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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라운 믿음 / 눅 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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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믿음  / 누가복음 7:2-10
홍정길 목사 (남서울은혜교회)


전도폭발 임상훈련을 받아보면 강의를 받은 다음에 강사의 강의 내용을 강의 받은 사람이 평가합니다. 평가서를 모아 누가 강의를 어떻게 하는가를 체크합니다. 또 두란노 목회자 세미나 할 때에도 마지막에는 강사의 강의가 어떠했는가를 채점합니다. 나중에 그것들을 모두 모아 강사들이 다음 강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반영합니다. 외국의 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제출한 강의평가서를 다음 학기 교수재임용에 참고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한번 뭐가 결정되면 평가를 않고 그럭저럭 지나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 생애를 발전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이 평가를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생을 평가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가장 멋진 평가를 다윗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그를 통하여 내 뜻을 다 이루리라."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내 마음에 합했다"(행 13:22)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멋진 평가입니까? 인생을 가장 깊이 아시는 하나님, 우리 밖도 아시고 안도 아시고 결과도 아시고 숨은 동기까지 아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 그것 못지 않게 멋진 평가를 받은 분이 오늘 이 누가복음 7장에 나타난 백부장이었습니다. 여기 성경은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셨다"(눅 7:9)고 말합니다. 이 말을 예수님께서 괴상하게 생각했다고 잘못 번역하기 쉬운데 원문을 보면 "예수께서 놀랐다, 크게 놀랐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리고 칭찬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오늘 주님을 놀랍게 한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백부장에게 있었던 귀한 것들이 구약 시대의 다윗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되는 것을 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 하셨던 칭찬과 신약에서 이 백부장을 향한 칭찬이 맥을 같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았던 백부장
그러면 이 백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로 이 백부장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2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군국주의 시대에 로마에서 특별히 백부장은 대단한 권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수많은 종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종은 필요 없으면 버리는 것이 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백부장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이라 이 종을 사랑했습니다. 쓸모 없음에도 사랑했습니다.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죽게 되면 귀찮은 일입니다. 심지어는 가족 가운데도 중병이 들면 문득 문득 귀찮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찮은 종이 병들었으니 보통 같으면 외면해야됩니다만 사랑할 줄 알았던 이 백부장은 고통 속에 있는 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 있습니다. 또 한 종을 사랑했던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5절에 유대 장로들이 예수님께 백부장이 어떤 사람인가를 소개하면서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백부장은 점령군으로 들어왔습니다. 당시의 세계 제일의 문화국가의 점령군이, 그것도 지체 높은 사람이 식민지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힘든 일입니다. 아니, 혼자 사랑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이 사랑으로 느낄 수 있으려면 보통 사랑해서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식민지의 모든 장로들이 저 사람은 우리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까지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은 언제든지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제가 읽었던 짧은 이야기를 소개해보겠습니다. 한 가정에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 어머니가 몹시 슬퍼하셨습니다. 그러다가도 예전부터 딸에게는 절대로 펴보지 못하게 만드는 한 상자를 열어보고는 싱긋이 웃고 다시 용기와 소망을 얻곤 했습니다. 그래서 딸이 생각할 때 '우리 엄마는 도대체 무슨 보물을 가졌길래 그것만 보면 그처럼 기운이 기진맥진해서 슬퍼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다가도 그처럼 화사하게 웃고 다시 기뻐하고 소망을 갖는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엄마가 잠깐 나간 틈에 이 딸이 그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싸고 싸고 싼 것을 펴보니까 깨어진 접시 조각이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문을 열고 뒤에서 들어오더니 "그것을 기어코 보고야 말았구나. 그렇게 보고 싶었니?"하고 말을 건넵니다. "이것이 뭔데 그렇게 어머니에게 소중합니까?"하고 딸이 묻습니다. "내게는 이것보다 더 큰 보배가 없단다. 옛날에 내가 한 남자를 몹시 좋아했단다. 그 사람과는 같은 교회를 다녔었는데, 어느 날 그 남자가 우리 집에 우연히 찾아오게 되었지. 그래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식탁을 마련하고 식사 준비를 했어.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겠니? 그런데 음식을 다 만들어 가지고 테이블에 갖다 놓으려고 그 남자가 앞을 지나다가 너무 긴장해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어. 접시는 와장창 다 깨어지고 음식이 옷과 바닥에 모두 쏟아졌단다. 