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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라 / 호 2: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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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라 
> 설교자  :  황요한 목사 (평안의교회)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라
●본문:호2:18-23


최근에 우리들의 삶을 현재보다 좀더 향상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흐름들이 거세어지고 있습니다. '슬로비족'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그 한 부류인데 영어로 "Slow but Better" 즉 "천천히 그러나 더 낫게"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Down Shifting" 이라는 용어도 유행입니다. 자동차의 기어를 저속으로 옮긴다는 의미인데,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들의 생활 방식의 새로운 패턴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마다 숨가쁘게 인생을 달려갑니다. 좀더 많이 갖기 위해서, 좀 더 많이, 좀 더 높이를 외치며 숨가쁘게 달려가던 그들이 어느 날 이렇게 달려만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을 하면서 고속으로 달리던 기아를 저속으로 변속하듯이, 그들의 삶의 속도를 조정하자고 하는 새로운 의식의 전환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멜로 비유된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보다 많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위해 바알에게 달려가기를 열심이었고, 인간의 행복과 쾌락을 즐기기 위해 아스다롯을 연애하기에 열심이었던 그들이었습니다. 바알이 내게 떡과 물과 기름과 모든 것을 준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열심히 연애하며 집착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판단이었고 착각이었음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개유(開諭) 시키시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달려가도 달려가도 아골 골짜기 같을 수 밖에 없던 이스라엘에게 소망의 문을 열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잃었던 그의 포도원을 회복시켜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18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란, 변화의 날을 말합니다. 말씀으로 변화 되고 예수 안에서 변화된 날을 말합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리라" 여기에 소개돼 있는 짐승이나 곤충들은 모두 공격적이고 사나운 것들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활과 창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칼과 창은 전쟁의 상징적인 도구들입니다. 오늘날도 강대국들은 "평화는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고, 전쟁을 통해서 평화를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합니다만 사실상 물리적인 방법으로 이룬 평화란 진정한 평화일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란 내면적인 것이고 내적 동의없는 평화적 미소는 가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프카니스탄도 전쟁을 통해 지금은 조용한듯 보이지만 실상은 부족간의 분열과 암투가 극에 달해있다고 그곳에서 사역 중에 있는 선교사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프카니스탄에서의 평화란,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과 같은 이념을 가지고 있는 부족의 승리일 뿐이지요. 다른 부족 입장에서 보면 전혀 평화가 아닌 것입니다. 전쟁을 통하여 평화를 주겠다고 하는 논리가 얼마나 허황된 논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18절에서 말씀하시는 "그 날은" 물리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많은 칼과 창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긴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변화는 근본적인 것입니다. 본질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여성들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이 많지요. 긴 머리를 했다가 숏커트를 했다가, 스트레이트를 했다가 퍼머먼트를 해도 분위기는 달라지지만 그것으로 그 사람 내면이 변화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죠. 진정한 변화는 이사야의 말씀처럼 칼이 변해서 보습이 되고 창이 변하여 쟁기가 되는 그 날이 진정한 평화의 날인 것입니다.

지금 한반도 주변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미국은 이라크를 곧 공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데드라인을 설정하고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전쟁이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도 두려운 일인데, 언제부터 전쟁을 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카운트 다운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지금 이라크 국민들은 예고된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해 하고 두려워 떨고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미국은 이라크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동시에 두 지역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윈 - 윈" 전략을 세워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어떤 이유와 명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는 6,25라고 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전쟁을 통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남과 북에서 일 천만이 넘는 이산 가족들이 지금도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실상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해도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정치적으로 좋아할 주변 국가들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 나라와 세계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도 사실은 크리스천입니다만 어느 날 천주교에 가서 영세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기독교인도 아니고 가톨릭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라고 지난 대선 당시 인터뷰에서 스스로 고백을 한적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정치를 잘하기를 기도하는 것 보다 앞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제자리에 돌아오기를 위해 기도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19절에서 주님은 약속합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겠다." 원래 장가라고 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 집에 가는 것이지요. 전통적인 결혼식을 보면 신랑이 신부집 마당에서 혼인예식을 치른 후에 신부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혼인예식이 마치곤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도 혼인예식의 절차가 우리와 비슷합니다. 신랑이 신부집에 밤중에 찾아가서 혼인잔치를 하지요.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 고 말씀하셨다면, 어떠한 신부를 기준으로 삼으셨겠습니까?

