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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 "작은 예수로 산 장기려 박사" / 딤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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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25) "작은 예수로 산 장기려 박사"   
본문 : 딤전2:1-7
설교 :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은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25번 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작은 예수로 산 장기려 박사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한 평생을 제물로 바친 장기려 박사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새벽 1시45분 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 한국의  언론은 그 분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쳐"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 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님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 달인 1996년 1월 20일 「군복음화」 신문에 "빛을 남긴 사람"이란 제목의 글을 실어 장기려 박사를 추모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그 분의 삶을 세 가지로 기려보았습니다. 일평생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신 분, 일평생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따뜻하게 사신 분, 일평생 예수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 그분이 장기려 박사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말 보다는 삶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감동적인 설교 보다는 실천적인 삶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치가들의 말도 믿지 못하고 목사님들의 설교도 신뢰하지 못하는 어둡고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밤과 같은 우리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순수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 계셨습니다. 말이나 설교 보다는 삶을 실천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가난하게 살라고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가난하게 사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큰 소리로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사랑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부부의 사랑이 육체와 돈으로 추해져 가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은 영혼과 영원으로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음을 친히 보여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를 섬기라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과 돈을 섬기며 사는 오늘의 시대에 주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긴 분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고귀한 삶을 사셨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분의 가슴에 맺혀있던 이산의 슬픔과 분단의 아픔이 그분의 삶을 그렇게도 순수하고 따뜻하고 고귀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북한에 가서 세상을 떠난 김계용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김계용 목사님은 첫째 설교로 주님을 증거했고, 둘째 삶으로 주님을 증거했고, 세째 죽음으로 주님을 증거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이야말로 그의 가르침으로 주님을 증거했고, 그의 삶으로 주님을 증거했고, 그의 죽음으로 주님을 증거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작은 예수로 산” 장기려 박사의 삶의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그는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좇겠다고 나선 어떤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장기려 박사도 평생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나눔과 베풂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주인이나 소유주로 간주하지 않았고 종이나 청지기로 간주하며 평생을 무소유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수 많은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습니다. 1975년 정년 퇴임 후 집 한 채 없이 고신 의료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 준 24평 남짓한 남루한 사택에서 그의 여생을 보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난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 지셨습니다. 이것이 상호교환의 원리입니다. 장기려 박사도 스스로 가난해 지심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부요케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는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톤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자본주의와 물질의 노예가 된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 말과 삶인지 모릅니다. 그는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물질만능주의와 사회적 부정부패를 개혁하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 검소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스스로 검소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부요케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본주의로 부패한 우리의 사회를 보다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둘째, 사람들을 사랑하며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도 사랑하셨고 중풍병자도 사랑하셨고 세리도 사랑하셨고 창기도 사랑하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도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았습니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지망하면서부터 이런 소원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하나님, 의과대학에 들어가게만 해 주신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 경성의전부속병원에서 일하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40년 일본 나고야 대학에 제출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평양 연합기독병원의 외과과장으로 일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치료와 사랑의 손길을 폈습니다. 1947년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외과학 교수겸 외과과장으로 성실하게 일하다가 1950년 12월 둘째 아들과 함께 월남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오늘의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50년 12월 4일 앰블란스를 타고 피난민들로 북적대던 평양의 종로 거리를 달렸는데 그때 피난민 대열에 끼어 있던 아내와 다른 자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마 차를 세워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둘째 아들과 함께 남하했는데 그때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남하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그 아픔과 한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자기의 죄 값을 갚으려는 듯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한 없는 끝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 여명의 간질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 여서 항상 병원 행정 직원들의 볼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1976년까지 25년간 복음병원의 원장으로 일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일과 의학연구에 몰두하면서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명절 때 자기를 찾아오는 제자나 며느리나 손자에게 주는 세뱃돈은 1천원 밖에 주지 않았지만 거지에게는 10만원 짜리 수표를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0만원 짜리 수표를 소지한 어떤 거지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로, 부산대 의과대학 교수로, 서울 카토릭대 의과대학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수 많은 의학 논문을 발표했고 간암에 대한 연구로 1961년에는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그는 환자들에게는 한 없는 사랑을 한국 의학계에는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1975년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므로 그의 사람 사랑과 사회 봉사의 업적이 아시아적으로 인정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이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위함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도 그의 삶의 목적은 명예도 행복도 부귀도 아니었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죄인인 한 여인이 주님의 사랑에 너무나 감격하여 옥합을 가지고 와서 울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듯이, 장기려 박사의 사랑을 받은 수 많은 사람들도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과 봉사의 삶을 새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건오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 박사를 만나고 나서 나는 그의 복사판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의 삶이 너무도 헌신적이고 투명해서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장기려 박사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그는 신학이론이나 교리나 교회의 제도나 전통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냉랭한 이성의 동의는 얻을 수 있으나 가슴을 움직이는 감동은 주기 힘들다 고 생각하며 사랑실천의 삶만이 가장 가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강조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과 봉사의 삶은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고신대의 이상규교수는 장기려 박사의 삶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다.”

