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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닮아가자 / 눅 9: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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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그리스도를 닮아가자
본 문: 눅 9:18-27
설교 : 서성복 목사 (찬미예수교회)
 

오늘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의 본질은 인간의 성품의 고양이나 개발도 아니요, 막연한 종교적 특성의 강화도 아닙니다. 성도들의 신앙의 절대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 곧 영성의 알파와 오메가인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인품과 삶 속에서 얼마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볼 수 있는지에 따라 영성의 척도 또한 가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따라 경건한 생활을 하느냐? 얼마나 기도생활을 하느냐? 얼마나 많이 복음을 증거하느냐?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닮아가야 하는지 함께 깊이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사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엡 4:21-24).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바로 그분의 사상, 생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간다고 했을 때 악한 생각을 함부로 품을 수 있습니까? 벌써 생각부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행동은 생각에 의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미국의 수필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다음과 같이 생각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종일 자기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사람은 하루 종일 자기가 생각하는 그대로 되기 마련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사람의 일생은 자기 생각 그대로 되기 마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은 "생각을 바꾸면서 자기 세계도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 즉"(잠언 23:7)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 스마일즈는 "생각을 심으십시오. 행동을 거둘 것입니다. 행동을 심으십시오. 습관을 거둘 것입니다. 습관을 심으십시오. 성격을 거둘 것입니다. 성격을 심으십시오. 신의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큰 생각을 기르십시오. 왜냐하면 자기가 하고 있는 생각 이상으로 오르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사상, 생각을 닮아가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사상은 그 사람의 삶의 정신적인 기반이요 또 사고와 행동의 동기가 됩니다. 격조높고 올바른 사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 삶의 내용도 비례하게 될 것입니다. 야인시대 드라마를 보면 김두한과 정진영은 어릴적부터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사상이 그들을 갈라놓았습니다. 민주주의와 공상주의 때문에 둘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일리(Paulo Fraire)는 'conscientization'(자각화 혹은 자의식화)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백 개의 부락에 훈련받은 문맹 퇴치 요원을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글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무식한 대중과 함께 살면서 사람답게 살려면 글을 알아야 한다는 의식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각화된 후에 글을 배우는 것과 무턱대고 배우는 것과는 그 속도에 있어서 배(倍)의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상이 행동으로 연결되려면 먼저 의식화 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공산주의자들은 소위 '사상 교육'이란 세뇌(洗腦) 작업을 날마다 합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발동력(發動力)을 기르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의 사상을, 석가모니는 '극기의 생', 나폴레옹 '유럽통치', 루터는 '개인의 자유',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은 오직 '천국'입니다. 그러기에 유대 도상에서 외친 첫 설교의 제목이 '천국'이요(막 1:15), 그의 마지막 설교도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본받고 닮아가는 것에서 자연히 형성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사상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주권'에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뜻을 이 세상 모든 가치 위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이 인정되는 세계가 곧 천국이요 그 주권이 부인되는 세계가 사단의 영역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종교적이요 전통이 깊은 종교단체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뜻 대신 인간의 권세나 뜻이 드러나는 것을 주 예수는 외면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 이 한 구절 속에 예수님의 사상과 가치관이 응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이 깊은 성도일수록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앞세우고 높이려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대한 신봉과 순종이 결여된 영성이란 그 본질적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그분의 사상을 닮아가는 것은 영생을 지향함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식과 생각을 늘 사로잡고 있었던 사상적 기조는 '영생'이었습니다. 영생이란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는 이 땅에서도 이와 같은 영생을 늘 지향하셨던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영원한 천국의 삶이 있음을 늘 말씀하셨고 그 삶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이 세상의 악과 모순을 이기시고 늘 희망 안에서 사셨으며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시고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도 개의치'(히 12:2)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누릴 영광의 삶을 확신하기에 세상의 불의도 유혹도 고난도 이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과 순교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영생'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저들의 손에 죽지만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참아내었습니다.
찬송가에 영광송이 있습니다(2장과 4장, 'Gloria Patri' 는 '아버지께 영광'이라는 뜻). 영광송의 곡은 후대의 것이나 찬송시는 오래된 것으로 사도 시대(1세기)에 이미 불렀었습니다. 이것을 '순교자의 노래'라고 합니다. 로마 박해 때 성도들이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이 찬송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보내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 무궁토록 성삼위께 영광 영광"(찬 2장)
순교자들은 죽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끝이 아니라 행복한 해결로 생각하여 영광의 찬송을 부르며 십자가 형틀이나 사자 앞으로 전진했습니다. 그들은 네로 황제에게는 무가치한 패배자로 보였으나 그들의 피는 로마 제국 뿐 아니라 유럽과 아메리카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걸쳐 복음의 개선가를 울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의 깊은 성도일수록 그 삶의 가치와 목표를 '영생 천국'에 맞추며 그 소망으로 삶의 원동력을 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빌 2:5-8).

