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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적인 범죄를 멀리하십시오 / 삼하 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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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적인 범죄를 멀리하십시오 (삼하 11:1-27)
이름: 이한규목사([email protected])
     

< 성적인 범죄는 무엇보다 큰 죄입니다 >

기독교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창조하심으로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입니다. 그런 사실들은 가정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가정은 행복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큰 가정인 교회와 작은 가정인 우리 각자의 가정의 행복을 떠나서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드는 것은 돈과 명예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식구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아도 식구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삶은 허무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소중하게 가꾸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과 식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유교 문화에서 자란 우리는 아내 자랑을 하는 사람을 팔불출이라고 놀려댔습니다. 그러나 칠불출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우리는 아내를 높여주어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자녀교육은 부부가 서로 높여주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사춘기도 잘 지내고, 기초 체력이 튼튼한 아이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간에 높여주지 않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아이가 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아빠에게 중학교 1학년 아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아빠! 세계 3대 악처가 누구예요? 소크라테스 아내인 크산티페와 톨스토이의 아내인 소피아와 그리고 누구죠?" 요한 웨슬레의 아내인 메리라는 답을 모르니까 아빠는 이 아들에게 알밤을 먹이면서 "임마! 네 엄마 이름도 몰라!" 하더랍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자녀가 좋은 정서를 가지고 자라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배우자를 높여주고 그에 대한 성적인 책임을 다하면서 가정을 소중하게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깨지는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성적인 범죄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적인 범죄를 무엇보다 큰 죄라고 말합니다. 그 범죄는 몇 시간만에 사람의 정상적인 삶을 빼앗고 가정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그처럼 성적 범죄가 큰 죄이고, 항상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것도 알면서 왜 그 죄에 빠져듭니까?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간음죄를 범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자기 스스로를 속입니다. 큰 죄임을 알면서도 큰 죄가 아닌 것처럼 자기 자신을 속이고, 비밀스럽게 하면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기 때문에 그 죄에 빠집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6장 7절은 말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 일이 없을 줄 착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적인 범죄를 신원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신원해 주신다"는 말은 "주님께서 보복하신다! 주님께서 앙갚음을 하신다! 주님께서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입니다. 다른 죄는 몰라도 성적인 죄로 가정과 교회를 문란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보복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범죄는 힘써 피하되 특히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더욱 없어야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시험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내가 교회의 시험거리를 제공하는 불행한 존재가 되는 일은 꿈에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 성적인 거침돌이 되지 마십시오 >

오늘 본문은 성적인 범죄의 무서움을 잘 알려주는 본문입니다. 다윗이 약 50세쯤 되었을 때 나라에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과 그 신복과 싸울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을 전쟁터로 보냈습니다(1절). 전군을 동원했다는 것은 국가적 위기의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때에 다윗은 예루살렘에 혼자 남아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났다'는 말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도 되고 잠을 자다가 깼다는 말도 됩니다. 그처럼 잠이 오지 않으면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국사를 살피며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안 하고 파자마를 입고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장면에서 다윗만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왕궁 지붕이 보이는 곳에서 자기 몸을 노출한 밧세바도 잘못이 있습니다. 여성들이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몸을 많이 노출하는 것이나 지나치게 시선을 끄는 복장은 좋지 않습니다. 여성들 자신은 눈처럼 순결해도 남성이 잘못된 생각을 하도록 하는 거침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13절은 "형제 앞에 거칠 것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 성적인 유혹 앞에서는 무조건 도망치십시오 >

