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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뛰어넘어라 / 요 13: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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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뛰어넘어라 (요13:21-30 )

- 청년대학부설교홈 천안외대 김홍진 목사 -


  "신이 죽었다"라고 무신론적 발언을 한 유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니체입니다. 니체만 이야기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원을 다녔던 연세대학교 화장실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10여 년 전 일입니다. 학생들이 화장실에 낙서를 많이 했습니다. 유치한 낙서 말고요. 뭐 "윗 쪽을 보시오. 좌측을 보시오, 뒤를 보시오. 뭘 봐' 이런 유치한 낙서가 아닌 철학적이 낙서를 많이 합니다. 이런 낙서였습니다. 어느 학생이 "신은 죽었다-니체" 이렇게 써놨습니다. 이것을 본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밑에 썼습니다. "니체는 죽었다. - 신" 그걸 본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밑에다 썼습니다. "니네 둘 다 죽었다 - 화장실 아줌마" 마지막으로 한 학생이 마무리를 해 놨습니다. "썰렁해 죽겠다. 임마!"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독일의 목사였습니다. 니체는 청년 때에 세속적인 철학에 심취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니체의 변화를 위해서, 믿음으로 다시 설 것을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무신론을 주장하면서 미쳐서 죽습니다. 낙서처럼 휘갈긴 그의 메모지에는 "나는 지옥으로 간다"하고  죽었습니다.

  변화되지 못한 한 인간의 종말이 이렇게 처절합니다. 신앙의 물은 먹었지만, 신앙의 분위기는 익혔지만, 신앙의 문화 속에서 살았지만, 변화되지 못한 한 인간의 종말은 이처럼 비참합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주님의 뒤를 좇으면서도 주님의 말씀대로 변화되지 못한 유다의 비극적인 인생 드라마를 소개하고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주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주님을 떠나고 배가 터져 죽고 말았습니다. 비극적 운명을 마지한 사람입니다. 변화되지 못한 사람의 종말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지만, 왜 변화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입니까? 가룟 유다가 변화되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 변화의 장애물을 알아보고 그 장애물을 뛰어넘어 신앙의 성숙한 모습에 이르는 길을 배우고자 합니다. 변화의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첫째, 변화의 장애물은 자기자신을 믿는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의 교만은 가장 큰 변화의 장애물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믿는 교만을 뛰어넘어야 변화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마지막까지 변화되지 못한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는 삼년동안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훈련을 받아도, 본질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의 교만 때문입니다.

  유다의 마음속에는 어떤 우월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머리가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샘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29절 보면 돈궤를 맡을 만큼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적 신임을 받으면서 우월감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교만입니다.

  12제자 중, 유독 유다만 다만 남쪽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도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꼭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같은 동족이지만 가난한 갈릴리 사람들을 업신여겼고 심지어는 죄악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생각하기를, "나는 무식한 갈릴리 어부들 같지 않아. 저희들보다 낫다"고 하는 우월 의식, 교만한 맘이 있었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사고와 철학이 강한 교만한 사람은 결코 변화될 수 없습니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내가 지금 여기 와서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너희들과 같을 수 없는 엘리트야! 지성인이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변화되지 못합니다.

  자기주장이 강한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의 사고와 부합되어야만 어떤 사실을 동의합니다. 자기의 전제로 판단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자기 철학 때문에 주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체험이 없습니다. 변화되지 않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한 교만한 사람들은 상대적인 의로움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신앙의 연륜이 있다는 것, 성경을 좀 안다는 것. 내가 좀 학벌이 좋다는 것, 이런 자기의 철학과 사상이 강한 교만한 자는 복음을 수용하지 않기에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런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신앙은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철학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주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과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아멘)

  우리는 주님 앞에 겸손히 서는 순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 철학이 부서지는 순간 변화가 시작됩니다. 자기 철학을 말씀 뒤로 옮겨놓고, 말씀에 엎드리는 순간 변화의 드라마는 시작됩니다. 자기 주장과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 꿇는 순간 변화가 시작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둘째, 변화의 장애물은 세속적인 가치관 때문입니다. 유다는 물질 중심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욕심입니다. 욕심은 변화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무엇일까요? 돈입니다.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음에 욕심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변화되기 힘듭니다.

  유다는 돈 문제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2장 5절에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붙자, 유다의 반응을 보세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훨씬 낳겠다고 합니다. 이 때 6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욕심 많은 사람인줄 몰랐습니다. 계산이 분명하고 경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잘 모릅니다. 자신이 도적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물질의 욕심에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유다의 욕심은 선생을 팔아버리게 됩니다. 유다에게는 욕심이 변화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신앙의 변화에 실패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지 못합니까? 욕심 때문이지 않을까요? 세상적인 가치관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베르 까뮈의 "오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인간이 물질에 대한 욕심이 결정적인 순간에 비극을 초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의 한 외딴 들판에 여관을 짓고 생활하는 모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어렸을 때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가난과 고독에 시달린 모녀는 어느 날부터 이상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부유하게 보이는 남자 손님에게 독약을 먹여 살해한 후 금품을 빼앗고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어느 날, 말쑥한 차림의 한 청년이 여관을 찾았습니다. 모녀는 청년에게 독약을 먹인 후 강물에 던졌습니다. 여인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다가 피살자의 신분증을 보고 절규했습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지금까지 기다려온 아들이었습니다. 여인은 아들을 던져버린 강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오빠를 죽인 여동생은 "범죄는 결국 무서운 고독일 뿐"이라고 외치며 자살했습니다. 청년은 고향을 떠난 후 크게 성공해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러 귀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은 결정적인 순간에 신앙의 자리에서 실패하게 만듭니다. 욕심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욕심이 그처럼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온갖 이유를 갖다 놓지만 뿌리 깊은 곳에는 욕심입니다. 세상의 욕심은 주님의 제자로 변화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고 맙니다.

