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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같이 큰 구원 / 히 2:1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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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전준식 목사  (신림교회)
제목 : 이같이 큰 구원
본문 : 히브리서 2장 1절 - 4절


지난주에는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이 되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복권이 당첨 된 소식을 들으면 누구나 나도 한번 복권을 사 볼 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나라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꼭 나쁘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복권 문화에서 오는 피해는 만만치 않습니다. 언젠가 복권에 당첨되어서 많은 돈을 손에 쥔 사람들의 그 이후의 삶을 추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되어서 잘 살 것만 같았던 그들은 대부분 가정이 깨어지거나 삶을 건강하지 살고 있지 못한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없었기에 자기에게 걸머 쥔 돈으로 방황하고 방탕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의 인생은 나그네의 삶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순례자의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나그네 인생과 순례자인생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나그네는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루 길을 가다가 해가 지면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자리 깔고 자는 사람입니다. 나그네에게는 돈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얻어먹으면서 만족하는 게 나그네 인생입니다. 나그네는 권력도 귀챦습니다. 나그네는 자식도 귀챦습니다. 그럭저럭 자기 한 몸 유지하며 살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순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순례자는 목표가 있습니다. 순례자는 무감각하게 살지 않습니다. 늘 나침반을 열어 놓고 갈 길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순례자는 돈도 필요로 합니다. 자식도 소중합니다. 아내도 남편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적 인생은 나그네라기보다는 순례자요 항해하는 인생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나그네 같은 인생이 아니라 순례자의 인생이요 항해하는 인생인 것을 믿습니다. 순례자의 인생을 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축복하셨고 또한 앞으로도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그러므로 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1절
그러므로 라는 단어는 무엇을 받는 접속사입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과 천사 중에 누가 더 우월하신 분인가 비교를 했습니다. 그 비교에서 천사와 예수님이 전혀 비교 할 수 없게 되는 결정적인 것은 천사는 절대로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된다는 진리였습니다. 때문에 그러므로 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성도들아!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생의 항로를 나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고장난 인생이요 떠내려가는 인생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많은 금은 보화를 실은 배가 있다 할지라도 그 배의 키를 선장이 붙잡고 있지 않으면 그 배는 표류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보물 지도이면서 나침반입니다. 이 둘 중에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 위에 부으신 축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인 축복 만 아니라 물질적인 축복을 수많이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표류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침반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존재 목적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존재 이유를 상실한 한국 교회는 점점 YMCA나 LIONS 클럽 같은 동호인 모임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천사 같은 도움 주는 예수님만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기보다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키를 들고 있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절에서 경고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등한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등한히 여기면 영적인 타락과 부패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타락과 부패는 말씀을 듣고 등한히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두움의 세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도록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를 먼저 공격합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장소를 가급적 멀리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접촉 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게 합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에는 절대로 나가지 않습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 모임에 나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교인을 헐뜯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가 일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소중합니다. 저는 우리 신림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번 주님의 명령으로 선포합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요 건강한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신림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에 의해서 표류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명령은 크게 3 가지입니다. 그것은 선교명령이요 사랑 명령이요 이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신 문화명령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을 그리스도의 문화로 바꾸는 명령입니다. 특별히 성도님들께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사업장을 그리스도께서 경영하시는 사업장으로 바꾸라는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의 사무실을 예수님이 원하시는 문화로 바꾸십시오. 밀거래 하지 않는 문화로 바꾸십시오. 여러분이 사무실에 책임자라면 룸 사롱 가지 않는 원칙을 세우면서 그리스도의 문화를 세워 나가십시오. 학교에서 컨닝하지 않는 문화로 바꾸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저는 소망합니다. 저는 앞으로 베트남에 사업을 하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고 싶은 마음보다 그리스도의 문화를 그 땅에 심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산주의 나라에 자본주의의 독소들이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자본주의의 썩은 독소가 흘러가는 그 곳에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선포하고 성도들이 힘을 합쳐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투명하고 진실 되게 사업을 하면서 그들에게 올바른 것을 심어 준다면 그들 가운데 거룩한 기업가가 나올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업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버는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많이 벌게 되어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는가가 중요합니다. 