어쩔 줄 몰라 몹시 쩔쩔매며 홍당무가 되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얼른 그 접시와 떨어진 음식들을 줍고 치우더니 그렇게 정성껏 준비한 것들이 다 깨어져서 자기 마음이 참 아프다고 내 등을 두들겨 주는거야. 그 다음부터 그 남자하고 사귀게 되었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단다. 그 분이 네 아빠다. 그래서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면 아빠가 나를 사랑했던 그 첫 번째 추억을 떠올리곤 하지. 이 깨어진 접시 조각을 보면서 옛날을 회상하고 다시 소망을 갖는단다." 그 하찮은 접시 조각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도 사랑하고 있는 한, 사람들이 귀해집니다. 사랑하고 있는 한, 빛납니다. 인생은 그렇습니다. 사랑할 때 그 상대가 귀해질 뿐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감격이 있고 기쁨이 있고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사랑했습니다. 몹시 사랑했습니다. 나중에 요나단이 죽었을 때 슬피 울며 어떤 여인과의 사랑보다 더 크고 놀라운, 오고 오는 우정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는 그런 멋진 사랑의 관계를 요나단과 가졌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부하 직원들도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베들레헴 가까운 지경에서 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부하들에게 과거의 추억담으로 해주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 이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고 살 때였다. 그 때 거기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이 꿀물처럼 달고 맛있었다." 이 이야기를 마음에 둔 그 부하들이 밤에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그 물을 길어왔습니다. 다윗이 그것을 받고 땅에 쏟으면서 이까짓 물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를 쏟게 할 뻔했다고 노했습니다.(삼하 23:15-17) 다윗은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요나단을 사랑해서 그는 요나단의 남은 자식들을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숨어있는 자식 가운데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을 왕궁에 부릅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말합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어떻게 왕이 만나자고 합니까?" 다윗은 이 므비보셋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되 자기 아들들과 똑같이 같은 식탁에 앉혀 평생 음식을 나눕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백부장을 칭찬하신 주님께서 다윗을 보시고도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의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얼마나 깊은 사랑을 하십니까? 나, 내 자식, 내 가족! 그것이 끝입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분 계십니까? 그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얼마나 삶에 의미가 없습니까? 감격 없는 생애를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우리 생애 끝나 하나님 앞에 갈 때 세 가지를 가지고 갑니다. 첫째로 나를 가지고 갑니다. 둘째로 전도한 사람을 데려 갑니다. 셋째로 사랑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갑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인생이 가장 비싼 것 가지고 가서 자랑할 수 있는데, 유일하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빈곤을 느끼십니까? 그 인생은 가난한 인생입니다. 사랑의 부요를 느끼십니까? 그 인생은 충만한 생애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영원 앞에 설 때 사랑의 하나님 앞에 영원토록 즐거움이 되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깊이 사랑했느냐와 비례해서 감격과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주께 칭찬 받았던 이 백부장,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 모두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헌신할 줄 알았던 백부장
두 번째로 이 사람은 헌신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 앞에 나아간 장로들이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에 주둔해서 그곳에서 새로운 종교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에 깊이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아가면 그는 이방인인지라, 그처럼 높은 로마인의 지체라도 이방인 뜰, 밖에서 초라하게 예배드려야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군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나는 그 진리에 속한 인생을 살기로 작정했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예배드릴 뿐 아니라 자기가 섬기는 그 하나님과 자기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회당을 지어드리는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헌신하는 사람은 반드시 드릴 것이 있습니다. 시간을 드립니다. 헌신하는 사람은 물질을 드립니다.