밧세바의 노출된 몸을 보고 다윗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만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백성들의 본이 되어야 하는 왕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또한 성경이 금하는 계명을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가정이 있고 아내와 자녀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음욕은 무서운 것입니다. 음욕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적 유혹을 받을 때 오직 한 가지 명령만을 합니다. 그것은 "도망쳐라! 피하라!(Flee!)"는 명령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음행을 피하라(Flee sexual immorality)"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Flee also youthful lusts)..." 음욕이 생기면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시고, 그 장소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음욕과는 피흘리기까지 맞서 싸우지 마십시오. 사창가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내가 음욕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나 보자!"고 하며 테스트하지 마시고, 나체쇼 하는 곳에 가서 혹은 이상한 그림을 보면서 "나는 이 음욕을 이겨야 돼!" 하고 끙끙대며 자신의 신앙을 테스트하지 마십시오. 성적 유혹이 있는 곳에서는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입니다. 도망가지 않으면 자신의 소중한 것을 털리게 되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고 무조건 도망쳤습니다(창 39:12). 그때는 다른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똬리를 튼 방울뱀과 논리적으로 따지고 이성적으로 대항합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성적 유혹은 가장 무서운 방울뱀보다도 더 무섭기 때문에 성적 유혹을 받을 때는 무조건 그 사람과 그 현장으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망치지 않고 얼빠진 상태로 있다가 신하를 보내 그 여인에 대해 알아오게 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이 구절에서 신하가 "아니,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닙니까?"하고 반문하며 대답한 것은 "이 여자만은 안됩니다!"라는 무언의 충언와도 같습니다.

사무엘하 23장을 보면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과 남편 우리아는 모두 다윗은 충성스런 30인 용사 중의 하나였습니다(34,39절). 그리고 엘리암은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해야 했는데 결국 다윗은 그녀와 관계를 합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사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다윗의 그런 모습은 거의 습관입니다. 사무엘하 3장을 보면 다윗은 유다 지파만의 왕이었을 때 6명의 아내로부터 6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2-5절). 그런데 나라가 완전히 통일되자 사무엘하 5장을 보면 다윗이 처첩들을 더 취해서 아들과 딸들을 더 많이 낳았습니다(13-16절). 그런 모습은 물론 정치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신명기 17장 17절에 나오는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모세의 계명을 상습적으로 어긴 것이었습니다.

남자들은 대개 강한 성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욕구를 언제든지 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음욕을 피하고 절제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고 그 음욕을 채웠습니다. 그러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욕구는 채워지지 않고 더 생겨났습니다. 그처럼 욕구는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흥분되고, 더 자극합니다. 욕구는 자라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욕구는 감소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전해주는 가장 큰 거짓말 중의 하나는 욕구를 채우면 욕구가 감소될 것이라는 거짓말입니다(One of the lies of our secular society is that if you just satisfy the sexual appetite, then it will be abated). 다윗은 그 거짓말에 속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인을 취했는데 이번에는 그가 충성스런 부하의 아내를 취했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물론 결혼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밧세바를 자기의 욕구를 채우는 대상으로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 죄는 값비싼 가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

그때 밧세바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고민하거나 저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온갖 애교를 떨었을지 모릅니다. 다윗은 잘생겼고, 나이는 많지만 능력 있는 남자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비밀스럽게 함께 즐겼습니다. 그 비밀스런 관계가 사람을 더 성적인 범죄에 끌리게 만듭니다. 우리만의 비밀이라는 것이 스릴을 주고, 또한 그 관계가 들통나면 다리몽둥이가 부러지게 된다는 사실도 스릴을 주기 때문에 그 관계를 끊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유혹에서는 처음부터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비밀에 붙여질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혹시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갈 6:7).

