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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땅을 고치리라 / 대하 7: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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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을 고치리라
역대하 7:12-16
홍정길 목사 (남서울은혜교회)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대하 7:12-16)

우리는 올 새해를 시작하면서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 새 아침을 맞이한다고 밤잠을 지새우며 해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동이 트는 모습을, 낙산사에서, 정동진에서, 포항에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새 천년에 해가 떠서 밝아지는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어두움이 사라지기를 마음으로 소원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일들이 저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를 소원하며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한 해를 마감해보면 물론 영광스럽고 복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은 이 민족이 통일의 거보(巨步)를 내딛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고 저는 확실하게 믿습니다. 그런가하면 김대중 대통령께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 누가 뭐라 해도 이 민족 역사의 귀한 경사 중에 경사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재현되기를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대와 희망은 해를 넘기는 이 시간에 우리 앞에 덩그러니 허전함으로 남았습니다. 그처럼 기세 좋던 주식은 반토막이 났습니다. 정치판의 계속 다투는 모습은 변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에 대해서 한마디로 표현한 일화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여당 당대변인 된 국회의원의 10살 먹은 딸이 아빠가 대변인이 되었다고 하자, "아빠 똥통인 되었네요"라고 하더래요. 대변이 '똥'이니까요. 그 소리가 그 소리죠. 그런데 어떻게 그 어린 꼬마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의 현주소입니다. 경제는 어떻습니까? 28세 된 젊은 아이가 한국 경제를 마음대로 주물러 곤두박질치게 만들 수 있는 이 허술한 경제 구조! 처음부터 경제의 모든 조직 자체가 거짓 숫자로 되어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국 경제가 소생할 수 있을까요? 그런가하면 이제 구조조정으로 대량 실업사태를 맞이하게 될 때 당하는 고통을 누가 변상해줄까요? 교육계, 그 곳은 늘 정직과 진리가 배어있을 전당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참 허술합니다. 재외국민 특례입학제도라는 제도, 우리 동포 가운데 해외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특례법으로 참 귀한 제도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제도가 이 땅에서 잠 못자고 열심히 공부했던 모든 아이들 마음 속에 타격을 주는 악한 제도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도 아무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뭐했는가요? 사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옷 로비 사건으로 시작된 한국 교회 추락의 모습이 만민중앙교회라는 이단 교회나, 이단적 성향이 짙은 할렐루야 기도원과 범벅이 되어서 이번에 에 대형교회의 문제점들이 보도된 것까지 도무지 얼굴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반 방송의 지적에 대한 한국 교회의 대응은 <언론대책위원회>를 만들어서 우리의 잘못은 전혀 시인도 하지 않고 MBC 시청거부운동을 한다고 합니다. 도무지 정신나간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MBC에서 우리에게 지적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게 대응하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되는데 우리 모습을 돌아보는 태도가 한국 교회에 전혀 없습니다. '과연 이 땅에 교회가 다시 회복되겠는가?' 하는 비감한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이러한 때에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이 민족 역사를 어떻게 바로 세울까 연구해야될 것입니다. 교육자들은 어떻게 내 자녀들을 바로 교육시켜야 될 것인가를 노력하고 연구해야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해야됩니까? 3천년 전 솔로몬이라는 젊은 청년이 왕이 되어서 자기 아버지가 그처럼 짓고 싶었던 성전을 아버지 대신 지어 하나님께 드리고 첫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전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올 해 농촌 사람들이 자기들이 키웠던 배추와 무를 뽑지 않고 그대로 쟁기로 갈아버렸습니다. 농사꾼들이 거두어들인 수확을 아무도 사주는 곳이 없어서 창고에 쌓아놓고 대책 없이 다음 환경만 변화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어려울 때입니다. 이 때 해야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해야된다고 말합니까?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여기 보니까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살고 있다면..." 그들은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그 이름을 믿는 인생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구약의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는 이렇게 해야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나는 그 분의 백성입니다. 그 분을 내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들은 온 민족을 위해서 구해야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문제까지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께 구하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1949년에 한국 교회가 분열되었습니다.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가 나뉘어졌습니다. 세계는 그 때 "한국은 이상한 나라다.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운다."고 했습니다. 대구서문교회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가 총회를 했는데 서로 멱살을 붙잡고 총회 대표 목사, 장로님들이 싸우니까 순경들이 강대상에 올라가서 "이 목사들아, 좀 조용히 해라" 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어코 나뉘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1950년 6월 25일날 6.25사변이 터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 값을 치루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이산가족 되어서 그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몇 주간 못되어서 부산까지 내몰린 우리 남쪽 정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교회 요청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 대표들이여, 이 주간이 우리 민족의 생사가 결정되는 중요한 주간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교회는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부산의 모든 교회가 꿇어 엎드려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당시에 쫓겨간 모든 교회 대표들은 부산의 한 교회에 모여서 목을 놓고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한국 참전 결정을 위한 UN총회가 뉴욕에서 있었습니다. 다른 데서는 모두 통과되었습니다만 마지막 관문인 UN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 5국의 통과가 남아 있었습니다. 한 나라라도 비토하면 그 거부권에 의해서 그 많은 국가들이 의논하고 결정한 것이 무효가 됩니다. 다른 데는 다 가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이 소련의 거부권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당시 소련 외상 비신스키(Vyshinsky)라는 사람이 UN 총회에 참석을 했었는데 상임이사국이 결정하는 그 마지막 회의에 참석을 안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자기 개인 일을 하다 늦어서 회의 끝나고 간신히 도착했다는 설도 있고요.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 분이 국제법 박사입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Dulles, John Foster)와 더불어 세계를 양분했던 명 외상 중의 외상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왜 이것을 기억하고 있냐면 초등학교 때 시험문제로 나왔었거든요. "소련외상 비신스키!" 제 나이 때 사람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자기가 참석하지 않으면 그 회의가 성립 안 되는 줄로 잘못 생각했답니다. 이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제법 박사이고 외교에는 귀신 중에 귀신이었다고 하는 그가 왜 착각하게 되었을까요? 우리 성도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이 성경도 말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내게 구하면"입니다.