존 워나 메카는 세계적인 백화점 왕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어렸을 때 가난하기 짝이 없는 벽돌공의 아들이었습니다. 꼬마 시절, 교회에서 목사님이 교회를 새로 신축한다고 광고했습니다. 이 어린 소년이 나도 하나님 앞에 뭔가 바칠 수 있어야 되겠는데 드릴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찾아가서 "꼭 돈만 드려야 됩니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어린 소년이 기특하게 말하니까, "여기 벽돌로 집을 짓는데, 나무도 필요하고 못도 필요하고 벽돌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소년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아버지가 일하는 벽돌공장 사장님을 찾아가 말합니다. "사장님, 제가 학교 끝나고 오면 여기 와서 열심히 일할 테니까 일한 값으로 벽돌을 주세요." "뭐하게?" "우리 교회 예배당 짓는데 그 예배당 지을 때 벽돌이 필요해요. 저는 돈이 없으니까 벽돌을 드릴래요." 이 분이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방과후에 와서 어린 소년이 일하면 얼마나 했겠습니까마는 가상히 여겨서 나중에 "네가 싣고 갈 만큼 싣고 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욕심 껏 벽돌을 싣고 아버지는 앞에서 끌고 어린 아들은 뒤에서 밀고 새벽에 목사관에 왔습니다. 문을 두드립니다. 어린 소년이 벽돌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중에 그가 회상하기를 "그 때가 내 평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때였다. 우리 주님께 드리는 기쁨을 최초로 맛본 때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 그는 평생 약속하기를 어떤 때든지 고향에 돌아가서 반드시 주일학교 교사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주일학교에서 받았던 영적인 교훈이 평생 그와 같이 갔습니다. 미국의 체신 장관으로 발탁되었을 때, 그는 거절했습니다. 꼭 해야된다고 졸라대는 대통령이 거절하는 이유를 물으니까 "저는 주일이면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러 갑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약속했는데 국사가 바쁘면 못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못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그러면 주일날 주일학교에 가서 가르치도록 허락해주면 하겠는가?"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분이 체신부장관을 지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헌신된 마음이 있으면 드려집니다. 주님의 손에 드려집니다. 영원히 쇠하지 않는 손에 들려집니다. 영원한 기억 속에 들려집니다.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연변에 있는 연길교회의 규모가 3,400석 정도 됩니다. 3,400석이 얼마나 큰 예배당인줄 아세요? 우리 나라의 소망교회 정도의 규모입니다. 그런데 연길교회 지을 때보니까 어떤 늙은 할머니 권사님이 공사장을 돌아다니면서 있는 못은 다 빼서 그 못을 쓸 수 있도록 장도리를 두들겨서 한 묶음을 주 앞에 드리더라구요. 얼마나 멋진 선물입니까? 이렇게 생각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그 고생 안하고 주일날 낮에 잠깐 가서 하나님께 인사하고 기도는 식사기도로 때우고 헌신은 주일날 일정한 주일헌금만 드리고 끝! 얼마나 경제적인 신앙생활인가? 그 분들에게 경고합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부끄러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다 주신 그 분에게 부끄러울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때 그 분이 내게 주신 부요를 날마다 경험할텐데 드리지 못한 것 때문에 영원을 두고 후회할지 모릅니다. 시간을 헌신하는 사람은 드립니다. 재물을 헌신하는 사람은 드립니다.
이 사람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헌신을 불러일으킵니다. 헌신은 그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주 앞에 드리게 만듭니다. 다윗은 얼마나 드렸냐구요? 역사상 어떤 기록에도 다윗 보다 더 많은 황금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헌금한 금이 10톤 짜리 트럭으로 340대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부자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이 사람을 능가할 부자가 아직 없습니다. 헌신할 줄 알았던 사람,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기뻐했던 사람, 여호와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 미친 사람처럼 찬송하다가 춤을 춰서 허리춤이 빠져 벌거벗은 줄도 모르고 사람들의 비웃음마저도 잊어버린 채 우리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렸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헌신을 우리 하나님은 어느 때나 귀하게 보십니다. 심지어는 주님의 이름으로 드려진 냉수 한잔도 우리 하나님의 손에서는 헛되지 않습니다.

겸손한 백부장
세 번째로 이 백부장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겸손은 어느 때나 우리 예수님 앞에 선 인간의 가장 온전한 모습입니다. 그는 보무 당당한 육군 고급장교였기 때문에 식민지의 선생 정도는 우습게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유대 사람들이 랍비 경우에 이방인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줄 잘 알았습니다. 이방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수치로 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권력으로 그를 만나면 그가 만나는 줄텐데 마음속으로 불쾌하게 생각할까봐, 그는 직접 나가지 않고 자기가 같이 교제했던 장로들을 보냅니다. "나는 갈 수 없으니까 당신이 대신 가주십시오." 그것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 만나러 가실 때, 그는 자기 집에 있는 친구들을 보내서 예수님 앞에 나가 말하도록 합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눅 7:6-7) 4절을 보면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밖에서 사람들이 볼 때 주님이 그 집 가서 도와주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는데 이 사람만 "아닙니다. 주께서 내게 오심을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당신 앞에 나가서 무릎 꿇는 것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깊은 겸손입니까?
은혜는 법칙이 있습니다. 높은 산꼭대기의 물이 낮은 골짜기를 향해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심령을 향해 반드시 흐릅니다. 은혜가 내게 사라졌습니까? 그러면 가장 먼저 체크해야될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교만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내가 우쭐대는 부분이 없는가? 내가 정말로 겸손하게 섬겨야될 것을 잃어버린 신앙생활은 아닌가? 자기를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어디가 병난 줄을 압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만듭니다. 우리 주님이 겸손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참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 겸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앞에 바로 선 이 백부장이 겸손했습니다.
