신 곧 믿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와 인과 신을 바라십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소한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라고, 정작 지켜야할 하나님의 계명인 의인 인과 신은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셋째, 그들의 의는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인간 중심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구제할 때에 사람에게 영광을 얻기 위해서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자기를 과시하여 드렸던 기도의 내용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의 기도는 순전히 자기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에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내면서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이미 상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받을 상이 없습니다. 아니 천국에 들어갈 자격조차도 그들은 얻지를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지극히 외적이었습니다. 부분적이었습니다. 또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마23:1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천국문을 닫고서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불행한 자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있는 더 나은 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서기관은 성경 박사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경건하게 산다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마음 속에 그와 같은 의문이 생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은 그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이 가졌던 질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내용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자기 편에서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지극히 바리새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계명에 비추어 보아서 얼마나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존재인지 그것을 깨달아 알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겸손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면서 오히려 자만심에 빠졌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그 모든 계명은 다 지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러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근심하면서 결국은 예수님을 떠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청년을 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그 말씀을 듣고서 제자들은 심히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그 질문에 예수님은 유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왜 구원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까? 구원은 사람 편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의는 아무리 많이 쌓아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3:20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의 행위로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하물며 사람이 만든 그 수많은 유전들을 다 지킨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의로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왜 그렇습니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의를 요구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한 온전한 의를 주셨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주신 것입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14:6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 자체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다. 마5:20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무엇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많은 의입니까? 양적으로 더 많은 의를 요구하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 곧 인간적인 의는 아무리 많이 쌓아도 소용없습니다. 그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곧 질적으로 다른 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 곧 그리스도의 의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더 부족합니다. 허물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예로 들어보십시다.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 내용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그는 자기가 가진 인간적인 의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곱 가지 완전수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었습니다. 왕족인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열심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깨닫고 그 의를 받게 되자, 그는 과거에 자신이 그토록 대단하게 생각했던 인간적인 의들을 더러운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의 앞에 인간의 의는 너무나도 지저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인간적인 의를 해로 여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주실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지, 이미 인간적인 의로 배불러 있으면 하나님이 주실 의를 사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 해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도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더 나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족합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바리새인만 외식하는 자들입니까? 우리도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바리새인들만 자기 중심적이었습니까? 우리도 얼마나 우리 중심적일 때가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 된 것은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의가 우리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사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축복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하십시다.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날마다 매 순간 마다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예수님을 더욱더 의지합시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더 기쁘시게 할까? 더 영화롭게 할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더 높일 수 있을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날마다 예수님과 더불어 동행합시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매순간마다 행복이 넘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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