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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짐을 더는 3가지 길 / 갈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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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짐을 더는 3가지 길
(갈 6:1-5,030223)
이한규 목사 (분당사랑의교회)
   
 
< 피해자 의식에 젖어 있는 세대 >

지난주에 미국의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이런 뉴스가 있었습니다. 작년 8월 2일 클리프 하튼(Cliff Harton)이란 39세의 해고된 경찰이 해고 직후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자기 집에서 아내를 쏴 죽였습니다. 그리고 달아나다가 다른 경찰의 총에 맞아 부상당한 상태로 체포되었습니다. 몇몇 매스컴에서는 해고와 아내의 이혼 요구로 인한 충격이 그를 살인으로 몰고 갔다고 분석하며 은근히 그를 옹호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쏜 경찰을 고소했습니다. 아내를 죽였고, 총을 들고 대항을 했으면서 경찰이 잔인하고 과도한 대응을 했다고 고소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죄는 외면하고 자기가 받은 피해만 생각하는 분들이 점차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뉴스도 있었습니다. 어떤 FBI 요원은 공금 2천불을 횡령해서 도박으로 날려 해고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징계를 받아들이는 대신에 FBI 당국을 고발했습니다. 고발 이유는 자신의 도박 습관은 미국 장애자 법령으로 보호받는 후천적 장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가 소송에서 이겨서 FBI는 그의 해고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고 자신을 피해자로 보려는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명백히 잘못을 하고도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이 나빴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보다는 자기를 희생자라고 여기고 불평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Nowadays many people have changed from acknowledging that they are a sinner to whining that they are a victim). 그처럼 불평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인생의 짐은 더욱 무거워지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인생의 짐을 덜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 시간에는 3가지만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자기의 짐을 지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자기를 살피며 자기의 짐을 지면 남에게 불평하지 않게 되고 자기에게서 진정한 자랑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내 삶을 사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내 믿음이 중요하고, 내 기도가 중요하고, 내 노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주위를 살피기 전에 나를 먼저 살피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지 말고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난처한 일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핑계와 변명과 책임전가를 하지만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런 비겁한 모습을 떨쳐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어떻게 죽을지를 말씀하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요 21:19). 그때 베드로는 요한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되나요?"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22).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혹은 그들의 삶이 여러분들의 삶보다 쉬운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잘 따르고 예수님의 뜻을 잘 수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It really doesn't matter what others are doing, or whether their life is easier than yours. Your important task is to follow Christ and do what he has told you to do).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내가 무엇을 받을까?" 하는 것보다 "내가 무엇을 할까?"에 더 신경을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받을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 더 받지 못하고, 받아도 더 받고 싶은 마음이 들고 만족도 없고 감사도 사라지고 영혼이 말라가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할 일에 더 신경을 쓰면 반드시 더 받게 되고 조금 받아도 만족하며 감사하고 영혼이 풍성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받을 일만 생각하는 사람'보다 '할 일을 생각하는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제 삶에 들어와 저를 주관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는 손을 놓고 축복 받을 생각만 합니다. 그처럼 준비도 안하고, 노력도 안하고, 훈련도 안하면 어떻게 축복을 받겠습니까? 기도는 축복으로 가는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기도한 후에는 노력하고, 준비하고, 훈련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훈련과 연습이란 미리 내 짐을 지는 것입니다. 미리 내 짐을 많이 질수록 인생의 짐은 덜어지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최희섭 선수에게 "왜 인터넷을 하지 않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저도 하고 싶지만 야구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시력이 나빠질까 봐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면 반드시 인생의 짐은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자기가 세운 목적을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자신을 훈련하면 성공은 주어지고 인생의 짐은 덜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교인들은 노력도 없이 영적인 삶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성도의 삶이 순례자의 삶이 아니고 허니문이 계속되는 삶인 줄 압니다. 그 신앙이 잘못임을 아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일을 다하면서 주님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할 일을 하면서 주님의 오실 날을 기다리면 그 기다림이 얼마나 뜻깊은 기다림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할 일은 하지 않고 주님 오시는 날짜만 기다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1987년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과 인디아나 대학 사이에 대학 농구 지역 결승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몇 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루이지애나 대학이 8점을 이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루이지애나 대학 선수들이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했습니다. 텔레비전 해설자가 말했습니다. "지금 루이지애나 선수들이 경기에는 집중하지 않고 시계만 보는군요. 저러면 안됩니다." 그들은 결국 시계만 보다가 1점 차이로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좋은 경기를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시계만 쳐다보며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992년 다미선교회의 종말론을 따랐던 사람들은 시계만 쳐다보다가 수많은 축복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는 삶이나 내용을 채우는 삶이 없이 시계만 바라보는 삶을 살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내 짐을 힘껏 지고 내 안에 좋은 것들로 채우려고 할 때 우리의 인생의 짐은 틀림없이 덜어지게 될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짐을 지려고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은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질 때 진정한 쉼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면 짐이 덜어집니다. 그러나 헌신이 없으면 세상 짐이 더해지게 됩니다. 언제 가정생활이 행복합니까? 부부가 서로 헌신할 때 행복하게 됩니다. 언제 교회생활이 재미있게 됩니까? 교회를 위해서 헌신할 때 재미있게 됩니다. 언제 신앙의 맛을 알게 됩니까? 하나님께 헌신할 때 알게 됩니다.