첫째, 그분의 성품을 절대적으로 의로운 성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곧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골 1:19) 하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의 기반은 곧 '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와 뜻에 위배되는 길은 결코 조금이라도 걷지 않으셨습니다. 의와 진리가 아닌 것은 결코 인정하거나 타협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단이 '나에게 절을 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노라'고 제의했을 때 그것을 일언지하 거절하고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창 39장)에 보면 요셉은 보디발의 노예로 살면서도 끝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보디발의 부인의 유혹을 이겨냅니다. 그로 인해서 감옥에 갇히지만 그래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이 깊은 성도들은 우리 주님처럼 자신에게 불이익과 희생이 닥칠지라도 세상의 불의와 손잡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그분의 성품은 온전한 사랑의 성품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성품의 가장 큰 특성은 온전하신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도무지 할 수 없는 완전한 사랑, 값없이 주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과 의의 성품이 조화를 이루어 완전무결한 인품이 나타난 것입니다. 의없는 사랑은 무질서와 허무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없는 의는 이 세계에 공포와 절망을 가져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비록 의를 추구하셨지만 사랑과 관용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삶과 이웃을 대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이 독실한 성도들 중에 완고하고, 까다로우며,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과 눈을 지니지 못한 분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옳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주님을 온전히 닮지 않아서입니다. '사랑없는 천사'가 바로 '악마'입니다. '마귀'나 '귀신'이나 모두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주님의 천사들과 이들의 차이는 '사랑'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사랑없는 영성은 곧 허위입니다. 영성은 곧 사랑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분은 온유와 인내로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안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도 충만하지만 한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성품도 공존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성을 지닌 성도들이 본받고 닮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모순되고 불의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실천해 나가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온전히 신적 성품을 유지하시고 나타내셨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온유와 인내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12영 더되는 천사들을 부르실 수도 있었지만 참았습니다. 빌라도의 심문에도, 백성들의 핍박에도 한 마디도 안하시고 인내하셨습니다. 온유함으로 그들을 포용하셨습니다. 쉽게 노하거나 좌절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온유와 인내로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와 판결에 맡기는 삶의 처세가 사랑과 의를 이루는 영적인 지혜임을 예수께 배워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삶의 행적을 닮아가는 것(벧전 2:21-23).

첫째,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내용은 곧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난은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병들 수 있고, 사고 당할 수도 있고, 일찍 죽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은 늘 따라다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구원의 길을 마련하려는 삶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른다는 진리를 주님은 늘 말씀하셨으며 그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9년 동안 시베리아 유배생활을 한 뒤 {죄와 벌}, {학대받는 사람들}을 썼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단테는 정적들에 의해 추방된 뒤 방랑하면서 {신곡}이란 불후의 명작을 집필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도 호화스러운 작곡실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헨델은 반신불수로 감옥에 갇힌 후 세계인의 영혼을 뒤흔드는 명곡을 작곡한 것입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남부러울 것 없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부인이 죽고 부채로 재산을 날리는 등 최악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영원의 세계'를 화폭에 담으며 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인생의 가치'를 누렸습니다. 그가 바로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1606-1669)입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야경이 있는데 이 그림 값을 묻는 사람에게 그는 말했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통해 참 생명이 무엇인지 깨닫고 나서 그린 그림이기에 값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이 깊은 성도일수록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함을 깊게 인식합니다. 유치하고 천박한 신앙인들이 세상의 물질적 축복과 안일한 삶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를 위해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는 모습 속에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둘째, 주와 함께 영광 누림을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은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세상에서 당당하고 희망이 넘치게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 보좌 옆에서 존귀와 영광을 누릴 것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잠깐이요 천국의 상급은 영원함을 늘 인식하셨던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삶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삶의 희망과 자신감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와 함께 천국의 영광을 누릴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예수를 닮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상, 생각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의 의로운 성품, 온전한 사랑의 성품, 온유와 인내로 이루신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삶의 자취, 고난이나 환난이나 핍박을 참아내면서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생각, 예수의 마음, 예수의 운명을 닮아가는 영적인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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