다윗은 얼마나 겸손했느냐구요? 다윗의 기록들을 한번 훑어보세요. 그는 자기가 고백할 때든지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길래 저 푸른 목동에서 나를 부르셔서 이곳으로 인도하셨습니까?" 심지어는 임종의 순간에도 그 노래를 부릅니다. 다윗이 그처럼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실패해도 아주 넘어지지 않았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겸손한 마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겸손은 그리스도인에게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도 덕입니다. 이슬람 제국에 왕 제도가 무너지고 칼리프 제도가 성립이 되었습니다. 종교지도자가 왕의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칼리프입니다. 그런데 칼리프 중에 유명한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귀족들이 자기를 찾아오니까 잘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귀족들과 대화했습니다. 이 귀족들이 모든 일을 끝나고 돌아갈 때도 문간까지 나가서 고개를 숙이고 잘 배웅했습니다. 귀족 중 어떤 사람이 칼리프를 만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겸손하면 권위가 손상되는 것 아닌가? 위엄이 무너지는 것 아닌가? 사람들의 경외심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 때 이 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겸손 때문에 무너질 위엄은 사라져야 될 위엄입니다. 겸손했기 때문에 경외로움이 빛을 잃는다면 그 경외는 틀림없이 가치 없는 경외일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온 이 사람,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나 그리고 주님을 놀라게 한 믿음을 가진 백부장이 겸손했습니다.

순종의 사람, 백부장
마지막으로 그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7절 보니까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7-8) 여기 재미있는 어법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이 단어가 무엇을 전제하는 줄 아세요? "당신도" 그 말입니다. "내가 황실의 권위 아래 속해 있습니다. 그 권위가 내게 임했기 때문에 내 부하들에게 가라 그러면 가고 오라 그러면 옵니다. 그 권위 아래 있기 때문에 내 종들이 죽을 때 가라면 죽을 때라도 갑니다. 그런데 내가 보니 당신은 하나님의 권위에 속해 있습니다. 창조주의 권위가 당신 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말씀만 하면 이 모든 질병은 다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이 땅의 권세에도 황실의 권세에 의존하는 권위가 있어 부하들을 마음대로 부리는데 만왕의 왕이시고 창조주 하나님,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 제가 그 분을 압니다. 보니까 당신은 그 분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런고로 당신은 말씀만 하시옵소서." 백부장은 예수님이 누구인줄을 똑똑히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늘 "내가 아버지께 속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늘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권세입니다. 그것을 이 백부장은 똑똑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말씀만 하사" 라고 요청합니다. 아마 그는 얼마 전 같은 지경에서 일어났던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 고침을 받은 일을 꼼꼼하게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오셔서 내 아들을 고쳐주소서. 내 아들이 죽게 되었나이다." 주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한다." 꾸중하셨지만 그래도 "어서 오셔서 내 아들을 고쳐주소서. 만져 주셔서 고쳐주소서." 그 때 주께서 "가라, 네 아들이 나았다." 했던 그 사건을 보면서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당신에게 속한 권세가 무엇인지 내가 잘 압니다. 그러므로 말씀만 하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우리 성도님들, 우리가 어느 권세에 속해 있어야 합니까? 이 백부장은 로마 황실의 권위 아래 있었기 때문에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 대통령은 백성의 투표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이 나라 장관은 대통령의 임명과 국회의 동의에 의해서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와 동일할 때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목사 말 믿지 마십시오. 목사가 이단으로 빠지니까 전 교회가 이단 되더라구요. 그것은 목사 말 믿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십시오. 가슴 아픈 것은 요즘 안정된 교회들에게서 자기 아들을 교회의 헌금으로 유학시켜서 자기 교회로 다시 불러오는 부자세습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해야될 대상인 이웃들에게도 비난받는 이런 일들이 지금 보편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예산을 자기 아들들의 사업체로 뽑아낸다는 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속하지 않은 것은 순종하지 마십시오. 제가 틀렸으면, 하나님 말씀과 일직선에 서 있지 않으면 믿지 마세요. 따를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될 것은 정말 그 분의 권위에 속해있는가 입니다. 거기에 내가 서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 일직선에 서있을 때만 목사의 말에 권위가 있습니다. 그 일직선에 서 있을 때 장로의 권위가 있습니다. 그 일직선상에 서있을 때 권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일직선에 서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빛이고, 소금 역할 할 줄로 믿습니다. 그의 권세 아래 내 생애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내 삶을 지배할 줄로 믿습니다.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주님을 놀라게 합니다.

우리 생애가 여러 모습으로 평가를 받아야 되겠지만 오늘 이 성경 본문 통해서 다윗과 백부장의 삶을 연결해서 보니까 네 가지의 같은 기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가? 헌신되었는가? 겸손한가?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가? 이 네 가지, 가장 중요하게 하나님께서 평가하시고 보시는 기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이 평가 기준에 합당하게 아름답고 귀하게 날마다 지어져 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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