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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었지만 믿음으로 말한 사람 / 히 11:1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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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지만 믿음으로 말한 사람
히브리서 11:1 - 4 (신약 364쪽)
설교자 : 김형준 (동안교회)
 


지구촌 교회 몇몇 목사님들이 건강에 좋다고 저를 수영장에 끌고 가다시피해서 가게 된 적이 있습니다. 새벽시간, 강사에게 강습을 받는데 도무지 물에 뜨지를 않습니다. 같이 배우는 다른 사람들은 물 위에 잘만 뜨고 그 다음 동작을 배우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제 몸은 물 위에 뜨지 않습니다. 매일 새벽 뜨는 연습하다가 물 먹고 고생만 했습니다. 강사가 하루는 저를 보더니 진지하고도 안됐다는 표정으로 ‘저……. 아버님, 믿으세요! 믿음을 가져야 몸이 물에 뜨는 거예요. 그렇게 믿음이 없으세요?’ 하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목사인 제게 믿으라고 간곡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아이러니하게 느꼈습니다. ‘야, 이 믿음이 물속에서도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어디서나 필요합니다. 가족 간에도, 교회 안에서도, 사회 어디서든 믿음이 없이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아들 중 아벨의 제사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가인이요 둘째 아들은 아벨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요 아벨은 양 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사람이 하나님께 같이 제사를 드렸을 때,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면서도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다는 데에서 생겼습니다. 이에 가인이 격분해서 아벨을 죽여 버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창세기 4장의 줄거리인데, 이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같은 제사를 드렸어도 주님께서 받으신 제사는 바로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더 나은 제사, 드린 예물에 대해서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제사는 어떤 제사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 편에서 임의대로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와 예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예배드리지 않고 우리의 예배와 예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성경은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이란 6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곧 아벨은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믿고 있었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받아주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예배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오늘 드리는 이 예배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분명히 예배를 열납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비록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다른 사람들 눈에 하찮은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를 반드시 반겨주신다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대조적인 또 하나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죄를 지은 후,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었습니다. 죄를 지은 후에 오는 수치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존 브레드쇼(John Bradshaw)가 쓴 ‘Healing The Shame That Bind You’ 라는 책이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수치심의 치유’ 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존 브레드쇼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숨은 이유는 수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범죄하기 전에는 인간 본래 모습인 벌거벗은 모습에 만족해했습니다.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기에 그들은 정직했고 완벽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난 후에 아담과 하와는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포장하려고 가려보지만 가려지지가 않습니다. 급기야 주님이 찾을 때 도망가 숨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자꾸 포장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숨게 하고,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예배드릴 때에 ‘나의 못난 모습! 하나님은 나 같은 놈을 온전히 받아줄 리가 없어.’라는 생각을 하기에 하나님 앞에 나왔어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내놓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숨습니다. 결론은 불신입니다. 용서하시고,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죄를 지어도 살길을 다시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아담과 하와와는 대조적인 아벨의 모습이 창세기 4:4절에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고 묘사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창세기 3: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가죽옷으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나뭇잎으로 가리며 당황해하는 그들을 희생된 생명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신 은총의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아벨은 아담과 하와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비록 죄인의 후손이며 죄인이라 할지라도 부모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은 자신의 제사와 정성도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수치심으로 자기를 용납하지 못하여 숨었지만, 아벨은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믿고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배드리고자 여기 왔습니다. 우리 마음에 진실로 어떤 마음이 있습니까?

히10:19-2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담대히 나아가는 믿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유해야 할 예배 자세이며, 믿음으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제사의 열납 여부가 나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에 있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대로 우리의 상한 심령을 기뻐 받으실 것임을 믿으십시오. 바로 이 예배를 드리십시오. 여기에 주님이 열납하시는 아벨의 제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6절 말씀을 보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예배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김으로 나타납니다. 예배를 사랑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또한 온 성도 가운데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고 성령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배드린 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예배가 은혜롭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예배는 예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믿음의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과 이 예배를 사랑하는 믿음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 이유는, 가장 귀한 것으로 예물 드렸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아벨이 드린 예물을 하나님이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정말 소중한 예배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귀하게 드렸음을 창세기 4:4절에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하여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사무엘상 2:30 후반부를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이 여기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즉 가인이 드린 예물은 처음 것도 아니며, 구별된 것도 아니며, 가장 비싸고 소중한 것도 아닙니다. 반면에 아벨은 그 예물드림이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정성이 담긴 예물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처음’이 주는 의미는 참으로 큽니다. 오리는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끝까지 따라다닌다는 재미있는 실험 결과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각인’ 이라고 합니다. 처음 본 것이 오리의 기억 속에 각인되듯이 사람에게도 처음은 남다릅니다. 자녀도 맏이는 특별해서 온갖 좋은 것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러다가 둘째, 셋째가 태어나면 힘도 들고 첫째만큼 잘 안 해줘도 잘 살더라 싶어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맏이에게는 여유와 넉넉함을 주신대신 둘째나 셋째에게는 뛰어난 생존력과 적응력을 주셨기에 사회의 어려운 일도 잘 헤쳐 나갑니다. 첫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게 기억됩니까?

