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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다음은? / 느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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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느 3:1∼32)
설교자 : 배태현  (뉴질랜드 참된교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사성어 중에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을 따르는 부하가 한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무슨 장군이 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독불장군'이란 말은 '모든 일은 다 함께 도와서 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 말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처럼 어울리는 곳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독불장군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여러 지체 중에서 어느 하나만 분리되어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 서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지체가 다 함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각각의 지체가 훌륭하고 뛰어나다고 해도 서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룰 때에만이 비로소 참된 가치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느헤미야서 3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의 이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로는 발음하기도 힘들고, 기억하기 쉽지 않을 만큼 생소한 이름들이 나열된 본문은 언뜻 보면 무척 지루해 보입니다. 성경일 읽다 보면 종종 족보라든지 여러 사람들의 이름들이 함께 기록된 부분들을 만나게 되고, 그 때마다 아무 생각 없이 건성으로 사람들의 이름을 그냥 줄줄 읽어 내려가거나 아니면 읽지 않고 건너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기록한 분들의 입장에 보면 그 분들이 족보라든가 아니면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했을 때에는 분명 어떤 목적과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총 13장으로 그리 길지 않은 느헤미야서만 보아도 곳곳에 수많은 사람들과 족속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느헤미야서를 기록한 느헤미야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와 같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오늘 본문을 다시 읽고, 깊이 묵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에 관한 짧은 기록들 사이사이에 감추어져있는 보배로운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참된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결코 독불장군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다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나서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대인으로서 당시 바벨론을 무너뜨렸던 강대국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1세 재임 당시 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술을 맡은 고위 관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유다에서 온 동족들로부터 예루살렘의 실상을 듣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어 여전히 방치되어 있고, 남아 있거나 포로에서 귀환했던 힘없는 유대인들은 가난과 이방 민족의 노략으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슬피 울며 고난 당하는 조국을 위해 금식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에게 고하여 허락을 받고 주전 444년 유다의 총독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내외의 온갖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견고한 신앙으로 무장하여 드디어 착공 52일만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느헤미야 3장에 기록된 이름들은 바로 그 때,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 성을 쌓았던 사람들입니다. 총 38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 금속을 가공하는 금장색이나 향품 장사와 같은 상인들, 예루살렘의 각 지역을 다스리는 정치 지도자들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소유를 아끼지 않고 성벽 재건을 위해 사용했는데, 사실은 이들만이 아니라 온 유다 백성들이 모두 이 일을 위해 헌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벽 재건과 같은 대공사가 단지 52일만에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과 이러한 성벽 재건을 지켜보던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다는 느헤미야 6:16의 기록만 보아도 당시 이들의 헌신과 열심과 수고가 얼마나 뜨거웠었는 지를 충분히 짐작케 합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 우리는 교회가 바로 세워질 수 있는 몇 가지 원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지도자들의 모범이 교회를 바로 세운다는 원리를 발견합니다. 3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이름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름은 대제사장 엘리아십입니다. 대제사장은 당시 최고의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가장 먼저 예루살렘 성문들 중에서 양문을 건축하고, 성벽 역시 일정 부분을 담당해서 재건했습니다. 그것이 모든 백성들에게 귀한 본보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가장 헌신했던 사람은 틀림없이 느헤미야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3장에는 느헤미야의 이름이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 어느 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수고하여 이루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공로가 컸을 자신의 이름을 빼고, 공사에 참여해서 수고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자세하게 기록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가장 먼저 공사에 참여하여 헌신함으로써 모든 백성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고, 느헤미야는 열심히 일한 공로를 자신을 믿고 따라준 사람들에 돌릴 줄 아는 겸손한 인격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벽 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예루살렘 각 지역을 다스리는 정치 지도자들 역시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지도자들의 모범이 있었기에 모든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성벽 재건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 바울 역시 말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하지 않으셨고, 늘 모든 일에 본을 보임으로써 그 본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삶으로 권위를 인정받으셨습니다. 