지금 우리 나라도 이혼증가율이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결심은 했지만 헌신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Because people have made a decision. but have never made a commitment). 그들은 가정을 이루겠다고 결심하고 사람들 앞에 서서 고백도 하고, 반지도 교환하고, 서로 키스하고, 함께 축하객들 사이를 행진합니다. 그처럼 결심을 했지만 서로가 헌신하지 않으면 그 결혼생활은 금방 무너지게 됩니다.

어떤 남편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믿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교회에 나가면 아내가 너무 좋아하는 것을 알고 같이 교회에 나가 줍니다. 그것도 헌신입니다. 아내는 그 남편의 마음을 압니다. 그리고 남편이 돈만 아는 남편, 잠자리만 아는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에 고마워하고 더욱 남편에게 순종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헌신이 견고한 가정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축복하시고, 남편에게도 귀한 믿음을 선물로 줄 것입니다.

교회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영적인 이혼이 일어나 교회 다니기를 포기하는 일이 생깁니까?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결심은 있는데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조금 더 드려보세요. 애정이 그만큼 더 생깁니다. 설거지 한번 더 해보세요. 애정이 그만큼 더 생깁니다. 청소 한번 더 해보세요. 애정이 그만큼 더 생깁니다. 지금 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보다 한번 더 참석해 보세요. 애정이 그만큼 더 생깁니다. 그렇게 축적된 애정이 교회생활을 견고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위대한 설교를 해도 설교만 가지고는 교인의 마음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향한 교인의 애정도 있어야 합니다. 그 애정은 주로 헌신을 통해서 생깁니다. 애정이 먼저 생겨야 드리겠다는 분은 행복하기가 참 어렵고 까다롭습니다. 그러나 먼저 드림을 힘쓰면 애정이 생깁니다. 소속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처럼 먼저 드림으로 애정을 만들어 가는 분들에게 행복한 교회생활이 주어집니다.

초신자들 중에는 헌신을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헌신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렵게 생각하고 안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초신자들은 언뜻 생각하면 헌신이 별로 재미도 주지 않을 것 같고, 마치 자신의 삶을 제한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들어도 그것을 하기를 두려워합니다. "내 형편에 어떻게 물질적 헌신을 하나?"

