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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령한 교회 / 계 3:7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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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교회
요한계시록 3 : 7 - 13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요한계시록 첫 부분에 보면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런데 일곱 교회는 각기 전혀 다릅니다. 책망하는 것도 다르고 칭찬하는 것도 다르고 권면하는 것도 다릅니다. 정말 각기 다른 모습들의 교회들을 볼 수 있는데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이 이 세상에 현재 있는 교회들의 모습 그대로다. 이 일곱 가지 모습들의 교회는 현재 이 세상에서 다 찾아볼 수 있는 교회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 시대도 그렇고 그 후 사도들의 시대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꼭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이 일곱 교회가 교회 시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이라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에베소 교회는, 자세히 읽어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똑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주후 30년경 주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맨 마지막 제자, 사도 요한이 죽을 때까지, 즉 주후 100년까지의 역사적인 시대의 흐름을 이 교회가 대표한 것입니다. 두 번째 서머나 교회는 바로 100년부터 주후 312년까지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굉장한 박해를 받고 전부 지하에 숨어들어 갔던 때요, 콘스탄틴 대제가 바로 로마의 황제로 등극한 다음에 그가 기독교에 대해서 자유를 주고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313년 이후부터 590년까지가 버가모 교회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나라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때이므로 교회가 세상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 후 교회에서 학교 교육과 모든 권세, 정치를 주관하므로 암흑 시대가 되고 이성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암흑 시대가 절정을 이룰 때가 590년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590년부터 1517년 루터가 종교 개혁한 그 때까지 암흑 시대에서 깨어 일어나자는 것이며, 떨쳐 버리고 일어나자는 교회입니다. 종교적인 암흑시대, 이성적인 암흑시대, 문화적인 암흑시대에서 해방이 되기 위하여 종교 개혁을 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사데 교회는 1517년 종교 개혁할 때부터 1790년까지의 교회입니다. 이 기간을 왜 그렇게 잡는가 하면, 그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교리 문제를 가지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계속 싸우다 보니 은혜는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어떤 정열이나 어떤 영적 은혜는 전부 땅에 떨어져가고 교리만 가지고 따지다보니까 살았다 하지만 실상은 죽었다는 것이 바로 1790년입니다. 그 다음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런 교리만 따지고 은혜는 다 식어지고 영적으로 다 죽은 꽃과 같이 된 상태로부터 시작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1905년까지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부터 오늘까지는 말세, 즉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입니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나온 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신령한 교회'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는데 일곱 교회가 다 칭찬도 받았고 또 책망도 받았지만 이 빌라델비아 교회만은 책망이 없는 교회입니다. 칭찬만 있는 너무 좋은 교회입니다.


I. 예수 중심한 교회 (7 - 9절)


양쪽 높은 곳에 줄을 매고 외줄을 타고 건너간다고 합시다. 중심만 잡으면 위험한 곳이라도 가고 싶은데 까지 얼마든지 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을 잡으면 위기가 닥쳐와도 어디든지 다 갑니다. 그러나 중심을 못 잡으면 다 쓰러집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즉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 중심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잡으면 안 됩니다.


①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런데 그 예수는 누구냐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 다윗의 열쇠, 즉 왕의 열쇠를 가지신 이 -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7 - 9절)라는 그 분입니다. 여기에 예수 중심은 중심인데 예수님이 열쇠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 열쇠는 무슨 열쇠냐 하면 왕의 열쇠입니다, 왕의 열쇠는 그 누구도 간섭을 못 합니다, 왕이 왕의 창고를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아 놓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분이 왕입니다. 왕이 자기만 가지고 있는 왕 전용 보물창고, 그 열쇠를 예수님이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향해서 왕의 창고 문을 여는 날, 여러분들 가정을 향해서 왕의 창고 문을 여는 날 문제를 전부 풀어 주는 열쇠,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열쇠, 열쇠를 가지고 예수님이 여러분의 가정에 찾아오실 때 가정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문제, 사업문제가 해결되고 교회 안의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고 해결의 열쇠 가지신 예수, 이 예수 모신 교회가 신령한 교회요 예수 중심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② 문이 되시는 예수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8절).

