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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절당한 기도속에 담긴 축복 / 고후 12: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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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후12장 1절- 10절
제목: 거절 속에 담긴 축복
설교 : 강목사 (한길교회)


수요일 저녁마다 기도에 관한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마 대략 6개월정도 기도에 대해서만 다루지 않았나 싶은데 처음 기도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하려고 했을 때에는 길어야 열번 정도 설교하면 더 이상 설교할 게 없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벌써 6개월이나 지났고 그동안 했던 기도에 대한 설교만도 스무편이 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기도에 대해서는 할 말도 많고 살펴보고 배워야할 것도 많은데 곧 주님의 기도, 주기도문 강해를 하는 것으로 기도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할 말이 많은 것은 역설적으로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기도를 하는 족족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아마 사람들은 기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겁니다.

매일 밥상위에 나오는 김치반찬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매일 나오는 것이고, 당연히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외국여행을 한다든지 해서 김치를 구경도 못하게 되면 어쩌다가 김치 통조림 하나만 맛을 보게 되어도 감사하게 되고 감격까지 하게 되고,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 아닙니까?

기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늘 응답받고 기도만 하면 그대로 되고, 기도 하기도 전에 다 채워지고.....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기도의 가치, 기도의 소중함, 기도라고 하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스라엘백성을 생각해 보세요. 처음 만나를 대했을 때에는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이름도 만나..."이게 뭐야?"....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와서 '이게 뭐야? 이게 뭐야?'하고 다녔으면 이름이 아예 만나가 되었겠습니까? 염려할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이 하루만 지나면 딱딱 어김없이 채워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만나를 가지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따위 만나' '만나 나부랭이'.... 이런 식으로 불평하고 멸시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인간입니다. 편하게 해주고 쉽게 해주면 고마운 줄도 모르고 가치도 다 잊어버립니다. 그렇지만 막상 아쉬워지고 곤궁해지면 그 때 가서야 그 소중함을 아는겁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늘 응답되는 것은 아니라는데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기도하는 족족 그대로 응답을 주시지 않고 때로는 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기도에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 같은 무응답의 반응을 보이기도 하시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고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가치와 또 기도에 담긴 여러가지 놀라운 영적인 비밀과 교훈들을 더 풍성하게 느끼고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를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이자 마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솔직히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에서 더 깊은 영적 교훈을 얻습니까? 아니면 응답되지 않거나 혹은 다르게 응답되는 것에서 더 깊은 영적 은혜를 깨닫게 됩니까?
단순히 생각할 때에는 기도한대로 응답되면 그게 우리 믿음을 더 성장시켜줄 것 같습니다. 늘 감사만 할 것 같고 너무 기뻐서 이전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간절히 하나님을 섬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목회를 하면서 지켜보건대 응답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 응답을 응답으로 간증한다거나, 열심히 기도한대로 이루어졌을 때 그것 때문에 응답받기 전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응답받기 전보다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을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한 그대로 응답되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경우까지 있고, 차라리 기도가 응답되기 전까지는 기도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과도 잘 만나던 사람이 기도가 이루어지고 나니까 아예 기도하는 것 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봅니다. 그저 응답의 기쁨에만 젖어서 응답을 주신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응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거나 기도한 것과는 다른 결과를 안게된 사람은 적어도 고민합니다. 깊이 생각합니다. 물론 응답이 없거나 다른 응답을 받고서 실망해서 시험에 드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건 대개 초신자들의 경우이고,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응답되지 않는 기도때문에 더 고민하고 더 묵상하고 도대체 이런 결과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서 하나님앞에 울면서 더 매어 달립니다.

그러면 거의 예외없이 하나님은 거기에 대답을 주십니다. 깨달음을 주십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그걸 밝혀주십니다. 그럴때 이 사람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하나님을 더 잘 알게되고 하나님과 더 깊이 가까와집니다. 고민하고 울부짖는 밤을 보낸 사람은 그 울음과 답답함의 크기만큼이나 성장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절당한 기도를 통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기도를 다르게 응답하신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더 깊어지고 더 성숙해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절당한 기도는 그 백성을 더욱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이자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절당한 기도의 대표적인 한 예가 나와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위해 세번을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말로 세번이지 히브리인들의 표현으로 세번이라는 것은 완전하게 기도했다, 모자람이 없이 충분히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셨을 때 몇 번 기도하셨습니까? 세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건 충분히, 완전히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대충 대충 기도한 것 아니고, 어쩌다가 생각나면 한번 두번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정말 그 기도의 성취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의 기도는 기도한대로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8절, 9절입니다.

