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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할 수 없는 은사 / 고후 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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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은사
고린도후서 9:12-15
정필도 목사 (수영로교회)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천지만물을 다스리시고 주장하시는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만복의 근원 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살면서 복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모든 복은 복의 근원 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어도 어리석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큰일나는 줄 알고 좀처럼 하나님을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가까이하면 내게 손해가 되는 해로운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 사람을 가까이하면 길이 열리고 내게 유익을 주는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수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면 손해를 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하나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면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정말 믿을 만한 하나님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죄인으로 있을 때,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하사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사랑입니다. 주는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직 우리의 할 일은 복받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부어주십니다.

열왕기하 4장을 보면, 엘리사 밑에 있던 생도가 갑자기 죽어 그의 아내가 과부가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그 당시에는 여자가 밖에 나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연히 남의 것을 빌려쓰게 되었고, 그 빚이 점점 늘어나다보니 채주로부터 빚 독촉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채주는 빚 대신 두 아들을 종으로 데려가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생각다 못한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찾아가 자신의 딱한 처지를 하소연 했습니다. 이 여인의 딱한 사정을 들은 엘리사는 집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작은 기름 한 병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엘리사는 “지금 이웃집에 가서 빈 그릇을 있는 대로 다 빌리라 그러고 나서 두 아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빈 그릇에 기름을 부어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이 “어머니 이제 그릇이 없어요”라고 말할 때까지 기름이 계속 흘러나와 빈 그릇을 가득 채웠습니다. 받을 그릇이 없다고 말했을 때 기름이 똑 떨어졌습니다. 그릇이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기름이 나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기름을 팔아 빚을 갚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한 가지 원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그릇만 준비되면 언제든지 넘치게 주고 싶어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주고 싶어하시는지, 열심히 달라고 안해도 됩니다. 그저 그릇만 준비하면 됩니다. 받을 그릇을 준비하는 방법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8,12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복이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갚을 길이 없으면서도 자꾸 빌려쓰다 보면 습관 이 되어 남의 돈도 자기 돈처럼 쓰는 못된 사람이 됩니다. 절대로 예수 믿는 사람은 빚지지 말아야 합니다. 규모 있게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꾸어줄망정  꾸지 마세요. 은행에서도 꾸지 말고 사람에게서도 꾸지 마세요. 없으면 하나님께서 금식기도하라는 신호인줄 알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0:13을 보면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면 누구나 타락하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말씀 가운데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라기 3:10을 보면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물질의 복입니다.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돈과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돈이나 물질이 많아졌을 때 하나님을 떠나고 타락하게 되는 것이 문제이지 돈이나 물질이 많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물질은 죄가 없어요. 어떻게 돈 이 죄를 짓고 물질이 죄를 짓습니까?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돈을 우상시하거나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인간이 문제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경기도 안산 경찰서에서 도둑을 잡아 구속하고 죄를 캐물었는데, 도둑질한 날짜가 모두 월요일부터 토요일이었고, 일요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경찰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토요일까지만 도둑질하고 일요일은 하지 않았소?”
그러자 그 사람이 벌컥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일요일이 뭐요? 주일이지.”