아마도 첫 번째 조건은 순결함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상징된 고멜을 신부로 맞아 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1장에서 소개된 고멜의 모습은 음란한 여인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전혀 순결하지 않습니다. 정숙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바알을 연애하기에 끊임없이 집을 뛰쳐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신부로 맞이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특별한 선언으로 보아야 합니다. 곧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인정하시겠다고 하는 은혜의 선언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주님의 신부로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의와 공변됨으로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의로움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를 수 없는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죄에서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총으로 의롭다함을 얻어 신부될 자격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언제나 옳고 그른 것만 따지면서 살수는 없어요. 의와 공변됨의 가장 중요한 것은 거짓이 없는 모습인데, 때때로 부부에게서 거짓이 드러난다면 그 결혼은 지속될 수 없을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을 바울 사도가 디모데를 향해 칭찬했던 것 처럼, 부부에게 있어서 생명은 거짓이 없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부부가 늘 선악간에 깨끗하다고 해서 살맛 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옳고 그른 것만 따지다보면 피곤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님은 요구합니다.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나아 오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따뜻함입니다, 용서함입니다, 은혜입니다. 왠지 그 사람은 따뜻해 보이고 그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용서받을 것 같고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즐겨 쓰는 말로 은혜로운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건강한 가정의 삶일수록 따뜻함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업을 하면서 받은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얻는 말할 수 없는 부담과 피곤함도, 집에만 들어거면 눈녹듯 녹아내리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따뜻함과 평안함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성도들 앞에 설때에 언제나 정장을 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사역에 임합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면 정장을 한 자세로 아내와 자녀들에게 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바지를 입거나 잠옷을 입는 등 편안한 복장으로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제가 정장 차림이 아니라고 탓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이 감추어지고 덮어지는 것이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는 긍휼함과 은혜가 넘쳐나야 합니다. 모든 우리의 허물들이 덮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말씀합니다. 20절을 보면, "내가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진실함이란 말의 의미 속에는 "기둥 같은"이란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가정을 지키는 기둥 같은 가장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진실함이 가득찬 기둥같은 이미지가 부부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종종 남편들이 아내 몰래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했다가 나중에 큰 손실을 입고서야 아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맛이 나지 않을 거예요. 반대로 아내가 남편 몰래 자신의 집이나 재산을 보증 서 주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차압통지서가 날아왔을 때, 남편 역시 살 맛이 나지를 않을 겁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집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중요한 삶의 부분들을 의논하거나 합의하지 않았다고 하는 진실성의 결여에서 오는 상실감이 더 큰 것이지요. 함께해도 망할 수도 있고, 함께해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부부간의 동역자 의식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에는 한가지 특별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주님의 기준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내게 네게 장가들리라" 우리를 순결한 신부로 인정해 주시고 영원토록 동거할 신부로 축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감격이지요. 날마다 실수와 잘못된 삶으로 계속되었던 고멜과 같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오늘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 주님과 동거 동행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의와 공변됨으로,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그리고 거짓이 없는 진실함으로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는 여러분들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의 겉모습만 변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본질이 바뀌듯 우리의 근본이 바뀌어 바알을 따라가며 아스다롯을 연애하던 우리의 발걸음이 변하여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고마우신 하나님아버지, 이제 주님 앞에 구합니다. 우리를 순결한 아내로, 신부로 맞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주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감격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주님의 신부로서의 자격을 가진 사랑하는 성도들되게 하시고, 그 삶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언제나 인도하여 주시 옵소서. 우리의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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