그렇다면 양의 첫 새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출애굽기 13장 12절에 보면 출애굽을 할 때 유월절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너는 무릇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처음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처음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은 기름을 드렸습니다. 지금이야 기름이 해롭다고 하지만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할 당시의 기름은 정말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가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처음 것’, 가장 귀한 ‘기름’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 받으셨음은 우리의 중심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필요로 하시지 물질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우리 중심이 드려지는 예물을 원하시는지 시편 51편 17절에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했습니다. ‘상해도 좋고 울고불고하는 것도 좋으니 다만 너의 진실한 마음을 받고 싶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예물을 받으십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과 정성이 담긴 예물입니다.  잠언 23장 26절에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참된 예물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열납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아이 성을 칠 때에 무참하게 패배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아이성에 의해 무참히 참패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여리고 성을 칠 때 빼앗은 것을 감추어 자기 소유로 두었던 까닭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한 잘못의 책임을 공동체 전체에게 물으셨던 사건입니다.

오늘 어떤 예물을 드리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중에 바르지 못한 예물을 드리는 한 사람이 바로 나는 아닌지 점검해 보십시오. 말씀을 함께 나누는 동안 진정한 회개가 있어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벨과 같이 가장 귀한 것, 우리 마음이 가장 많이 담겨 있는 예물을 드릴 때에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신 이유는, 자신의 삶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 4절과 5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즉 주님께서 아벨의 삶과 존재를 받으셨고 또한 그가 드리는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반대로 가인의 삶과 존재 그리고 그가 드린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을 받지 않으시는데 그 사람이 드리는 제물을 어떻게 용납하시겠습니까?

마태복음 23장 35절 말씀, 예수님께서 아벨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의인”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아벨을 의인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인간적으로 볼 때, 형에게 맞아죽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의 존재와 삶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았기에 예수님께서 아벨을 의인이라고 부르실 수 있었습니다.

시편 1편 6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입니다. 의인은 악인의 꾀를 좇지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삽니다. 죄된 환경과 상황 속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위해 힘쓰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기준으로 삼고, 생활 속에서 구별되이 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합니다. 교만하지 않고 진실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처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별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말합니다.

반면에 가인에 대해서 성경은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12절에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가인은 이미 악한 자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일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는 거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마음의 상태와 삶의 자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었다고 말씀합니다.

유다서 11절에는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합니다. 유다서는 이단 때문에 타락한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분별하며 대적하고 싸워나갈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바로 타락한 사람의 형상으로 ‘가인’을 예로 들었습니다. 톰슨 주석은 이를 가인의 믿음과 정성이 없는 제사, 불경건한 삶, 그리고 동생을 죽인 살인자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발적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속에, 혹은 자신의 습성 속에 이런 생각을 품게 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생각과 마음을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0-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의식만 가득하고 실제의 삶은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책망합니다. 그런 사람과 예물을 주님은 받지 아니하십니다.

미가서 6:6-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행하는 이 세상의 삶을 따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격적으로 남을 죽인 일은 없습니까? 물질로 죽인 일은 없습니까? 말로서 사람을 죽인 일은 없습니까? 내 생활과 삶이 하나님 기뻐 받으실 만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하나님은 가인과 같은 사람과 예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무언가를 얻어간다는 기존의 생각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로 우리의 의식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내 삶 전체가 제물로 드려질 때 주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덧붙여 오늘 중요한 초청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의 초청입니다. 진실로 회개하며 이 시간 나아갈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씻어주시며 보혈의 피로 인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아벨과 같이 하나님께 열납하시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도록 다시 한번 이 예배를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모습과 삶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아벨의 제사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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