알고 보니 안산 어느 교회 집사였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그분이 도둑인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주일은 교회에서 봉사하고 월요일부터는 도둑질 하며 먹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직업은 도둑질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양심도 마비된 사람이고 이성을 잃은 사람입니다. 사람도 아니고 신자도 아닙니다. 돈이나 물질에 욕심이 생기게 되면 거짓말하게 되고, 도둑질하게 되고, 심지어 살인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되고 양심을 속이게 됩니다. 이 모두 마귀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8:3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아주 고약한 사람들입니다. 과부의 사정을 알아주는 척, 도와주는 척하면서 재산을 자기 앞으로 빼돌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ㅇ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요8:44).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19-20).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은 나누어 주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누면 없어지는 줄 알지만 나누어 주는 것은 하늘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물질의 원리를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돈이나 물질을 나눌 때 순서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이고, 그 다음으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유월절 엿새전에 나사로 집에 가셔서 대접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가 지극히 값비싼 나드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이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가룟 유다가 한마디 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러나 6절을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말라기 3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십일조는 한마디로 신앙 고백입니다
1)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십일조를 할 때마다, 헌금을 할 때마다 반드시 이런 신앙 고백을 해야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서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떤 분이 서울의 어느 큰 사립대학을 1,500억을 주고 인수했답니다. 이분은 수입이 아주 많다보니 자연히 십일조도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ㄷ 20억의 수입이 많다는 생각보다 십일조로 드릴 2억이 너무 커 보여서 하나님께 드리면서도 몹시 아까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고보니 그 전과는 달리 십분의 일만 드리는 것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이렇게 큽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십의 팔조를 드립니다. 자신은 십의 일조로 생활하고 나머지로도 얼마나 많이 나누고 사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분에게는 십일조가 너무 적은 겁니다. 그래서 십의 삼조도 드리고 십의 오조도 드립니다. 저도 십의 오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감동 안하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는지 안 부어 주는지 하나님을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가난한 성도들이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돕는 것은 주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5:32 이하를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형제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도와주었더니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는 것은 곧 예수님에게 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원리 원칙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40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고 선교사를 대접하면 선교사의 상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도자들을 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보내실 때에, 복음을 듣는 사람이 영접하지도 않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면 발에 묻은 먼지까지 그 집에서 떨어버리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마10:14). 이는 그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끼리 어려움이 있으면 외면하지 말고 서로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대접하는 것과 똑같이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대접하는 마음으로 주의 종들을 영접해야 됩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백배의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0:29-30).

본문인 고린도후서 8장을 보면, 사도 바울 당시에는 교회 안에 구제대상자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시대적으로 경제가 매우 어렵기도 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이나 조국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다 보니 집이 있습니까? 생활 대책이 있습니까? 아니면 어디 취직을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생활이 어려웠겠습니까? 특히 과부나 고아는 구제해 주지 않으면 살길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십일조 외에 반드시 구제 헌금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이후 큰 환난과 핍박을 받아 성도들의 생활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큰 위기에 빠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해주도록 고린도 교회에 부탁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1을 보면, 사도 바울은 먼저 마게도냐 교회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는 그리스 북쪽 지금의 발칸반도에 위치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레아 도시에 있는 교회들을 가리킵니다.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이 일에 동참했는지, 예루살렘 성도들을 향한 희생적인 사랑과 주님을 향한 헌신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주 풍성한 연보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구제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헌금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헌금할 돈이 있고 물질이 있는 것도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헌금할 마음과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줄 마음이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람을 위해 주는 것이 아깝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고, 오히려 기쁘고 즐겁다면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요한일서 3:18에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궁핍함으로 어려움 당하고 있는 현제들에게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행함으로, 진실함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실제로 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8:9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부요하게 사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하게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살 이유가 없는 분이지만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대신 가난해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남보다 돈을 잘 벌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렵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그 사람을 부요케 하다 보니 도리어 자신이 그들보다 더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주시고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매우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마게도냐 교인들은 예루살렘 교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교회에서 헌금을 모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것처럼 우리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줌으로써 지금보다 더 가난해진다면, 이는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복받는 행위입니다.

고린도후서8:11을 보면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전건축 헌금도 부담 갖지 마세요. 믿음대로 하시고 하나님 주시는 대로 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불과 몇십만원밖에 헌금 못했어도 다른 사람 몇억보다 정성이 있고 더 희생적인 헌금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헌금궤에 헌금하는 과부의 엽전 두푼을 얼마나 귀중하게 보셨습니까? 그 여인은 생활비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헌금보다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기도를 해야 믿음이 생기고, 기도를 해야 문제가 해결되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사업도 잘될 것 아닙니까? 기도하면 믿음 생기고,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하면 복받고, 그러면 헌금은 저절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키는 것입니다. 헌금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하다 보면 그동안 십일조 못 드린 것도 회개하게 되고, 남의 돈 갚지 못한 것도 회개하게 될 것이고, 얼마나 좋은 일이 많이 생길지 모릅니다. 있는 대로, 하나님 주시는 대로 하세요. 절대로 부담 갖지 마세요. 기도하고, 은혜 받고, 믿음으로 살면 돈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계속해서 13-15절을 보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있으면 나 혼자 먹지 말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유여한 사람, 다시 말해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집에 쌓아두지 말고 없는 사람과 나눔으로 해서 너와 나 사이를 똑같이 평균하게 하라는 것이 헌금의 원리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자람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은 것이 없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람이 없게 됩니다. 나눔의 법칙을 하나님 명령대로 실천하고 살면 얼마나 이상적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나눔의 생활을 철저해 해야 합니다. 물질의 나눔은 곧 고통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면 반으로 줍니다.