열린 문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열린 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 양의 문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얻고 -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 자신이 문이 되시며 예수님 자신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문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은 전부 꼴을 얻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문으로 통하지 않고 담으로 넘는 사람은 도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꼭 예수를 통하여 교회로 나오고 예수를 통해서 어떤 일하는 사람은 풍성한 꼴을 얻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목자가 불러낼 때 전부 문을 통해 나갑니다. 문을 통해 나가면 목자가 인도하여 기름진 꼴을 배불리 먹이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서 물을 실컷 먹입니다. 그리고는 우리 안으로 또 문을 통해 불러들입니다. 우리는 서늘하여 거기서 실컷 자고 쉼을 얻습니다. 나가서는 꼴을 얻고 들어와서는 쉼을 얻고 저녁이 되면 초장으로 인도하여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양을 우리로 들여보냅니다. 파수꾼이 지키고 있으며 목자가 지키고 있습니다. 안전하게 잠자며 편히 쉼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문이 되십니다. 우리들 집 대문에 세상 온갖 재주를 가지고 문을 냈을지라도 신령한 믿음의 대문, 즉 예수로 문이 세워질 때 나가도 꼴이요, 들어가도 쉼이요, 나가도 생수요, 들어가도 안전입니다. 이런 문을 통해서 항상 풍성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③ 알고 계시는 예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8절 하).

첫 행위를 알고 계십니다. 적은 능력을 가진 것도 알고 계십니다. "내 말을 지키며 네가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배반한 일 없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 중심인데 알고 계시는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행위도 전부 알고 계십니다. 사람 볼 때 한 행동을 알지만 사람 보지 않을 때 한 행동도 알고 계십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적은 능력을 가진 즉 영적 밑천과 재산이 많은 것이 아니라 적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하나에서 열까지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핍박이 닥쳐올 때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굳게 믿음 지키고 배반치 않았다는 것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수고하고 애쓰고 괴롭고 심지어 울고 싶을 때 내 남편이 알아 줬으면 하지 않습니까. 내가 수고하고 자랑스러울 때 남편이 모르는 줄 알았는데 다 알고 은근히 나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줄 때 얼마나 만족스럽고 기쁩니까. 내가 속이 타고 안타까워 잠을 못 자고 바짝바짝 마르는데 남편이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남편이 알면 큰일입니다. 그런데 알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큰일날 줄 알았는데 미리 그런 이야기하지 혼자 고민하고 있었느냐며 다 해결해 줍니다. 내 남편이 다 알고서 내게 사랑을 베풀어주면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다 아시는 것을 찾아내어서 잘못을 질책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부족함과 소원을 다 알아서 칭찬을 할 것은 칭찬을 하고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 축복하실 것은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④ 사랑해 주시는 예수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9절).

사단의 회가 있는데 이름 자체가 사단의 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름지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9절 하).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겠다. 이것을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를 괴롭히는 사단의 회가 있는데 사단의 회는 유대인들로 조직되었습니다. 즉 빌라델비아 교회 나가는 이방인들 중에 자기 가족이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빌라델비아 본토인들과 또 기독교가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단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 떨어져 나갈 사람은 떨어져 나가고 뭉쳐질 사람들은 뭉쳐졌습니다. 그때에 무너질 것 같은 미약한 존재이지만 주님께서 다 알고 사랑해 주시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못된 사람들, 즉 거기서 우두머리 노릇하는 몇 사람들이 결과적으로는 너희들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고 손들고 예수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기세 등등하고 교회를 못살게 굴던 자들이 항복하고 예수 믿는 것을 보고 과연 하나님이 저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한 해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적은 능력을 가지고 적은 수로 모인 교회였지만 주님이 사랑하는 증거를 보여 준 것처럼 주님이 우리 교회와 가정에 사랑하는 증거를 꼭 보여 줄 줄을 믿습니다. 우리의 금년 기도의 제목 중에 첫째가 '예수를 중심한 교회'입니다. 열쇠를 가지신 예수, 열린 문 되시는 예수, 알고 계시는 예수, 사랑해주시는 예수 중심이어야만 합니다.


