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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망의 공동체 / 엡 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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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희망의 공동체
말  씀 : 에베소서 2:11~22
임정석 목사  (대구평강교회)

내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인.. 가정, 교회, 직장, 사회... 이러한 공동체는..
나에게 무엇인가? 어떤 의미의 공동체인가?

과연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는... 나에게 희망을 주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나를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 공동체인가?
또 나는..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를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어떤 기도를 하고 있으며
어떤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설교는 이렇게 “희망의 공동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몇 공동체를 간략히 소개하고
이어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과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겠는가?....
그 대안을 제시하는 순서로 설교를 진행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이란 혼자만 잘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속에서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는 희망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며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가서야 되겠느냐..란... 말도 있듯..
희망의 공동체 구현을 위한 노력이 분명히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선뜻 나서기 주저했고
때론 시도하다가 반대나 회유, 시련에 봉착하게 되면 그 뜻을 접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끗꿋이... 그 수많은 세월을... 오직 일관된 믿음과 끊임없는 기도로
희망의 공동체 실현을 위하여 애쓰다가 금년 여름 81세의 나이로 천국에 가신 분이 있는데
그분은 강원도 황지 『예수원』(Jesus Abbey)을 설립한
대천덕 신부(Reuben Archer Torrey Ⅲ)입니다.

한번은 제가 몸담고 있던 교회의 교역자 수련회에
이 대천덕 신부를 강사로 모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천덕 신부께서는 겸손하게 자신의 신앙과 삶을 진솔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그때 저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희망의 공동체 건설을 향한 그의 강한 의지와 꾸준한 노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대천덕 신부는 천주교 신부가 아니라 성공회 신부로서
1918년 1월 19일 중국 산둥성에서 중국 선교사인 토레이 2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는데.. 자라면서 중국사람들의 가난을 수많이 목격하였으며
중국 사람들의 가난을 목격하면 목격할수록...
기독교인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니 자라면서 점점 사회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그는 미국의 데이비슨 대학과 베이징 옌징 대학, 프린스턴 대학, 하버드 대학 등
7개 대학과 영국 성어거스틴 대학원에서 공부했는데
공부도 공부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건축기사 노동조합과, 흑인해방운동에 참여했는데
참여해도 뒷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최전선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뛰었습니다.

그러다 대천덕 신부는 1946년 28세에 사제로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제가 된 이후 동료 사회운동가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 전도 받은 사람은 많았으나.. 전도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천덕 신부는 깊은 고민과 사색 속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이럴까?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는데
그들은 왜 하나님께로 오지 않는가? 기독교 신앙과 사회주의는 결코 조화될 수 없는가?”

그러던 어느 날... 한국으로 발령 받게 되었습니다.
1957년, 지금으로부터 35년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37세.
현재 성공회대학의 전신인 성미가엘 신학원을 재건하라는 임무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에 와서 초기 8년 동안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 임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어느 정도 전척되었을 무렵인 1965년
몸 담고 있던 성공회 신학교를 사임하고는 강원도 태백의 산골짜기 마을인 황지로 들어가
예수원이라는 공동체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 것으로서
이 예수원이라는 공동체가 바로 희망의 공동체 실현을 위한.. 한 몸부림이란 것이며..
예수원에서의 희망적인 사역 두 가지를 꼽자면 그 첫째는 기도를 들 수 있겠습니다.