겸비하고 기도하여...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됩니까? "겸비해서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잘난 것 같고, 완전한 것 같고,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왜소하고, 얼마나 추잡하고, 얼마나 무능력한지 그 분 앞에 서보면 당장 판가름납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했던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은 "티끌같은 나라도 주께 구합니다."(창 18:27)라고 자기를 티끌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모세는 타는 떨기나무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고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얼굴을 숙였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여호와여,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길래 그 시시한 곳에서 내 어릴 때부터 붙잡으셔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내 인생이 유치할 때를 스스로 아시지 않습니까? 내 초라할 때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내 모습입니다. 화장 한 모습 말고요. 하나님 앞에 서면 모든 화장은 지워야 됩니다. 그래서 겸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태도를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든지 겸손한 계곡을 향해 흐릅니다. 산 위에 떨어진 물은 낮은 계곡을 향해서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때 겸비해야 됩니다.


내 얼굴을 구하면...

두 번째로 그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는 탄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후회로 끝나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영광을 마주치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구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성경에도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5절 보니까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내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인다고 말씀합니다. 그 사실을 알았던 요셉은 범죄의 위기에서 이렇게 승리합니다. 아무도 안 본다고 하니까 그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목전에서 득죄하리요?" 그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사는 삶입니다. 다윗이 회개기도드릴 때에도 "내가 오직 주께만,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사오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냥 눈감고 독백하고 모든 한탄을 쏟아 붓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내 심령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서서 그의 영광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마주칩니다. 그 분의 입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고 내 입의 말에 그 분이 귀를 기울이십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세 번째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에서, "그 악한 길에서 떠나고..."입니다. 회개는 애통이 아닙니다. 회개의 시작이 애통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돌이켜야 회개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그 자리를 옮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방향을 옮깁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 내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내가 온전하게 주님께 순종의 삶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놓고 뒤에 토를 달기를 "지금은 말고요" 이것이 우리의 기도일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유명한 성자였던 어거스틴의 젊은 날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숯불을 손에 쥐고 "하나님, 이 숯불이 뜨겁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은 기도 안해도 됩니다. 손만 놓으면 됩니다. 그러면 안뜨거워어요. 그런데 숯불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뜨겁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를 불행케 하고 하나님 영광에서 떠나게 만드는 죄를 손에 붙잡고 "하나님 축복해주세요." 한다면 모순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겸비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 앞에 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잘못된 죄악의 길에서 돌이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합니다.