장기려 박사의 사모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1950년 12월 아내 김봉숙씨와 5자녀를 북한에 두고 월남한 후 45년 동안 아내를 그리며 홀로 살았습니다. 재혼하라는 권유를 받을 때마다 "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이별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혼자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990년 6월 80세가 된 노인으로 아내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슬픔의 글을 다음과 같이 띄우기도 했습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그날 아침 당신과 애들을 먼저 대동강변에 보내기 않았더라면… 또 종로 거리에서 차를 세우기만 했었다면, 여보!”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살아서 아내와 만날 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사실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한번은 그의 제자들인 재미 의료인들이 장기려 박사가 중국이나 제 3국에서 사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이산 가족이 어디 나 혼자 뿐이냐 나 혼자만 가서 가족을 만나면 다른 이산가족의 슬픔이 어떠하겠느냐. 통일이 되면 모두 함께 가서 만나지.” 그의 사랑은 너무나 높고 깊고 넓은 이타적인 민족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리움보다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94년 그가 제2차 남북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확정되었을 때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1994년 2월 제2차 남북고향방문의 교환합의가 무산 되었을 때 그는 너무나 큰 슬픔과 충격을 받고 그 해 10월 심한 뇌졸중으로 쓸어졌는데 결국 그 뇌졸중으로 1년 2개월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평양을 방문하여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대신 만나기는 했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척추결핵으로 경성의전부속병원에서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주치의가 27살의 젊은 의사 장기려 박사였다고 합니다. 춘원은 장기려 박사의 순수한 인격과 영혼에 매료되어 장기려 박사를 그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인 의사 안빈의 실존모델로 삼았는데 그때 장기려 박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성인이 아니면 바보요." 그는 돈이나 출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점점 우리들의 사랑이 이기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으로 되어가는 이 시대에 장기려 박사는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이 어떤 것임을 우리들에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미움과 적대와 대결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와 한반도 안에서 우리가 힘써 실천해야 할 일이 바로 우리의 가족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일임을 우리들에게 말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사랑의 통일론"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일 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병든 우리 사회를 치료하고 살리는 길도, 깨어져 가는 우리의 가정을 치료하고 살리는 길도, 분단된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가져 오는 길도, 바로 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생애와 삶은 참으로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습니다.   


셋째, 주님만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충성스럽게 사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삶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이루는 삶이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도 사람들을 섬기면서도 사실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주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1947년 김일성 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그 학교와 병원에서 일할 때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를 하고 시작했습니다. 의사로서의 성실함과 신실함이 인정되어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 하시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 받은 후 평생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월남 후에는 부산에 산정현 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장로로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 받고 섬기자" 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습니다. 박사라고 불리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분은 실로 "주님만을 섬기고 간 사람" 이었습니다. 하나님 섬김과 순종의 삶이 퇴색되어 가는 이 시대에 그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실제로 보여주고 갔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어둡고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수하고 따뜻한 사랑의 빛을 비추면서 사신 한 분을 만나 보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릅니다. 순수하고 가난하게 사신 분, 사랑하며 따뜻하게 사신 분, 충성스럽게 섬기며 사신 분을 만나 보았습니다. 얼마나 훈훈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분은 작은 예수로 살았습니다. 그 분은 단12:3에 기록한대로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들이 어두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몸소 실천해 보여 주었습니다. 빛을 비추면서, 순수하고 가난하게, 사랑하며 따뜻하게,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살아가야 할 것을 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분단 민족의 슬픔과 아픔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신 분입니다. 고귀한 분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우리 하나님께 부끄러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분과 같은 삶을 조금이라도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 드리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을 다시 듣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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