II. 평화스러운 교회 (10 - 12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10절).

다시 말해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주어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교회가 시험들지 않도록 지켜 준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시험에 들면 싸움이 벌어지고 난장판이 됩니다.


①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교회


어느 가정에서 부부가 자녀들 앞에서 싸움만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녀들이 무엇을 보고 느낍니까? 만나기만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기만 합니다. 그 집안은 천국 아닌 지옥 아닙니까. 그 집안이 평화로울 수 있습니까? 시험에 들면 가정이 산산조각이 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분파가 생기고 끼리끼리가 생깁니다. 교회 안에 싸움이 생깁니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럴 때에 신앙은 떨어집니다. 교인들도 떨어져 나갑니다. 손해만 납니다. 마귀만 기뻐서 춤춥니다. 이것은 시험에 든 교회요, 하나님이 지켜 주어야 이런 시험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교회는 평안한 교회입니다. 평안한 가정에는 아이들이 곱게 자랍니다, 공부도 열심히 합니다, 비뚤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됩니다. 평안한 교회에서 자라는 성도들은 바로 자랍니다. 봉사할 줄도 압니다. 믿음을 바로 갖고 바로 배우고 섬기며 나가서 평화로운 교회를 건설해 가는 줄로 믿습니다.


② 충성 봉사로 평화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생명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11절).


충성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무슨 봉사인가 할지 모르겠으나 보십시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게 하라." 굳게 붙잡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빼앗기고 이것을 놓쳐 버리면 안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 빼앗기면 전부 빼앗기고 맙니다. 장터에서나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돈을 얼마 가진 줄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돈이 떨어지면 축 늘어집니다. 토큰 몇 개밖에 없어서 주머니가 비어 있으면 맥이 빠집니다. 그러다가 십 만원 이십 만원 생기면 십 만원 이십 만원만큼 눈에서 생기가 돕니다. 천만원짜리 있으면 눈에서 천 볼트가 번쩍 하는 겁니다. 소매치기가 그것만 전공하는 사람인데 그것을 모릅니까? 다 가져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지켜야지 만일 빼앗기면 어찌하겠습니까? 그거 장사 밑천인데 다 털리고 나면 어찌할 것이냐 말입니다. 장사 밑천 털리고 나면 성공도 출세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총 재산은 믿음입니다. 마귀가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제일 잘 압니다. 돈 없는데 소매치기가 따라가지 않습니다. 믿음 없는데 마귀가 따라갈 필요 없습니다. 믿음이 큰 만큼 굳게 지키십시다. 그리고 믿음으로 면류관 받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충성 봉사로 면류관 받습니다. 충성하고 봉사하는 그 삶이 면류관을 받는다는 예를 들어 봅시다. 베드로 같이 젊어서 부름 받아 충성 봉사하여 마지막에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그렇게 충성 봉사한 사람과, 강도, 살인, 간음, 별짓을 다하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구원하소서" 호소하는 강도와 구원은 같이 받습니다. 그러나 강도에게는 면류관이 없습니다. 충성과 봉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어서 예수 믿으며 충성하는 것, 그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그것을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하는 사람은 손으로 합니다, 몸으로 합니다, 발로 합니다, 절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안 하는 사람은 말이 많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는 문제입니다. 충성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은 말없이 합니다. 충성 봉사하는 교회가 바로 평화스러운 교회입니다.


③ 하늘에 속한 교회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2절).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하는 말씀이 너희들 머리 위에 내가 세 가지 이름을 쓰겠다 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 둘째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셋째는 예수님의 새 이름입니다. 세 이름을 새기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3중 서명입니다. 하나님 혼자만이 서명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서명한 것도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도 서명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늘의 세계를 말합니다. 너는 하늘의 시민권을 얻었다 바로 그 말입니다. 우리들 심령 속에 주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이름 새겨진 서명을 받은 신자, 하늘에 속한 신자, 이런 신자는 하늘의 것을 사모합니다. 하늘의 것을 좋아합니다. 하늘의 것에 대해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뜨겁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때로는 불평 반역이 일어나는데 그때 불평과 반역의 시작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그때 순수한 이스라엘 백성만 나오지 않았고 다른 민족들이 섞여 나왔는데 이스라엘 백성 대열 속에 섞여 있던 이스라엘 아닌 여러 잡족에서 나왔습니다. 교회 안에도 하늘에 속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된 사람, 하늘에 속한 신령한 신자도 있는가 하면 다른 잡족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서는 반드시 불평이 나오게 돼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사람, 신령한 교회는 평화스러운 줄 믿습니다. 그래서 평화스러운 교회는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교회요, 충성 봉사하는 교회요, 하늘에 속한 교회입니다.