예수원의 기도 방식이나 기도 내용은... 이제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원의 기도란 어떤 기도냐?
무작정 매달리고 떼쓰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주님께 기도로 아뢰고 맡기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며.. 공급해 주시는... 기도이며
그렇게 해서.. 날마다 기도하며..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돈, 즉 재정에 대한 것입니다.
산골짜기에 공동체를 설립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땅을 구입하는 일이라든지.. 그 위에 집을 짓는 일이라든지...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살아갈 운영비라든지... 모든 것은 다 돈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또 그 돈은 현실적으로 턱없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천덕 신부가 지향한 자세는.. 한 번도 외부에다..
“우리는 지금 돈이 부족합니다. 기도해 주십시요. 돈을 좀 기부해 주십시요” 하면서...
알리거나 요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간구하고... 그 다음에는 평안하게!!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돈을 주시면 일을 하고... 돈을 주시지 않으면 기다리는...
그런 자세로 사역해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삶이나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맡기고 살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것을 소개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 대천덕 신부와 그가 몸담고 있는 예수원을 방문하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희망을 느끼며!!.. 주님의 간섭하심, 주님의 임재하심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나 기독교 공동체가 이 땅에 많이 있지만
과연 얼마만큼 그 공동체가 소속원들에게 희망을 주며 믿음을 주는가 생각해 볼 때
부끄러운 공동체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가정이라는 공동체나..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정말!
믿음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그래서 소속원들에게 희망의 공동체가 되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부단히 노력해가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헨리 나웬의 삶의 변화시킨 장 바니에(Jean Vanier)라는 분이 쓴
『희망의 공동체』(두란노)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참 좋은 책입니다.
그 책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 장 바니에..라는 분은 1928년 캐나다 총리의 아들로 유복(有福)하게 태어난 사람으로서
13세의 어린 나이에 캐나다 해군에 입대하여 8년간 군복무하고
제대 후 철학을 공부하여 철학 박사가 되고 철학 교수가 된 사람이지만...
어느 날 프랑스의 한 정신요양원을 방문하여 정신지체장애인들을 만나는 것을 계기로 하여
누가봐도 안정적이던 교수직을 사표 내고 프랑스의 트로즐리 브뢰이(Trosly, Breuil)에 있는
자기 집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2사람과 함께 공동체의 삶을 시작했는데..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냐?.. 겉으로 보기에는 힘들고 어렵고 초라한 공동체이지만..
바로 이 공동체가 곧 희망의 공동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저에게 깊은 감동을 준 말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에게로 부름을 받았습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처음 주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후..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나 혼자만 잘 믿다가 죽어 천당 가라고 하나님이 나를 부른 것이 아니고!!
물론 죄인이 예수 믿어 구원함을 얻고 생명을 얻어 복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다음에는 반드시!!.. 그 부르심과 축복이!!... 다른 사람으로 향해야만 한다는 것인데!!
전도나 선교로든지.. 섬김과 봉사로든지 간에.. 다른 사람에게로!!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격도 다르고.. 자라난 배경도 다르고.. 건강 상태도 다르며..
특히 믿음의 내용과 믿음의 스타일도 다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 위하여 기도해 주는...
이러한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냐?.... 바로 희망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장 바니에씨가 실험적으로 시도한 그 공동체는
비록 정신지체 장애인 두 명과 함께 살아가는... 아주 작은 가족 공동체였지만
이 공동체가 바로 방금 소개한 복음성가 가사처럼
정신지체장애인들도..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것을 가르쳐 주고 실천하는...
희망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 바니에씨는 그 공동체 이름을 무엇이라고 불렀는가 하면 라르쉬(R'Arche)..
곧 방주(方舟)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 속에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것을 시도하고 노력하는 그 속에! 이 사회의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소개하지 않은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서울 청량리에서 공동체 사역을 하는 밥퍼 목사 최일도 목사님과 다일 공동체, 천사 병원..
경기도 구리에서 공동체 사역을 하는 김진홍 목사님과 두레 공동체.. 
경기도 포천에서 공동체 사역을 하는 정태일 목사님과 사랑방 공동체..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구에도 살펴보면.. 우리가 몰라서 그렇고.. 관심이 없어 그렇지...
많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이순애 전도사님과 포도나무 공동체...
장애인들과 함께 사역하는 신경희 목사님과 둥지교회 공동체...