바울이 받은 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응답대신에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의 축복은 기도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소원의 성취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질 능력 이런 것만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사실은 더 큰 축복이고 더 큰 은혜입니다.

물질이란 건 세상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물질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제일 많은 나라가 어디라고 했습니까? 물질적으로 풍요한 미국이나 스웨덴이 아니라 방글라데시라고 했습니다. 물질이란 것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그렇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나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는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컴퓨터 인터넷 백과사전을 아무리 두들겨봐도 이건 알 수 없는겁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응답대신에 말씀을 주셨다, 그 마음을 밝혀 주셨다....이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때문에 낙망하지 말고, 응답대신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것이 더 큰 축복입니다. 그것이 더 큰 은혜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응답대신에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9절...

육체의 가시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밝혀주셨습니다. 그 가시를 왜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 버려두시는지, 그리고 그 가시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바울에게 깊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왜 가시를 그대로 내 버려두신다고 했습니까? "내 능력--곧 하나님의 능력은 ... 약한데서....즉 완전한 조건이나 편안한 생활 가운데서가 아니라 약하고 문제를 가진 상황 가운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더욱 더 빛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가시가 없으면 네가 하나님을 의지할 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학식이나 영적 체험 그리고 영적 은사를 완벽하게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풍부한 구약지식, 거기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난 놀라운 체험, 또한 손수건만 얹어도 귀신이 쫓겨가는 놀라운 은사로 완벽하게 무장한 사람입니다. 12장 1절부터 보면 바울이 하늘에 올라간 특별한 은사체험을 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식이라면 지식, 체험이라면 체험, 은사라면 은사에 남들이 감히 해보지 못한 천국환상의 체험까지 있으니 이런 사람이 자칫하면 얼마나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 저는 마른 막대깁니다....능력 안 주시면 저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이렇게 간절히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돈만 좀 있어도 얼마나 교만한데 지식에 은사에 체험까지 있으니 얼마나 오만방자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하나님앞에 늘 엎드릴 수 있도록, 자랑할려고 하다가도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영적 안전장치를 하나 남겨두시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망하지 않는 길이고, 그것이 바울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앞에 늘 머물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시를 없애달라는 바울의 간절한 기도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것이 바울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기도의 거절 이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바울은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같은 미천한 인간을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토록 깊게 배려하시는 하나님이신줄 예전엔 미처 몰랐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은 했지만 그 사랑의 깊이가 이정도인줄은 몰랐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자기를 가까이 두기를 원하시는 줄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바울을 감격시켰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전능자가 피조물을 위해 이토록 깊은 배려를 하고 계시는줄 비로소 알게 되고서 바울은 이제 기뻐하기 시작합니다. 9절- 10절

이제는 내 가시를 기뻐할 뿐만 아니라 아예 자랑하고 다니겠다..."이 사람들아 이 가시가 무언지 아느냐? 바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야,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생각하시는지 이 가시를 나에게 주셨다...." 전에는 부끄러운 가시였습니다. 이전에는 감추고 싶고 내 삶을 정말 짜증나게하고 힘들고 지치게 하는 가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나니 이 가시만큼 자랑스러운게 없습니다. 이 가시만큼 기뻐할게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나를 약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나는 기뻐하겠노라..고 했습니다. 10절

가시만 나를 약하게 해서 하나님께 붙들려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난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이런 것들도 나를 약하게 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절대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을 보니 이런 것들까지도 다 나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요,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런 것 전부가 다 감사요 감격의 제목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거절당한 기도 속에서도 바울과 같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응답만이 복이 아니라 응답대신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더 감격시키고 우리를 더 풍성하게 해 주시는 것임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 사이드 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통이 없도록 기도하기보다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기도하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한 일이다"
고통은 하나 지나가면 또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해서 그 고통은 사라질 수 있지만 예기치 못했던 또 다른 문제가 불쑥 다시 찾아오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닙니까? 그러니 고통을 없애 달라는 기도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기도입니다.
그러나 고통속에 담긴 의미, 즉 다시 말하면 고통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왜 그 고통을 나에게 내버려두시는지 그 고통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더욱 가깝게 하며, 멀리 계시는 것 같던 하나님을 바로 눈앞에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같은 친밀한 분으로 우리 가슴에 다가오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정을 알게 될 때 그것이 우리를 감격시키고 그것이 우리를 살 맛 나게 합니다.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소원의 성취보다 더 감격적인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거절 당한 기도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바울의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바울과 같이 기도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제 더 이상 가시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 것처럼 기뻐하고 감격할 수 있었던 바울의 그 풍성함과 넉넉함을 온전히 소유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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