결국 성경 말씀대로 얘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4절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밧세바는 자기의 매달 주기가 막 끝났기에 임신 기간이 아닌 줄 알고 다윗과 동침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만 임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약 한 달 후에 밧세바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다윗에게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죄는 항상 가격표가 있습니다(Sin always has a price tag). 그 가격표는 항상 비쌉니다. 그 중에서 성적인 범죄의 가격표는 가장 비싸서 항상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은 철저히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상황은 훨씬 좋아졌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잘못한 후에 거짓말하는 것은 더 나쁘기 때문에 거짓말로 잘못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라고 말합니다. 죄와 잘못을 고백하면 부끄럽게 될 수 있고,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고백으로 죄의 사슬은 끊어집니다. 그러나 죄를 거짓말과 속임수로 감춘다면 훨씬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자신을 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기발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전황과 안부를 물은 뒤 수고했다고 치하하고 "집에 가서 발을 씻으라!"고 했습니다(8절). 그것은 우리아의 발이 냄새가 났다는 말이 아니라 편히 쉬고 아내와 함께 지내라는 히브리식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아와 밧세바가 같이 잠자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9달만에 아이를 낳는 경우도 많으니까 아무도 그녀의 불륜 사실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 다윗은 잠을 잘 잤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성가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신하로부터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고 다윗의 신하들과 함께 왕궁 문에서 잤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9절). 왜 집에서 자지 않았으냐고 다윗이 물으니까 우리아는 큰 전쟁 중에 집에서 자기만 편히 잠을 잘 수 없어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모델처럼 예쁜 아내가 있는 몇십 미터 떨어지지 않은 집을 놔두고 왕궁 문에서 잠을 자는 그 충성심을 다윗은 크게 치하해야 했지만 다윗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 번째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우리아를 만찬에 초대해서 그를 칭찬하며 먹고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아의 군기를 빠지게 하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빌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아가 이번만은 집으로 가게 하소서!" 그러나 이번에도 우리아는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놀라운 충성심에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어야 했지만 다윗은 더 파괴적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비밀 편지와 함께 우리아를 전쟁터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요압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서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죽게 만듭니다. 그러자 이제 사건은 종결된 것 같았습니다. 곧 다윗은 편한 마음으로 밧세바와 결혼을 합니다.

당시 다윗 왕의 결혼 소식은 큰 뉴스였을 것입니다.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예루살렘 일보에서는 이렇게 썼을 것입니다. "다윗 왕이 전쟁 영웅의 과부와 결혼하다!" 그런데 9달이 채 못 되어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신문 기자들은 그런 중요한 사실들을 결코 놓치지 않지만 누가 왕에게 그 점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겠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못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27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결국 다윗은 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고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 다윗의 간음사건이 주는 4가지 교훈 >

이 다윗의 간음사건이 주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죄는 어느 날 갑자기 짓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를 보면 이미 마음속에 그 죄가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다윗은 성적 욕구로부터 도망치는 법을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밧세바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상한 그림으로부터 도망치십시오. 다른 상대와 부적절한 관계로부터 도망치십시오(Flee inappropriate relationships with others). 그처럼 삶을 후회하게 만드는 모든 범죄로부터 도망치십시오.

둘째, 죄의 파괴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교훈입니다. 다윗이 일생 동안 쌓았던 명성이 몇 시간의 죄악된 행동으로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십시오. 몇 시간의 죄는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몇 시간의 죄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의 죄의 유혹은 누구나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 죄는 감추면 대개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다윗은 처음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간음죄만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간음죄를 덮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가장 충성스런 부하와 다른 군사들을 죽였습니다. 죄는 결코 한번 저질러지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증식됩니다(Sin multiplies). 죄를 감추는 것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기만 합니다(Concealing sin only makes it worse).

그리고 죄는 아니더라도 꺼림칙하면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죄는 아니어도 꺼림칙한 생각을 가지면 꼭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우리는 가끔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든지 꺼림칙한 생각이 드는 것은 빨리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성적인 범죄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빨리 그 죄의 사슬을 끊도록 힘써야 합니다.

넷째,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죄는 감추면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자백하고 회개하면 우리는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잠언 28장 13절은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날 성적인 죄의 문제에서 완전히 깨끗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죄에 이끌려 배우자나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실망한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로 실망한다는 것 자체가 좋은 길을 가고자 하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성적 범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고 해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깨끗이 씻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과거가 어떻든 상관없이 오늘 이 시간부터 결심하십시오. "하나님! 항상 저의 몸과 영혼이 깨끗하게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이 결단을 힘써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성도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면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한 가지 길은 구원의 은혜를 믿고 안심하고 방종에 빠지는 길이고, 또 한 가지 길은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더욱 깨끗한 몸과 마음을 유지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려고 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후자의 길을 선택해서 가정과 교회를 잘 지키고, 주님 만나는 날 정결한 처녀의 모습으로 기쁘게 만날 수 있는 분들이 다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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