돌이켜야 할 곳

그렇다면 어디로 돌이켜야 됩니까?

첫째로 주님의 말씀을 소중히 하는 곳으로 돌이켜야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내 마음에 주의 말씀을 둘 때, 범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더러운 성경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깨끗한 성경은 내 마음을 더럽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살펴야 됩니다.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됩니다. 깨달은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순종해야 됩니다. 순종은 한번만 해서는 안됩니다. 습관이 되도록 순종해야 됩니다. 습관만 되면 안됩니다. 그것이 인격이 되는 순종으로 가야 됩니다.

두 번째로 주님의 날을 소홀히 하는 일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외할머니께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주일날 못도 박아서는 안되느니라. 못을 박는 것은 목수 일이다." 저희 어머님께서 단추를 달아주려고 하면 "주일날은 길쌈일 하는 것 아니다." 아마 여기 부산에서 신앙 생활하신 분들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고려파 교단을 잘 알 것입니다. 그 분들은 주일날 버스도 안탔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멀어도 꼭 걸어갔습니다. 고려신학교 학장님이셨던 박윤선 목사님이 주일날 후배 선교사가 미국으로 떠나는데 마중 나갔다가 주일날 버스를 탔다고 해서 학교를 그만두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처럼 너무 율법적으로 주일날을 지키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 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정신은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주께서 복 주시기로 약속하신 날,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깊이, 면밀히 검토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어떻게 주의 말씀으로 살았나를 볼 뿐 아니라 또 앞으로 주께 예배드렸던 그 복된 축복의 감격을 가지고 일주일을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를 깊이 준비하는 복 받을만한 마음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냥 많은 교인들이 성경은 일주일 내내 선반 위에 놓았다가 교회 올 때 먼지 한번 "후" 불고 "탁" 한번 때리고 옵니다. 그래서 '후탁 교인'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날,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인생으로 내 생애가 한 걸음 더 옮겨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이것을 사모하는 날이 주님의 날입니다. 이것을 회복해야 됩니다.

그런가하면 불화의 인생에서 화목된 생애로 그 생애가 바뀌어져야 됩니다. 내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고 싶으시지요?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아는 첫 번째 비결은 내가 지금 말하고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 가운데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이 보입니까? 나쁜 사람이 많이 보이는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을이 참 화목하고 좋은 사람들로만 차곡차곡 채워졌는데 그렇게 된 원인이 그 동네 복덕방 할아버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마을에 새로 이사오는 사람이 있으면 복덕방 할아버지가 집을 안내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이 "이 동네 사람들 인심이 어떻습니까?" 라고 묻는데, 그러면 이 할아버지가 "당신이 이전에 살았던 동네는 어떻습니까?"하고 되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살았던 동네 사람들, 어떻게 악하고 나쁘던지 내가 지금 이사올 때 기쁜 마음으로 옵니다."라고 하면 이 할아버지가 "이 동네는 거기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답니다. 그런데 "내 형제 같은 이웃들을 놔두고 오느라고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직장만 아니면 내가 그 사람들과 늘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여기는 거기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좋은 사람 눈에는 사람들이 좋게 보입니다. 나쁜 사람 눈에는 이 사람도 나쁘고 저 사람도 나쁘게 보입니다. 그럴 법 하지요? 내가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그 잣대로 옆에 있는 아무개 집사를 가리키지 마시고... "그 장로, 그 사람 말이야."라고 지적하지 마시고 그 잣대로 나를 재어보십시오. 이 불화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뵙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혐의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사람과 화해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화목된 인생으로 돌이켜야 됩니다.