그러나 그것은 불행한 생각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하나님께 헌신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불행을 느끼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진실한 헌신은 기쁨과 재미와 즐거움과 축복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복을 아는 사람은 교회에서 오해와 원치 않게 펼쳐지는 상황으로 큰 시험을 당해도 교회 다니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끈질기게 교회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 교회생활이 진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무엇이 있구나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 행복의 체험을 누가 합니까? 헌신을 해본 사람이 하게 됩니다.

헌신을 모르는 사람은 성도의 삶이 '많은 규칙을 따르는 삶'이라고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헌신을 아는 사람은 성도의 삶이 '한 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렵지 않고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성도의 삶은 '규칙과 관련한 삶'이 아니라 '사랑과 관련한 삶'입니다(The Christian life is not about laws, it is about love). 그래서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예수님처럼 되려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우리의 잘못을 위에서 지켜보고 규칙을 가지고 다스리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고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잘 행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는지에는 관심이 있으십니다(God is not interested in how well we perform, but how much we love him). 사실상 우리는 모든 규칙을 다 지켜도 하나님의 기준에는 미칠 수 없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랑하면 순종하게 됩니다. 또한 사랑은 순종을 기쁘게 만드는 것입니다(Love is also what makes obedience a joy). 사랑은 순종의 길을 가려고 그분 곁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과 순종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사랑의 순종으로 거룩한 짐을 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인생의 짐은 훨씬 덜어질 것입니다.

3. 셋째, 서로의 짐을 지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우리는 내 짐도 힘써 지고, 하나님의 짐도 힘써 져야 하지만 이웃의 짐도 힘써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짐을 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피해자 의식'을 가지고 남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취하려고 하지 말고 '헌신자 의식'을 가지고 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주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을 돕는 삶, 어려운 자의 형편을 생각해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반드시 축복하실 것입니다.