베드로전사 2:21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교회 안에 직분을 가진 모든 중간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고 말씀만 하신 것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손수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먼저 본을 보이셨던 것처럼, 영적인 지도자들의 권위는 말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으로 세워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아니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에게 모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 삶으로 본을 보임으로써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말만 많은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삶으로 본을 보이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많아질 때, 교회는 바로 세워지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교회를 바로 세우는 원리는 교회는 구성원들이 모두 함께 세워야한다는 원리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대공사는 어느 한 사람의 재력가가 공사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충당하지 않았고, 어느 한 사람의 건축가가 전체 공사를 일일이 지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세운 양문을 중심으로 해서 성벽의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일정 구간의 성벽을 맡아서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며 무너진 성벽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운 성벽을 맡아 건축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정치 지도자들, 상인들, 기술자들, 남녀와 노소, 그렇게 거의 모든 백성들이 각자의 형편에 따라 성벽 건축의 한 몫을 맡아 헌신했고, 최선을 다해 수고했습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맡은 부분의 성벽만을 최선을 다해 건축한 것이지만 결국 그것으로 인해 전체 성벽이 완성되고, 무너졌던 성벽이 다시 우뚝 세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어느 한 사람의 헌신과 수고로 바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는 리더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독불장군은 있을 수 없습니다. 리더의 리드를 따르는 사람들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의 리드를 잘 따라주었던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있었고, 그 지도자들의 리드를 잘 따라주었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두 함께 세우지 않았다면 예루살렘 성벽은 쉽게 세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3장 5절에 보면 드고아 지역에 있던 일부 귀족들은 성벽 재건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을 보면 일부 귀족들이 공사 책임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어디나 방관들은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방관자가 되거나, 구경꾼이 되거나, 건설적이지 못한 비판자가 되지 마십시오. 반대로 교회를 혼자서 다 세우려 드는 책임감을 가장한 자만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세례 요한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회개를 외치면서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일침을 놓았었습니다. 교회는 구성원 전체가 각자 자기의 몫만큼 헌신하며, 모두가 함께 수고할 때,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 발견하는 교회를 바로 세우는 원리는 바른 소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바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몫만큼 성벽을 건축했는데 그 몫이란 사람마다 각각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 하나를 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문과 성벽을 다 맡아서 건축하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성벽만 맡아서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망대와 성벽을 함께 맡아 건축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넓은 구간을 건축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좁은 구간을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공사 경비를 조달했고, 어떤 이들은 몸으로 성벽을 쌓아올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공사를 감독했고, 어떤 이들은 그 감독의 지시에 따라 수고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느 하나 성벽을 재건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모두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이 한결같이 성벽 재건에 헌신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소명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억지로 사람들을 공사장으로 내몰고 공사비용을 각출했다면 아마도 공사는 처음 계획과는 달리 원만하게 진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원하여 공사를 맡았고, 모두가 팔을 걷어 부치고 공사에 참여했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2:17∼18을 보면 예루살렘에 부임한 느헤미야는 남몰래 무너진 성벽을 살펴본 후에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사실로 사람들을 격려했고, 그 말에 고무된 사람들이 힘을 내어 건축할 것은 결단하게 됩니다. 또한 그 뿐만이 아니라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비웃는 자들을 향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꼭 이루어 주실 것이오.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은, 그분의 종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오. 예루살렘에서는 당신들이 차지할 몫이 없소."라고 담대히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더욱 고무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분명한 소명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무섭게 헌신하기 시작했고, 결국 52일만에 공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나를 부르셨는 지 분명한 소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그 소명을 따라 자신의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더욱 바로 세워지고, 더욱 건강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참된 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참된 교회 안에서 가장 먼저 헌신을 다짐하는 셀그룹 1의 모든 멤버 여러분! 느헤미야 3장에서 제 마음에 가장 와 닿는 말은 3장에만 총 29번이나 기록되어 있는 "그 다음은"이라는 말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양문을 건축한 것을 시작으로 그 다음 부분을 건축한 사람들의 이름이 "그 다음은"이라는 말 다음에 계속해서 추가되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느헤미야 3장 32절에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제 33절부터는 우리가 써야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입니다. 아니 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조병진 집사님, 그 다음은 김기영 집사님, 그 다음은 최항준 집사님 … 그 다음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십시오. 참된 교회를 바로 세워 가는 이 아름다운 일에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분명한 소명으로 무장되어, 서로에게 소중한 헌신의 본을 보여주며, 단 사람의 방관자도 없이 함께 동역하며, 함께 수고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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