이 모든 공동체들은 다!! .. 이 어려운 시대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사랑으로 똘똘 뭉친
희망의 공동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런데.. 이제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희망의 공동체란.. 이렇게 반드시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참다운 공동체가 되고..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야만 참다운 공동체가 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소개한 공동체들이 아름다운 공동체요.. 희망의 공동체임에는 틀림없지만
오직 이러한 것만!! 참다운 공동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는 많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중 첫째를 꼽으라면... 우리가 몸 담고 살아가고 있는 가정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 가정 공동체를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며.. 기도하며..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가정이 희망 공동체가 되느냐.. 아니면 갈등 공동체가 되느냐..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창조한 공동체는 딱 두개입니다.
하나는 가정 공동체요, 하나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 두 공동체에 하나님은 큰 기대를 거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성경을 살펴보면 가정은 교회같이 되기를 원하시고
교회는 가정같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공동체
부모는 자녀들을 주의 말씀과 교양으로 훈계하는 공동체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는 공동체
그러면서 가정의 질서는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 남편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으로 분명하게 되어 있는 공동체
이러한 공동체가 가정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교회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는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인 것 처럼... 서로 하나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의 원리와 똑 같습니다.
부부는 둘이지만 하나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나될 때 진정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 처럼!!
교회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주 안에서 서로 하나되고 일치되는 역사가 일어나야만!!
교회가 진정으로 믿음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이 어두운 세상에서 진정한.. 희망의 공동체로 우뚝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에베소서 4:1-6)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가정 공동체나 교회 공동체나..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되고도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가 잘 안되는 것입니다.
노력해도 안되고.. 양보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왜 하나 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까?

이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좀 길지만.. 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서로 하나 될 수 없었고!!
노력해도 하나 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곧바로 하나 된 것이 아니라!!........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된 것이 아직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노력하며.. 성령의 역사와 인도 속에
가까워지기만 할 뿐 아니라 온전히 하나 되도록 힘써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좀더 보겠습니다. 14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직 완전히 하나된 것은 아니지만... 서로 서먹서먹하고 어설픈 관계이긴 하지만!!
중간에 막힌 담을 주님께서 헐어버리셨으므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어떻게 살라 하시는가?
15절 16절 말씀처럼.. 화평하라.. 화목하라!!........... 화평한 삶, 화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 안에 다 들어와 있기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
과거에 서로 미워했던 사람들이나.. 서로 소원(疎遠)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세로 가까이 다가가서 서로 화평하고 화목하여...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되야 하는가?... 15절 16절과.. 18절에 있는 말씀처럼.. 
한 새사람, 한 몸이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열된 상태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화평과 화목과 하나됨을 이루어가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래야만이!
교회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가 정말 방주로서의 공동체가 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우뚝선... 희망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9절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가 몸 담고 살아가는 공동체인 가정이나 교회를
어떻게 하면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는 측면에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것을 포기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정말 사람들은 다양합니다. 다양한 성격.. 다양한 습관..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정 속을 들여다 보아도 그렇고.. 교회 속을 들여다 보아도 그렇습니다!!
다 제각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결국에 가서는 하나되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중간에도 말씀드린.. 장 바니에(Jean Vanier)라는 분이 쓴 책
『희망의 공동체』는 그 책의 영어 제목이... 한글 제목과는 달리 이렇습니다
- From Brokenness to Community

저는 책 제목이 참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희망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그 공동체 구성원이 취할 행동은.. 다른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고!!.. 자기 자신을 부숴뜨려야만!!
그때... 희망의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제가 어떤 분으로 부터 직접.. 이런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저의 어머님이 늘 부엌에서 찬송 부를 때... 이런 찬송을 불렀지요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렇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과연 나는.. 구주와 함께 죽었는가?
나는 내가 몸 담고 있는 공동체 속에서.. 구주와 함께.. 내가 죽었는가?
그래서.. 죽은 나 때문에!!.. 부숴진 나 때문에!!..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희망의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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