III. 바로 배우는 교회 (13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3절).


① 스승 되시는 성령


내가 학생이 되어서 공부하려면 첫째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선생이어야 합니다. 정말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됩니다. 국민학교 안에도 좋은 선생이 있고 엉터리 같은 선생도 있습니다. 좋은 선생이 맡은 반과 좋지 못한 선생의 반은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 인생 공부하는데 좋은 선생을 만나면 인생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목사도 선생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 가르치는 선생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참 선생이 있습니다. 성경을 목사가 아무리 가르쳐도, 먹여 주듯이 가르쳐도, 이해가 잘 될 만큼 가르쳐도 성령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깨달음에서 끝납니다. 성령이 가르쳐 줄 때는 감동이옵니다.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생활에 반영됩니다. 그것은 목사가 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스승 중의 스승입니다. 성경에 보면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스승이 되사 가르쳐주고 깨우쳐 주실 때 들으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최고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성령께 배우는 사람은 바로 배우는 사람입니다.


② 모이는 교회


선생님이 있은 다음에는 우리가 어디에서 배우게 됩니까? 학교에서 배웁니다. 요즈음은 국민학교나 겨우 졸업해 가지고는 아무 학원에나 나가서 열심히 공부하여 중학교 과정 고등학교 과정 마친 후에 속성과로 대학교에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성과로 배운 사람과 정규 과정을 밟아 배운 사람과 사람 됨됨이 다릅니다. 글자 익히는데는 어쩌면 그것이 더 빠를지는 모르나 사람은 글만 아는 것으로만 사람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밟아야 할 과정을 다 거쳐 나아가면서 훈련을 쌓아야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과정을 잘 밟으면서도 스승을 만나 글자만 배운다면 스승도 아니고 학생도 아닙니다. 제자도 아닙니다. 선생님에게서 그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학원에 가서는 인격을 못 배웁니다. 글 배우면 다 끝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정규 과정을 다 거쳐가야 됩니다. 학교 밖에서도 지식은 얻습니다. 그러나 인격형성에는 도움이 안됩니다. 꼭 과정을 밟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배우느냐. 바로 배우려면 성령에게서 배우고 두 번째 배우려고 하면 학교와 같은 교회에서 좀 지루한 것 같아도 이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입니다. 1년, 2년, 초급, 중급, 고급반, 베델 성서반을 밟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이웃과의 교제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성인들의 삶을 통해서 신앙 인격을 건설해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 아는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신앙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③ 원리가 되는 말씀


바로 배우려면 좋은 스승이 있어야 하고, 좋은 학교에 가야 되고, 다음으로는 책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선생이 있고 좋은 학교가 있더라도 책이 없으면 배울 수 없습니다. 좋은 교과서는 원칙 문제, 원리 문제만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전부 이해하고 통독하면 그 다음의 문제는 응용하는 것입니다. 교과서는 원리만 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활이 다 써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바로 배워야 하는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성경은 원리 원칙만 있습니다. 부엌에서 어떻게 하라는 것 없습니다. 장터에서 어떻게 하라는 것 없습니다. 원리 원칙만 있습니다. 교과서를 다 끝낸 학생이 그것을 가지고 응용만 하게 되면 그 문제가 다 풀리고 출세도 하고 성공도 하듯이 원리 원칙이 든 성경말씀, 여러분들의 장터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그것을 응용해 풀어 갈 때 그곳에 성공이 있고 출세가 있고 축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곧 바로 배우는 신자입니다. 바로 배워야 바로 믿고 바로 살게 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모범적이요, 강건한 교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평화스러운 교회입니다. 동시에 바로 배우는 교회였습니다. 오늘의 우리 교회도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신령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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