  마음이 돈이나 다른 욕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변화되지 못합니다. 그는 모든 가치를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하여 마음에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은 내가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숙이란 자신을 버리는 연습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자기를 포기하는 훈련입니다. 영적 성장이란 욕심을 버리고 주님을 채워넣는 것입니다. 믿음의 변화란 세상의 가치관을 주님의 가치관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은 쾌락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일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이제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세상의 욕심을 조절하십시오. 지금까지 지녀왔던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변화의 출발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적인 욕심을 다스리면서 변화의 새 출발을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변화의 장애물은 회개의 기회를 거부하는 고집입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회개의 기회를 수용해야 합니다.

  변화는 회개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회개가 없으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변화를 가능케 하는 최후의 단계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거부할 때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유다는 회개의 기회가 있었으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변화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변화의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본문의 최후의 만찬에서 21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하나 나를 팔 것이다" 이 말에 제자들이 서로 의심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님 누구입니까? 누가 주님을 팔 자 입니까?" 2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서 가룟 유다를 주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예수께서 이 배신자에게 보인 태도는 너무나 신사적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의 배신을 말씀하시면서도 결코 유다를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 만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하신 말씀은 "유다야, 나는 너의 생각을 알고 있다. 너는 지금 매우 악한 생각에 빠져 있지.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지칭해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유다만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그의 양심에 도전하고 지적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죄인들에 대하여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과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수치가 주님 앞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반면에 유다에게 주는 마지막 변화의 기회, 회개의 기회, 뉘우침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빵 조각을 받아들고 30절에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그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그 밤은 우연한 밤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회개의 기회였습니다. 회개 없는 자는 밤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붙들어야 신앙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늘 제공하십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수치를 들어내시고 부끄러운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뉘우침의 기회를 주십니다.

  유다가 그 밤에 주님이 찍어다 주시는 빵 한 조각을 받아들면서, "주님 내가 마음에 음흉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했더라면, 그는 밤을 지나 찬란히 떠오르는 아침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외면했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으로 찾아오는 그 때가 바로 회개의 기회입니다. 한 조각의 말씀 던져 주면서 내 양심을 자극하고, 내 신앙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실 때에, 그 때가 바로 내가 주님 앞에서 회개해야할 할 기회입니다. 변화되어 새롭게 태어날 기회입니다.

  설교 말씀을 해보면, 여러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초연해지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 반항하려고 합니다. 간혹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슴을 치며 눈시울을 적시며 회개의 기회로 삼는 자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향하여 도전할 때, 그 말씀 앞에 양심에 작은 수치가 드러나거든, 그 말씀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 앞에 엎드러지기 바랍니다. 그것이 살 길 입니다. 그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회개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입니다. 

  여기 중요한 27절 말씀이 있습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회개의 기회를 붙들지 않는 유다에게 "네 계획대로 하라" "네가 꾸며놓은 데로 행하라"고 합니다. 이 주님의 말씀이 속시원한 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회개의 기회를 거부하는 유다를 포기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어버려두시는 것은 무서운 저주입니다. 내어버려두심은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포기입니다. 하나님의 포기는 가장 무서운 형벌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거부할 때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회개할 때 우리의 변화의 드라마는 시작할 것입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기회는 주님이 나를 변화시키는 사랑의 채찍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변화는 시작될 것입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는 다 유다와 같은 인생을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다처럼 위험성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아무도 장담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여기서 가룟 유다가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는 변화될 가능성의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변화의 장애물이 많이 있지만 장애물을 극복하고, 주님 앞에서 변화를 창출할 수 있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여러분들의 각자의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잘났다고 우쭐대는 자기 교만이 아닙니까? 변화의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탐욕이 아닙니까? 욕심이 아닙니까? 도대체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회개를 거부하는 고집입니까?

  아무도 유다처럼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은 유다 못지 않게 교만이 있습니다. 유다 못지 않게 욕심이 있습니다. 유다 못지 않게 회개를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이제 변화의 인생을 출발하기 위하여, 비극적인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하여, 겸손의 마음을 조아리십시오. 욕심과 탐심과 탐욕을 성령으로 제어하십시오. 회개의 기회에 겸손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자신만만하나 자신을 믿지 마십시오. 자신의 명석함을 믿지 말고 겸손히 주님 앞에 다시 서십시오. 성령님께서 회개의 음성을 요구하실 때 순전한 맘으로 마음을 내어 놓으십시오. 회개함으로 당신을 다시 만드십시오.

  그리하여 매일 매일 새롭게, 더욱 더욱 새롭게, 보다 더 나은 신앙의 모습으로 변화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과 기도>

  내가 변화되기를 주님은 기대하십니다. 이 찬송 부르면서 주 앞에 다시 서십시오.

『고백』"어느 날 다가온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어요. 뜨거운 사람을 느꼈지만 부를 수 없었어요. 어느 날 다가온 주님의 모습을 쳐다볼 수 없었어요. 따뜻한 사랑을 느꼈지만 바라보지 못했어요. 비우지 못한 작은 가슴, 주님의 사랑은 너무커요. 부서지고 낮아져도 주님 앞에 설 수 없었어요. 오늘도 찾아온 주님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부를수록 다정한 주님 모습 가만히 안아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나의 변화의 장애물을 알게 하여주옵소서. 장애물이 자신이라면 주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기 바랍니다. 세속적인 탐욕과 욕심이 장애물이라면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변화를 위한 회개의 기회가 바로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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