네 번째로 복음을 증거하는 자리로 내 인생을 옮겨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서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아닙니다. 우리를 먼저 예수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그 발걸음을 돌이켜주는 열심을 우리가 회복해야 됩니다. 오늘 2부 예배 때 미당 서정주 선생 자녀들이 이 곳에 와서 같이 예배드렸습니다. 저는 故 서정주 선생님을 먼 빛에서는 봤지만 개인적으로 사귀어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날 새벽에 그 가족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사실 저희 아버지 예수 믿으셨거든요. 예배 드려주세요." 그래서 수요일날 아침 6시 반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장모님이 그렇게 믿음이 좋은 권사였고 부인도 좋은 믿음을 가진 분이었답니다. 온 가족이 서정주 선생님 신앙을 위해서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습니다. 5년 전 시애틀의 아들 집에 오셨을 때 복음 제시했는데, 그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서 통곡을 하셨답니다. 이 분이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까 한국을 떠나고 싶지는 않지만 미국에 가서 아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겠다고 통고하고 미국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에도 미당이 한국을 떠난다고 대서특필 되었었지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아들과 신앙 생활 충분히 하고 싶어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이 편찮으셔서 미국에 못가시고 소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려달라고 해서 함께 감격의 위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분을 모두 불교도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오랜 기도가 그 분을 돌이키게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멸망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냉담한 마음의 돌이킴이 있어야 됩니다. "주 예수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까지 구원얻는다." 믿습니까?

그리고 다섯 번째로 우리의 구체적인 나쁜 습관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거룩을 향해서 나아가야 됩니다.
내가 죄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 마음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내 죄를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생애를 세워보면 내 삶이 얼마나 나쁜 습관으로 점철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거기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거룩으로 그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땅을 고칠지라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그 악에서 떠나 겸비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하면 세 가지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 "...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땅을 고칠지라" 첫 번째로 듣고 입니다. 두 번째로 죄를 사하고, 세 번째로 그 땅을 고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십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땅을 고쳐주십니다. 이 땅의 운명이 김대중 대통령께 있지 않습니다. 김영삼씨나 전두환씨에게 있었던 것 아닙니다. 새로 미국 대통령이 된 부시에게 있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이 땅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참으로 내게 바로 나오면 이 땅을 내가 고치리라."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성경의 전 진리가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받은 것은 그 땅이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 짓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 땅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애굽을 7년이나 축복하셨습니다. 그것은 애굽 사람을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 한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서 애굽을 7년이나 더불어 축복하신 것입니다.

1987년도였습니다. 최루탄으로 서울시가 가득 차고, 젊은 학생들은 분신자살하고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6월 10일 즈음에 제 2회 북미 유학생수련회가 열렸습니다. 그 모임에서 400여 명의 학생들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통곡으로 바뀌었습니다. 몇 시간을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끝난 다음에 전두환씨가 자기 계획을 백지화시키겠다고 약속하고, 얼마 있다가 6.29 선언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하는 것이 민족 역사에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때 이 땅을 고쳐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의 교육을 내가 고치리라. 이 땅의 정치를 내가 고치리라. 이 땅의 노사문제를 내가 고치리라. 이 땅의 경제구조를 내가 고치리라." 우리가 지금까지 고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왔지만 악은 더 많은 꾀를 내서 얼마나 많이 우리의 노력을 무산시켰습니까?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고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큰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땅의 운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진실된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죄악에서 돌아서서 겸비해서 그 얼굴을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하나님께서 그 땅의 죄를 사해주실 뿐 아니라 그 땅을 고쳐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한 해를 이처럼 쓸쓸하고 허전하게 마감하지만, 새 해에는 다른 사람 핑계대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른 자세로 서겠다고 결심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 속에 넘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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