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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한 감정을 치유하라 / 눅 7:31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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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상한 감정을 치유하라
본문 : 누가복음 7장 31-35절 
설교 : 황광민 목사 (석교교회)


어느 유대인이 쓴 책에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난폭한 운전기사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난폭하게 운전하는지 밥먹듯이 교통법규를 어겼습니다. 또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운전하는지 많은 사고를 냈습니다. 예루살렘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난폭한 운전기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예루살렘 회당에서 일생동안 성경을 가르친 랍비가 죽었는데 지옥에 갔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일생동안 성경을 가르친 랍비가 천국에 가야하고, 난폭한 운전기사는 지옥에 가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이런 해석이 나왔답니다. 난폭한 운전기사는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하지만 천국에 오게 한 것은 손님들이 그의 차를 타기만 하면 하나님을 찾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선생은 천국에 오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옥에 가게 한 것은 성경만 가르치면 모두 졸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설교는 영혼을 깨우는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7장 31-35절에 있는 예수님의 설교는 영혼을 깨우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평안히 잠들게 하는 설교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을 뒤흔드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다소 공격적입니다. 그는 심령을 파헤치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위로하고 복이나 빌어 주는 설교가 아니라 심령골수를 쪼개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설교는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들을 일깨우고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을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32절의 말씀입니다.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메마른 감정을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꼬집으셨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만 일삼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애곡하여도 울지 않았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다" 는 말씀을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연관시켜 해석했습니다. '애곡했다'는 것은 다가오는 심판에 대한 세례요한의 설교를 말하고 '울지 않았다'는 것은 가슴을 치며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피리를 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요, '춤을 추지 않았다'는 것은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3-34절의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삐뚤어져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감정은 메마르고, 진리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채, 비판만 일삼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지혜의 필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3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한 채, 비판만 일삼는 것이 결국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지혜가 필요한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다.

첫째, 진리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모습은 진리의 부름에 무관심한 것을 비유합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회개하고 천국을 준비하라고 외쳤으나 사람들은 무관심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했으나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들을 비유를 들어 책망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진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디즈데일리」는 "시간은 귀중하다. 그러나 진리는 더욱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B. A러슬은 "진리는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용감하게 직시하고 진리에 조화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처칠은 "진리는 인간이 보유한 것 중 가장 고귀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러스킨은 "진리를 찾기 시작할 때 마침내 인생은 새롭게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인물들은 진리를 가까이 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진리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고난을 통하여 얻어집니다. 러시아의 철학자 셰스또프는 진리에의 길은 고난의 길임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진리를 얻는데는 혜안과 명철로만은 부족하다. 진리를 얻으려면 극도의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 그것도 단지 보통의 의미가 아니다. 더럽고 추위 속에서 살면서 모욕과 고통을 찾고, 그 위에 시편 기자들처럼 고난 중에서도 진실을 추구하는 노래가 요구된다." 편안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진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안일하게 세상의 즐거움이나 찾는 사람은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무한히 값진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지극히 값진 보화입니다. 인생의 전부를 팔아서 사더라도 유익한 보화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상당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진리가 자기 생명 이상의 것임을 알고 진리를 구할 때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 조항의 논제를 공시함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진리를 위하여 일어났습니다. 권위에 대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때, 그 권위를 거스르면 죽을 수도 있는 위협적인 상황에서 용감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위협이 그에게 엄습해 올 때에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기왓장이 나를 거스를지라도 나는 진실을 추구하겠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진리 편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기 원합니다. 세상의 안일을 버리고, 세상의 즐거움을 멀리하고 진리를 위해 삽시다. 주님은 우리가 진리 편에 서기를 원합니다. 힘들더라도, 불편하더라도 진리를 따르는 성도가 되십시다.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는 것을 믿고 오직 진리를 위하여 삽시다.

둘째,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비판만 일삼는 사람들을 비유로 책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떡도 마시지 않고 포도주도 마사지 않는 금욕생활을 귀신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먹고 마시자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태도를 책망하셨습니다. 이러면 이렇다고 비난하고 저러면 저렇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부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안 좋은 것만 보입니다. 모든 것에는 긍정적인 차원과 부정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것만 본다면 이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왕이면 긍정적인 면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면을 보는 사람은 계속 성장하고 부정적인 면을 보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측면을 보는 자신의 눈을 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긍정적인 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며칠 째 밤을 세워가며 도박을 하는 남편을 랍비에게 고발하였습니다. 그 랍비는 그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였습니다. "그렇게 며칠 째 밤을 세워가며 도박을 하는 것을 보니 철야기도를 한다면 잘 하겠다" 얼마나 멋있는 평가입니까? 긍정적인 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을 할 때 큰 꿈을 가르치며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가르칩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이 너무 커서 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나(too big ti kill), 다윗은 골리앗이 매우 커서 돌팔매가 빗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too big to miss).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192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버나드 쇼(영국)는 20세기 최고의 유모 있는 멋쟁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번은 기자가 "긍정적인 인간과 부정적 인간의 차이를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식탁에 놓여 있는 위스키 병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거야 간단합니다. 이 병에 술이 절반 들어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술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람은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 길슨(M. Gilson)은 "슬픈 인간의 불행은 습관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실험에서 얻는 결과입니다. 구멍 두 개에 두 눈을 대고 상자 속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상자 속에는 두 장의 그림이 나란히 있는데 오른쪽 눈으로는 오른쪽 그림을, 왼쪽 눈으로는 왼쪽 그림을 보게 하였습니다. 한 그림은 슬픈 얼굴이고, 또 하나의 그림은 기쁜 얼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슬픈 얼굴의 그림만 보더라는 것입니다.

길슨 박사는 이것을 "인식의 차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는 태도가 어느 쪽 그림이 눈에 들어오는지를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슬픈 얼굴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기쁜 낯의 얼굴의 그림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즉 세상을 보는 습관이 행복에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인은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습니다. 성도는 밝은 면을 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좋은 면을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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