작년 초에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집에 돌아가는데 이웃에 사는 식당 주인이 저에게 쪽지 하나를 주었습니다. 어떤 택시 운전사가 제 차 오른쪽을 받고 그냥 도망치려는 것을 붙잡고 전화번호를 받아놓은 쪽지였습니다. 차에 가보니까 차 오른쪽 뒷부분이 10센티 정도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전화를 하고 보상을 받을까 생각도 했지만 택시 운전사가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약간 흉하긴 하지만 아주 창피한 정도는 아니니까 그냥 타고 다니자고 생각하고 전화를 포기했습니다. 피해가 생기면 작은 것 하나까지 끝까지 추적하여 피해금액보다 훨씬 더 보상을 받으려는 세태가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부터 먼저 남의 형편을 살펴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2주 전에 아내가 자동차 키를 잃어버려서 자동차 키를 복사했습니다. 그런데 키를 잘못 복사해 주어서 자동차 키가 빠지지를 않았습니다. 나중에 어렵게 키를 뺐는데 그 뒤 시동을 걸 때마다 끽 소리가 났습니다. 스타트 모터가 손상된 것입니다. 카센터 주인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것은 키 복사집 주인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으니까 보상을 받으세요." 그런데 키 복사하면서 먹고사는 분이 실수한 것을 가지고 몇십만 원 보상해 달라고 하면 그분에게 너무 충격이 될까봐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갔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난생 처음으로 수술대 위에 섰었습니다. 그때 저를 받은 그 30대 청년에게 "왜 이렇게 조심이 없나!" 하고 처음에는 화가 났습니다. 저는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 청년이 달려와서 받았기 때문에 그 청년의 과실이 명백했습니다. 목격자도 많았습니다. 그 청년의 친구가 말했습니다. "저희들이 다 물어드릴 테니까 병원에서 치료받으세요." 그런데도 저를 받은 그 청년은 자기가 더 아픈 척 했습니다.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너무 엄살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괘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병원에서 눈 위 부분을 6바늘 꿰맸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 청년이 친구로부터 무슨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마 이런 얘기였을 것입니다. "네가 명백히 잘못을 해 놓고 피해자 괜히 속 긁지 말라! 그래야 좋을 것 하나도 없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엄살(?)을 멈추고 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저! 죄송해요." 그 죄송하다는 한 마디 말에 그 동안 괘씸하게 생각했던 모든 감정이 다 사라지고 오히려 그 청년을 위로해주었습니다. "괜찮다. 살다보면 그럴 수 있다!" 사실 저 자신도 그런 사건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치료비 문제가 걸렸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치료비를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치료비를 아예 안 받는다고 하면 상대방의 존재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인 것 같아서 치료비를 요구했습니다. "오만 원만 주세요!" 병원 왔다 갔다 하는 교통비도 안되는 돈이었습니다. 저의 그 말을 듣고 그 청년은 오만 원을 두 손으로 저에게 공손히 바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친구와 떠났습니다. 저는 편한 마음으로 떠나는 그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흐뭇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청년 한 사람이라도 무슨 사고만 만났다 하면 지나치게 보상비를 요구하는 사회 세태를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물결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좋은 사람임을 증명하려고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닙니다. 남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더 행복을 가져다주는 삶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교훈을 잘 받아들인다면 그 청년도 나중에 피해자가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가해자에게 관용을 베풀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점차 좋은 물결이 우리 사회에 더 확산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땀과 노력을 통해서만 물질을 얻고, 또한 얻은 물질은 힘써 좋은 일에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드림의 정신을 통해 서로 짐을 덜어준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살만한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 대구 지하철 참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남선교회 헌신예배에서 드려지는 헌금 전액을 유가족들에게 보내기로 남선교회 회원들이 결정했습니다. 참 잘한 결정입니다. 남을 도우려는 일에는 누구보다 재빠른 우리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며칠 전, 우리가 기도해드리는 월드 크리스챤 네트웍의(WCN)의 정길진 목사님으로부터 백혈병에 걸린 목찬수 학생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학생의 아버지는 현재 안산에서 아무 것도 없이 작년 11월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40평을 임대하여 반은 살림집으로 쓰고, 반은 교회로 쓰며 개척교회를 하는데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들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요새 사람들은 개척교회를 피하는 편입니다. 게다가 살림집과 같이 붙어 있는 교회는 더 피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사님의 짐이 얼마나 무거울 것인지 저는 인천에서 개척교회를 해보았기 때문에 압니다. 저는 32세에 자녀들이 없었을 때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그나마 견딜 만 했습니다. 그런데 50이 가까운 상태에서 개척교회를 하는 분들을 보면 그 목회의 짐과 처량함이란 보통 사람이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통계적으로 50이 넘은 분들의 개척교회 성공률은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목회를 하는데 작년 12월 31일 송구영신 예배를 준비하는 중에 찬수 학생이 병원으로 실려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이들 학비도 내기 어려워 정부 생활 보조금 신청을 해서 학비 면제를 받아 살았는데 지금은 엄청난 치료비 때문에 목사님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그 짐의 일부라도 맡았으면 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후원 덕분에 이은경 집사님이 2차례에 걸친 골수이식 수술 끝에 백혈병을 이기고 지금 우리 곁에서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까? 이번에도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기를 바랍니다.< 후원계좌 : 신한은행 642-12-079560 이승연(요삼일육선교회) >

우리가 남의 짐을 조금이라도 더 지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조금이라도 더 져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배만 문지르며 만족하는 사람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눈앞에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실천도 없이 변명에만 급급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헌신이 없으면 경제적으로는 약간의 플러스가 되겠지만 그 영혼은 빈곤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헌신하면 경제적으로는 약간의 마이너스가 되겠지만 그 영혼은 풍성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헌신이 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신을 하지 않으면 죄에 우리 자신의 영혼을 내어줄 가능성이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헌신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힘써 헌신해 보십시오. 자기의 짐을 힘써 지면서도, 하나님의 짐을 지고, 서로의 짐을 힘써 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짐을 덜어주시고, 평화와 안식이 넘치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 선한 짐을 많이 짐으로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된 삶을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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