지금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먹을 게 없어 어렵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럴 때 그 고통을 혼자 당하게 하지 말고 내게 여유 있는 것을 모아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여 함께 나누게 됩니다. 물질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다 누릴 것을 누리지 않고 보내줌으로 해서 나도 예전보다 힘들어졌지만, 내가 좀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와줌으로 해서 그들의 고통이 줄어들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눔의 생활을 철저히 하면 모자람이 없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그 적은 것을 예수님에게 드렸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비록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가 담긴 아주 적은 것이었지만 예수께서 축사하시고 나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다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이 기적 속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나눔의 법칙을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적은 것 가지고 나누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물질의 어려움으로 생활에 고통을 당하고 물질의 문제가 풀리지 않으시는 분들, 하나님 앞에도 철저히 하시지만, 비록 나도 어렵지만 나보다도 더 어려운 사람이 나타나면 조금이라도 나누어 보세요.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번 지켜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9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헌금하도록 권면할 때, 먼저 디도와 두 형제를 고린도 교회에 파송했습니다. 그렇게 한 목적은 사도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절을 보면, 아가야 지방은 고린도 교회가 있는 지방을 가리키는데, 사도 바울은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할 때 그들 중에 뜨거운 몇몇 사람들이 준비하는 것을 보고 감동되어 고린도 교회가 일년 전부터 구제 헌금을 예비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전체 교인들이 동참을 한 것이 아니라면 사도 바울도 그렇고 고린도 교회도 망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염려한 사도 바울이 미리 사람을 보내 내가 너희를 이렇게 자랑했으니까, 내가 말한 대로 미리 헌금을 준비하고 있으라는 부탁입니다. 이렇게 준비 하여야 참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성전을 건축하나다고 하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하자.”

이처럼 누가 시키기도 전에 “나도 한몫 해야지”, “나도 한 구좌는 해야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헌금입니까? 6절에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헌금하는 것은 복을 심는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이것이 하나님으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착한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주십니다. 사실 도움 청하는 사람마다 다 돕고 싶습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고난받고 핍박받은 것은 다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의를 행하면 더 풍족히 주셔서 의의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안하는 사람은 점점 형편이 어려워져서 더 못하게 되고, 하는 사람은 더 할 수 있도록 더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분량과 헌금의 분량은 언제나 정비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면 헌금은 저절로 넘치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헌금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지난 해 수영로교회는 헌금이 넘쳤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이 넘쳤습니다. 어느 해인가 헌금이 적게 나온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왜 헌금이 적게 나옵니까?”했더니 하나님이 제 설교가 빈약해서 헌금이 적게 나오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말씀에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많은 헌금으로 인해 나타나게 될 효과와 영향력은 첫째, 유대인 교회들의 궁핍함을 해결해 주게 되고, 둘째,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서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들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겠습니까? 헌금을 보내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서로 기도해주는 아름다운 관계가 됩니다. 셋째,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넷째,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므로 복음 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려운 사람들을 적절한 때에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개 집사님 때문에 결정적으로 어려울 때 일어날 수 있었다고 진심으로 느낄 것입니다.

15절에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감격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값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모든 성도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철저히 나누어 주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4-19에서, 선교비를 후원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다”는 말로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이 헌금을 해주고 도와주었습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않고 사도 바울을 위해 보냈기 때문에 함께 고난을 나눈 것입니다.
수영로교회에도 도움을 청하는 편지가 수도 없이 옵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외면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나누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때 사기꾼이 아닌 이상 절대 거절하지 맙시다. 절대로 그냥 보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도 많이 실천은 못하지만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16-18을 보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에, 에바브로디도 편에 많은 헌금을 모아서 보내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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