출세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출세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고 나에게 주어진 출세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축복 받은 것만큼 소중한 것은 그 축복을 지키는 것 또한 소중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한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돈이 많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돈으로 선한 구제 사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이 돈 때문에 내부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 미망인에게 구제비를 조금 덜 준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파 유대인 미망인에게 더 많은 구제비를 준 것입니다. 이때 사도들이 하는 행동이 우리의 갈 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이들이 이 문제에 개입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도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겠다 고 선포하고 기도와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 이유는 영적인 지도자들이 말씀을 보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인정하고 다시 본질로 돌아 간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고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부흥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본질로 돌아가십시오. 말씀을 들으십시오. 간절히 사모함으로 듣고 또 들으십시오.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열정을 가지고 들으십시오. 주님이 우리 각자 각자에게 주신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은 절대로 떠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파괴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절대로 부흥합니다. 우리 교회 올해의 표어는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성장하려면 꼴을 먹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 고파 합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며 먹고 먹을 것만 있으면 먹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먹기를 바랍니다. 먹고 성장하십시오. 성숙하십시오. 부흥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왜 이토록 말씀을 소중히 하고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3절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지금 히브리서를 읽는 성도들이 복음을 거부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거부가 아니라 등한히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본문이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저나 말씀을 듣는 자나 어떤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오십니까? 간절히 사모하시면서 나오십니까? 저는 영적인 위기를 순간 순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목사로서 늘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고 새벽기도회도 나오고 성경을 늘 옆에 끼고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가 굉장히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매우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영적이지 못하고 경건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메말라 있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느 덧 설교를 위한 설교를 하는 설교 전문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겨 말씀을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때가 되니 척 성경책 펼쳐놓고 설교하는 설교 전문가가 된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주일이니 나오는 주일을 지키는 주일 전문가로 나오셨습니까? 말씀을 들어도 목사가 하는 이야기 다 그렇지 뭐. 난 저 이야기 30년 동안 들었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등한히 입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기록한 이 저자는 이것을 등한히 여기지 말자고 권면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주 큰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큰 구원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작은 구원이 무엇입니까? 작은 구원은 큰 구원을 예시하고 예표하는 구약의 제사들입니다. 염소의 피로 송아지의 피로 드리는 제사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제사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사는 인간에게 작은 위로만 줄 뿐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지은 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사들입니다. 이런 제사는 우리의 본질적인 죄를 속량하여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적인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린 아주 큰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큰 구원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피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위대한 것을 경험하면 나머지 것은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재 작년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 있는 에딘버러 성을 구경했습니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전쟁하면서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성입니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윈저 성을 방문했습니다. 같은 성이지만 에딘버러 성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성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만리장성을 보고 오신 분이 남한 산성을 보면 성 같지도 않다는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놀람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구원을 받은 우리는 다른 어떤 사상이나 종교를 봐도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 구원은 어떻게 선포되어 집니까? 첫째로 3절을 다시 보면 주님이 제일 먼저 이 큰 구원을 말씀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죽은 후에 종교학자들이 모여서 복음의 체계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직접 자신이 가장 큰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들이 진리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내 사상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믿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목사의 말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라고 친히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1절은 우리 앞에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허다한 증인들은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본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은 미전도 종족들은 믿음의 증거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역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선교 명령에 우리는 순종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명령에 순종하는 사역자들을 앞으로도 계속 세워 나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4절의 말씀처럼 그들을 통하여 표적과 기이한 일들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증언자로 사용하셔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표적과 기사들이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 증언자들이 누구입니까?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가장 큰 구원을 말씀하신 그 복음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우리가 이 땅에 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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